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18회차] Who are you?
스마트폰에 뜬 수상한 메시지.
이건 누군가 내게 실시간으로 쪽지를 보낸 게 아니라, 스마트폰에 원래부터 깔려 있던 프로그램 기능으로 짐작됐다.
그 증거는 호칭.
“강한수 부회장이라….”
이 메시지가 정상적인 쪽지였다면 나를 ‘부회장’이라고 부를 리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을 통틀어 부회장이 돼본 적이 없다.
“비겁한 남편. 폭군이랑 황제는 제법 해봤잖아?”
“은근슬쩍 이상한 직업을 끼워 넣지 마라.”
그리고 상당히 거슬렸다.
회장이 아닌 부회장.
내 위에서 명령을 내리는 ‘회장’이 존재한다는 뜻이잖은가?
...두 번째.
비겁한 마누라의 저주를 받아서 일인자가 못 된 걸까?
“야. 피해망상은 적당히 해주지 않을래?”
“하지만 상황이 그렇잖아?”
나는 스마트폰 쪽으로 다시 시선으로 돌렸다.
[로딩 중….]
[잠긴 기능이 해제됩니다.]
[보조시스템 활성화.]
[보조배터리 활성화.]
[보조안테나 활성화.]
.....
조그마한 스마트폰에 주인도 모르리라 짐작되는 수상한 기능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대표적인 변화는 WiFi 신호.
간신히 1칸을 유지하고 있던 세기가 3칸까지 늘어났다.
그리고는,
[안녕하세요, 강한수 씨.]
기계가 아닌 인간미가 느껴지는 메시지가 화면에 출력됐다.
“넌 뭐냐?”
나는 무심코 되물었다.
문자에는 문자로 답변해주는 게 맞지만, 일반적인 메신저처럼 작성하는 공간이 없어서 그냥 해본 말.
그런데 됐다.
[빅토리아입니다.]
[궁금하신 점이 있으시면 하나하나 물어보세요.]
[보조배터리는 약 3시간 동안 유지되기에 시간은 넉넉합니다.]
이걸 음성인식프로그램이라고 하던가?
내가 지구의 모범적인 문화시민일 때도 존재하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하진 않았었는데.
상대는 질문하라고 했다.
그래서 질문하기로 했다.
“너는 누구야?”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기 이름만 대면 어떻게 알아?
*
[강한수 씨는 한결같으시네요.]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이없다고 해야 할지….]
어이없었다.
처음부터 ‘팩토리아’라고 자기소개했다면 단번에 알아들었을 텐데.
빅토리아 같은 생소한 이름을 내가 어떻게 아는가?
“최신형 스마트폰에는 전부 이런 장치가 숨어있어?”
[최신형 중에서도 정말 최신형만 들어있어요.]
[강한수 씨가 지구의 WiFi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니까요.]
[WiFi는 어떻게 된 건가요?]
대답해줄 필요성을 못 느꼈다.
눈물 없이는 들어줄 수 없는 그 구구절절한 사연을 설명하려면 3시간으로도 부족할 테니까.
“부회장이 뭐야?”
[정말 여전하시네요.]
[설명을 기대한 제 잘못이죠.]
[지구는 지금도 외계인의 침공을 받고 있어요.]
[덕분에 군수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높아졌어요.]
[제가 운영하는 팩토리아 중공업은 지구의 경제를 절반 넘게 장악한 초법적인 기업이에요.]
[강한수 씨가 주신 용사 안드로이드를 분석한 덕분이에요.]
신출내기 용사들이 하는 말을 주워들어서 대충 알고 있었지만, 흑화 선배는 여전히 지구를 두드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 깡통이?”
나는 현자와 잡것A에게 가슴 벅찬 슈퍼로봇을 주문했는데, 이 노총각들이 미소녀 안드로이드를 제작해서 내 경추를 땅기게 했었다.
전투에 도움 안 돼서 팩토리아에게 넘겨준 기억이 난다.
그런데 팩토리아는 큰 도움이 됐다고 주절주절 떠들고 있었다.
[그 깡통은 과학과 마법이 정교하게 합쳐진 종합기술의 총화예요.]
[덕분에 기술적인 우위를 점한 저는 회사를 키웠어요.]
[창업자이자 대주주인 제가 회장입니다.]
[유일한 투자자이자 배우자인 강한수 씨가 부회장이고요.]
어떻게 된 건지는 잘 알겠다.
