285화
[18회차] 신출내기 용사
쏘시아가 시스템을 조정하면서, 나의 네 권속이 모든 판타지아 교육장에 균일하게 배치됐다.
그들은 원주민이랑 마찬가지로 초등교육장, 중등교육장, 고등교육장 순서대로 능력치가 강화됐다.
그리고 이점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내 더미들이 일일이 편지를 써서 알렉스, 황녀 등을 지휘해야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분할되어 흩어진 권속들은 내 더미 대신 잡다한 업무를 수행했다.
단숨에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이 4배로 늘어난 셈.
“4배가 아니라 5배겠지. 내 남편은 산수를 못 하는 모양이네?”
“쯧쯧. 내 아내는 눈치가 없는 모양이네. 당연히 나는 빼야지.”
더미들의 움직임이 줄어들수록 내 정신적인 피로도가 감소한다.
이건 매우 중요하다.
언제든 최상의 상태로 싸울 수 있다는 뜻이니까.
위기의식을 느낀 교장이 ‘정정당당하게 한 판 붙자!’라고 외치면, 언제든 손 벌려 환영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쉬기만 하는 건 아니다.
“안녕하십니까, 용사님. 저는 라누벨보다 뛰어난 고고학자고, 이쪽은 제 손가락을 사랑하는 아내입니다. 용사님께 먼저 말을 걸긴 했지만, 절대로 수상한 사람이- 왜?”
“기둥서방이 꿈이신 남편은 입 다물고 계세요. 뛰어난 아내님이 알아서 해줄 테니 제발! 용사님. 저희는 북대륙에서 온 고위귀족입니다. 신분은 신성제국에서 보증해줄 거예요.”
신출내기 용사들의 파티에 들어가서 자료를 수집했다.
굳이 신출내기만 노린 이유?
“오옷! 새로운 동료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생각이 단순하다.
남을 해쳐서 경험치를 쌓고, 위험을 동반한 무료봉사에 거부감이 없다.
판타지아 프로그램이 지구의 사회부적응자만 낚아오는 탓일까?
신출내기들은 이 야만적인 세계를 RPG 게임쯤으로 여긴다.
대체로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라면서 하루쯤 방황 후, 사람을 짚신처럼 베어낼 수 있게 된다.
“남편. 신기하지 않아? 네가 처음 판타지아 차원에 들어왔을 때, 유치원에 다니던 꼬마들이 커서 같은 이 세계에서 같은 시대를 경험한다는 것이.”
“별로.”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에 괴로울 뿐이다.
또한, 신출내기들은 아직 스킬 ‘업보’의 등급이 쌓이지 않아서 모험의 여정이 미쳐 날뛰지 않는다.
무료로 봉사하는 만큼 원주민들도 마음을 여는 식이다.
신출내기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옆에서 관찰하며, 어떤 식으로 모험하는지 분석한다.
그러다가 괜찮다고 여겨지면?
바로 대책을 마련하다.
▶유감: 생도들의 도전 횟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어요. 너무 어렵다는 청원이 끊이지 않지만, 이대로 쭉 진행될 것 같아요.
설명 고마워, 예쁘고 똑똑한 교생 아가씨!
시간은 나의 편이다. 그리고 시간이 이미 꽤 흘렀다.
경력의 숫자가 최소 세 자릿수인 중학생이나, 네 자릿수인 고등학생들이 이번 패치로 급격히 강해지긴 했지만, 내 앞에 당도해서 귀찮게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걱정: 요즘 선배님들이 회의를 자주 하시네요. 얼굴 뵙기 힘든 대선배님들도 은근히 많이 참석하시고. 매우 기이한 광경이에요.
교직원 일당이 대책회의를 자주 소집한다는 건, 그만큼 내 일이 잘 풀린다는 징조이자 방증이다.
이대로만 쭉 가자!
“커엌-!”
반면, 신출내기 용사의 동료가 되어 관찰하는 내 일정은 즐겁지 않고 다소 지루했다.
신출내기가 괜히 신출내기겠는가?
몬스터의 레벨을 확인 후, 만만하다고 여겨지면 무작정 돌진했다가 고꾸라진 신출내기가 많았다.
거참!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지크의 첫 모험은 매우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적으로.
1년, 2년, 5년, 10년….
그래도 자료가 조금씩 쌓여갔다.
꿈과 희망을 품고 모험을 떠난 신출내기 용사들이 중앙대륙에서 대부분 은퇴하거나 사망하는 바람에 다른 대륙의 정보는 거의 없었지만.
중앙대륙은 완벽히 내 수중에 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머니: 불효막심한 아들. 네 동생이 얼마나 귀엽고 착한 줄 알아? (오전 7:32)
⤷어머니: 오늘 구청장이 직접 찾아와서 와서 악수까지 하고 가서 깜짝 놀랐다. ^^ (오후 4:15)
⤷어머니: 요즘 걱정이야. 얘가 너무 똑똑해서 유치원에 보낼 필요가 없거든. (오후 5:23)
⤷어머니: 그 조그마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오전 8:61)
⤷어머니: 아들. 들어봐. 몸이 예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아. 테니스도 더 오래 칠 수 있고. (오전 7:34)
어머니의 마음도 사악한 둘째에게 완전히 장악당했다!