과학뿐이었던 지구에 야만적인 판타지 마법을 도입해서 비겁하게 회사를 성장시켰다.
비열한 기술독점!
이렇게나 사악한 여자를 어떤 남자가 데려갈지 참으로 걱정….
“잠깐. 배우자?”
내가 아는 그 배우자가 맞나? 아니면 번역이 잘못된 건가?
[강한수 씨가 생각하시는 그 배우자가 맞아요.]
[법적인 명분이 필요해서 한 혼인신고니 신경 쓰지 마세요.]
[허락은 양가의 어른들께 받아놨습니다.]
“너였구나!”
어머니가 둘째 놈보다 칭찬하는 ‘며늘아기’가 팩토리아였다.
이년! 무슨 뇌물로 선량한 어머니의 마음을 현혹한 거냐!
[어머님은 우연히 만났어요.]
이 비열한 년! 세상의 모든 우연에게 사과해라!
[테니스라켓을 선물해드렸더니 무척 좋아하시더라고요.]
오! 맙소사….
[우리는 주말마다 테니스를 함께 치고 대회도 나갔어요.]
[결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결혼했냐고 저에게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실종된 아드님이라도 괜찮다고 답해드렸죠.]
[어머님이 무척 기뻐하셨어요.]
[그 아드님이 강한수 씨란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어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아버지는?”
테니스를 좋아하시는 순진한 어머니는 속일 수 있었겠지만, 냉철한 판단력을 지니신 아버지는 호락호락하지 않으시다.
아버지는 어떻게 됐을까?
팩토리아가 납치해서 사고사 처리했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훌륭한 분이셨어요.]
[아버님은 어머님의 결정을 전적으로 따른다고 하셨어요.]
[보충제를 선물해드렸더니 아이처럼 좋아하셨죠.]
[정말로 아이가 생길 줄은 몰랐지만요.]
둘째도 네 짓이렷다!
“팩토리아. 미안하지만, 너의 그 비열한 야망은 처음부터 실패였어. 나는 이미 유부남이거든.”
원했던 결혼은 아니지만, 나만큼 쏘시아의 궁둥뼈를 잘 아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이모가 또 추하다고 놀릴 것 같지만, 살을 맞대보지도 않고 결혼 운운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
“조카야!”
“말씀하지 마세요.”
“추하다!”
“이미 안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도 굳이 또 강조하듯 말씀하시는 이유가 뭐예요?”
“정말 추하다!”
“아, 진짜-!”
쏘시아 쪽은 진짜다.
결혼계약서는 쓰지 않았지만, 우주급 공증인이 둘이나 된다.
내 허락 없이 진행된 종이쪼가리보다 훨씬 공신력 있다.
[오해하진 마세요.]
[전부 우연히 진행된 일이에요.]
[중요한 질문이 있어요.]
“해봐.”
대답해주진 않을 생각이지만.
[강한수 씨의 부모님을 납치하려는 무리가 있어요.]
[짚이는 부분이 있으세요?]
“...잠깐만.”
분노가 내 머릿속에서 광폭하게 휘몰아쳤다.
부모님을 노린다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던 탓이다.
“마약마왕. 진정해. 아이들아! 얼른 도와줘!”
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에 사는 정령왕들이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성희롱했다.
특히, 마음의 정령왕.
녀석이 내 성검을 끌어안고 몇 번 할짝거리자마자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으음….”
온몸이 노곤하군.
[진정이 되셨나요?]
[강한수 씨의 부모님을 졸업생들이 노리고 있어요.]
[그들을 생포해서 배후를 캐봤으나 아는 게 없었어요.]
[짐작 가는 배후가 있나요?]
...너무 많다.
정정당당한 용사 페스티벌 당시, 내게 패배한 졸업생 중 누군가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으니까.
교직원 일당들도 후보로 빼놓을 수 없으며, 졸업생들이랑 적으로 대치 중인 흑화 선배도 완전히 아니라고 단정할 순 없다.
“팩토리아. 자작극은 아니겠지?”
내 부모님을 지켜주고 환심을 사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타당한 의심이네요.]
[하지만 지금은 무의미한 탁상공론일 것 같네요.]
[제가 아니라고 말해도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안 그런가요?]
옳은 지적이다.
팩토리아가 아무리 설명해도 내 의심을 완벽하게 지울 순 없으니까.
“질문 있으면 해봐.”
원래는 대답해줄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저 비열한 여자가 순진한 어머니를 등에 업는 바람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강한수 씨의 현재 상황이나 진척도를 알려주세요.]