어머니. 이 불효자는 밤마다 비겁한 마누라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너,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소름 돋는 줄 알아? 그리고 콧물을 내 피부에 닦지 마!”
“엉덩이야.”
“어디든 간에!”
오늘도 신출내기 용사님 하나가 고꾸라지셨다.
약 3개월 동안 알렉스 밑에서 기초체력과 공격기술을 배운 후, 고고학자 라누벨이랑 모험을 떠나는 부분까지 순조로웠다.
심지어 이번 용사는 인어공주 아쿠아, 성녀A, 토마토 기사단장을 동료로 영입해냈다.
그리고 잡다한 동료로 ‘용자’가 둘.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용사님. 몰랑을 아십니까?”
“아, 아니요.”
“몰랑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몰랑해지실 겁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저는 고향별에서 믿던 종교가 있어요. 그분을 배신할 순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몰랑교는 이단자들에게도 몰랑하니까요.”
“그분은 이단이….”
“단, 신성몰랑제국에서 활동하는 이단자들에게는 관세가 붙습니다.”
“예?”
요즘 용사들은 지구에서 관세가 뭔지 안 배우나?
기사가 무식한 용사에게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신성몰랑제국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세금이 추가로 붙습니다. 여관을 이용하실 때도 일반객보다 숙박료가 더 비쌉니다.”
“저도 관세가 뭔지는 알아요. 그래서 얼마나 붙는데요?”
“2배.”
“...네?”
“뭐든지 2배 가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제국 어디를 가든 수세식 화장실은 유료입니다.”
“무슨…!”
너무나 합리적인 논리에 용사가 발끈했다.
왜 저래?
“거룩하신 그분은 모두에게 몰랑하십니다. 그래서 몰랑교도들은 이단자들이랑 함께 사는 시련을 늘 겪지요. 관세는 그 정신적 고통을 금전적으로 조금이나마 덜어주자는 취지가 담긴 훌륭한 정책입니다.”
“세상에….”
“용사님. 입국하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관세를 피하고자 몰랑교도인 척한 용사 일행은 벌금을 크게 물었다.
들킨 원인은?
몰랑하게 인사하고 기도하지 않은 탓이었다.
한두 번은 실수로 넘어갈 수 있지만, 반복되면 주민의 신고를 받은 이단심문관이 뜰 수밖에 없다.
물론,
“오오! 이리도 건실한 신도님이 계실 줄이야! 몰랑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몰랑.”
“공명정대한 몰랑의 가호가 그대에게도 함께하길. 몰랑.”
나는 예외였다.
몰랑교 제1 사도란 정체를 밝히지 않더라도, 모든 신도가 고개를 조아리며 내게 존경을 표시했다.
여기에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이단자 중의 이단자인 내 마누라는 남편을 잘 만난 덕분에 손가락질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쏘시아! 고마운 줄 알아라!
“하아….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야.”
신성몰랑제국에서 벌금을 물고 빈털터리가 된 용사는 모험을 지속하기 힘들어졌다.
남의 무덤을 도굴하거나 유적을 훼손해서 자금을 다시 마련하려니 현기증이 난 용사.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마왕을 쓰러트리자.”
즐기던 RPG 게임이 재미없어져서 미루고 미뤄뒀던 최종보스를 잡으러 간다는 말투.
완전히 호구 취급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세등등했던 용사는 마왕의 성 입구를 지키는 군주에게 막혔다.
...이름이 뭐더라?
“용사와 영웅 여러분.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습니다. 저는 동족을 배신하고 마왕 파르마몬 님께 충성을 바친 배신의 군주 한죠. 언젠가 찾아올 여러분을 위해 이곳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배신의 군주 한죠는 새하얀 3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천천히 지상으로 하강했다.
복장은 천사답게 시원시원했다.
스킬 신성의 반사를 믿고 최소면적만 가린 그녀의 손에는 활이 쥐어져 있고, 등에는 기다란 창이 사선으로 매어져 있었다.
“용사님.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고 먼저 가십시오.”
“저 천사를 자빠트- 흠흠. 쓰러트린 후에 뒤따라가겠습니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적은 고작 혼자입니다.”
용사의 파티에서 일부가 이탈했다.
그리고 상대가 안 됐다.
“비, 비겁하다!”
“너무 빨라!”
“내려와서 싸우자!”
“창은 장식이냐!”
지상전을 할 것처럼 굴던 배신의 군주 한죠.
하지만 그녀는 모두의 예상과 기대를 배신하고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 후,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일방적인 사냥이 시작됐다.