[중등교육장에 특례입학한 건 알고 있습니다.]
[언제쯤 귀환하시나요?]
팩토리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핵심을 찌르고 들어왔다.
언제쯤 귀환하냐고?
“판타지아 차원이 멸망할 때쯤.”
마왕 파르마몬이 지구로 갈 유일한 방법이다.
*
[상황이 굉장히 암울하네요.]
대략적인 설명과 함께, 내가 마왕이 됐다는 사실을 들은 팩토리아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업무를 줄이고 피부 관리에 좀 더 투자해야겠군요.]
뜬금없이 피부 타령하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상황이 암울하다는 점은 동의한다.
“내 귀환보다 남동생을 키워서 결혼하는 쪽이 더 빠를걸?”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모험을 포기하고 판타지 세계에 정착한 용사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추세지만, 그들이 결혼해서 자녀가 생기려면 또 한세월이다.
그리고 한둘로는 안 된다.
절대다수의 용사가 마왕을 지지해야만 효력이 있다.
쉽게 말해,
모험을 그만두고, 육체적 쾌락만 추구하는 짐승이 있으면 실패한다.
[강한수 씨의 계획은 잘 알겠어요.]
[이제야 이해되네요.]
[졸업생 공급이 끊기면서 외계인들에게 밀리기 시작했거든요.]
[대책이 필요해요.]
“허! 밀린다고?”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다.
이 계획은 지구의 상황까지 고려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야만적인 세계에 갇혔는데, 남 걱정하게 생겼는가?
하지만 이젠 아니다.
흑화 선배가 지구를 정복하면 부모님의 안전이 불안해지니까.
“비겁한 남편. 비켜봐. 내가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네가?”
쏘시아의 참견해왔다.
설마, 팩토리아를 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조카야!”
“그만 좀 하세요! 조카가 추해서 기분 좋으세요?!”
“귀여워~”
“하아…. 순수하게 실무진들끼리 이야기해보려는 거예요. 옆에서 대충 들어보니, 며늘아기 행세하는 저 가증스러운 여자가 지구의 실권자인 것 같으니까요.”
전혀 순수하지 못한 쏘시아가 내게서 스마트폰을 빼앗듯 가져갔다.
“뭐…. 괜찮겠지.”
나쁜 조합은 아니었다.
쏘시아는 판타지아 차원의 개발자고, 팩토리아는 지구의 첨단산업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둘이 나누는 대화를 슬쩍 엿들어보니….
“지구와 판타지아 차원을 연결한 이 WiFi는, 삼차원을 몰랑비우스 구조로 비틀어서 연결한 방식인데, 학계에서 101번째로 존경받은 배운 몰랑이가 주창한 몰랑타고스 공식의 연산에 따라 규칙적으로 나열…. 응? 빅토리아 양. 쉽게 설명해줘도 이해가 안 돼? 몰랑타고스는 삼차원 공간을 시간으로 나눠서 부피를 계산하는 공식이야. (중략) 몰랑타고스 공식은 우주과학의 기본 틀이라고. 참나! 헛똑똑이란 당신을 두고 하는 말…. 응? 어머님의 생년월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 며느리라면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당신의 주장은 논리적인 근거가 빈약해!”
몰라아앙….
쏘시아의 비겁한 가슴골 사이에 항상 머무시던 마스터 몰랑.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에게도 관대하셨던 위대한 존재가 대피하듯 내게 다가오셨다.
“마스터 몰랑도 견디기 힘들 정도입니까?”
몰랑몰랑.
마스터 몰랑께서 내 어깨 위에 안착하시며 긍정하셨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마트폰에서 얼굴을 뗀 쏘시아가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서는 그 도톰한 입술을 뗐다.
“비겁한 남편.”
나를 부르는 말투와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팩토리아랑 상의한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네.”
WiFi를 역추적해서 교장실의 위치라도 찾아낸 거려나?
“충전기 내놔.”
“...뭐?”
“충전기 얼른 줘! 하필이면 그 호박의 논리를 비웃으며 반격할 타이밍에 배터리가 떨어졌단 말이야! 아우! 분해!”
“...실무는?”
맡기면 안 될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남편님은 저쪽에서 후배랑 놀고 있어.”
“......”
동네 사람들! 이 마왕의 얘기 좀 들어보세요!
말싸움에서 지고 씩씩거리는 이 유부녀가 여러분의 창조신이랍니다!
몰라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