“흠. 내 지시를 잘 따르고 있군.”
날개는 장식이 아니라고, 멍청한 닭대가리를 수백 번 후려치면서 교육한 보람이 있었다.
이걸 현대전으로 비유하면, 전투기와 전차의 싸움.
누가 이길지는 자명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이길 거라고 굳게 믿는 용사는 뒤도 안 돌아보고 매정하게 전진했다.
요정 부부가 앞을 가로막기 전까지.
“멈추세요, 여러분.”
“여기는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름은 알지만, 모두가 알고 싶어 하지 않기에 생략하겠다.
“비겁한 남편. 이럴 거면 이름이랑 설정을 왜 짠 거야?”
“남들이 자꾸 따지기에 좋을 줄 알았지.”
나도 심사숙고 끝에 군주A, 군주B, 군주C, 군주D로 지을 예정이었다.
이 얼마나 직관적이고 이해하기 쉬운가?
“헉! 당신은 바람처럼 사라진다는 전설의 군주 야스호…!”
용사보다 더 용사답게 생긴 요정 청년을 본 누군가 소리쳤다.
장인의 정성이 느껴지는 푸른색 갑옷과 녹색 망토.
그 둘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훌륭한 옷걸이.
그야말로 ‘전설의 용사’다운 풍모였다. 정말로 용사이기도 했고.
“흠.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야스호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난감함을 표시했다.
“수많은 여자를 울리게 생긴 요정이 아내에게 잡혀 산다고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렇군.”
한숨을 푹 내쉰 전설의 군주 야스호는 변명 대신 허리춤의 검을 천천히 뽑았다.
스르릉, 스르릉.
총 2자루.
오른손에는 장검, 왼손에는 단검.
성검 뉴클리온은 없었지만, 그의 검술은 진짜였다.
“용사님. 예전부터 저는 전설의 군주 야스호랑 검을 맞대고 싶었습니다. 누가 최강인지 겨루-”
댕강- 때구르르.
호기롭게 앞으로 나서던 용자1의 머리통이 분리됐다.
손 없는 설녀를 보살피면서 2000년 동안 살아온 유부남 알렉스도 사기지만, 세월로 찍어 누르는 원조 사기는 요정 왕족이다.
야스호는 유감스러운 3대 요정왕의 처남(妻男)이다.
나이를 헛먹었어도 강할 만큼 오래 살았는데,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그를 이기기란 불가능하다.
아! 딱 하나 빼고.
재능과 노력은 몰랑을 절대 앞지를 수 없으니까.
“바람처럼 끝내주지.”
심지어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뒤편에 또 한 명의 군주가 있었다.
“여보. 너무 느려.”
“미, 미안.”
아내에게 지적받은 전설의 군주 야스호는 더욱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때,
“이대로면 전멸이야! 그의 아내를 생포해서 인질로 삼자!”
정의로운 용사 파티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파격적인 전략이 튀어나왔다.
“그의 아내도 군주잖아!”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죽음의 군주 실바라스.”
“그녀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산 자가 없다고 들었어.”
“허풍이야! 남편 덕분에 군주가 된 여자라고.”
내 은밀한 지시를 받은 야스호가 용사를 바로 죽이지 않고 적당히 상대해줬다.
그 모습을 보고 ‘용사님께서 전설의 군주를 붙잡고 계신 지금이 절호의 기회야!’라고 착각한 자들이 우르르 돌격했다.
그리고,
서거거거걱-
예쁘게 분쇄됐다.
내가 권속들에게 능력치를 분배할 때, 그녀에게 좀 더 배분해주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그녀는 강했다.
“여보. 당신이 너무 약해서 나까지 무시당하잖아.”
“미안….”
“요정 사내 중에서 가장 멋진 요정왕 엘브하임이 가장 아끼던 여동생을 당신에게 양보했잖아. 그렇다면 내 남편으로서, 좀 더 노력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여동생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당신 혼자뿐….”
“뭐라고?”
“분발하겠습니다!”
용사와 나, 쏘시아를 제외한 모든 동료가 죽었다.
귀여운 척하면서 슬금슬금 도망칠 기미를 보이던 라누벨은, 배신의 군주 한죠가 저격해서 처리했다.
그리고 용사는?
“잠깐. 5초만…. 됐다. 이제 처리해도 돼. 어머니에게 메시지 전송 끝났어.”
“분부대로.”
내가 신출내기 용사들을 따라다니는 두 번째 이유.
스마트폰 성능이 최신형이라서 매우 좋았다.
내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WiFi도 더 잘 터지는 것 같다.
그때였다.
[계정 접속이 확인됐습니다.]
[홍채 인식을 시작합니다.]
[카메라 렌즈를 봐주십시오.]
[대조 중….]
[환영합니다. 강한수 부회장님.]
“잠깐. 죽이지 말아봐.”
후배에게 빌린 최신형 스마트폰에 수상한 메시지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