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18회차] 업적
판타지아와 지구를 각각 대표하는 쏘시아와 팩토리아의 정상회담(?)은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면 쉬는 시간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했지만, 그 세세한 내용은 알고 싶지 않다는 것 또한 내 마음이었다.
“비겁한 남편. 잘 들어.”
“그래.”
말싸움으로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에게 졌다는 얘기만 아니라면.
“아니야! 내가 이겼어!”
“어, 그래.”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를 이겨서 참 기분 좋겠구나.
“닥쳐! 울어버리기 전에!”
“......”
“나랑 그 호박은 WiFi가 끊길 가능성에 대해 토의했어. 아무리 훌륭한 연결망을 구축해도 WiFi가 끊어지면 수포가 되니까.”
쏘시아는 내게 장황한 우주과학을 기초랍시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야. 본론만 하자.”
“이것도 본론의 일부야.”
“몰라도 돼. 네가 알고 내가 모르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쏘시아는 내게서 운명적으로 도망칠 수 없는 ‘두 번째 아내’다.
휴대용 백과사전이랄까?
굳이 내가 암기하거나 미리 숙지해둘 필요는 전혀 없다.
“...흥! 나를 항상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핫팩처럼 휴대용 취급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이번에는 특별히 넘어갈-”
“조카야~ 조카야~”
“왜요? 이번에도 추하다고 놀리시게요?”
“귀여워~”
얼굴이 새빨개진 쏘시아가 본론으로 넘어간 건 한참 후였다.
“시작은 교직원 측에서 했지만, 그들 임의로 WiFi를 끊지 못해. 굉장히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차원에 구멍을 낼 순 있어도 막을 기술은 없기 때문이야. 이해했어?”
“그러면 걱정할 필요 없겠네.”
그 구멍을 넓혀서 사람이 건너갈 크기가 되면 좋지 않을까?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할 것 같아서 너에게 우주과학의 기초를 조금이라도 설명하려던 거야.”
“됐어.”
공부는 지구에서 실컷 했다.
필요한 정보가 생기면 그때그때 쏘시아의 엉덩이에 물어볼 것이다.
“은근슬쩍 성희롱하는데, 내 엉덩이는 검색 버튼이 아니야.”
“표현은 자유라구?”
“어머님도 걱정하셨지만, 너는 지구로 돌아가도 일상생활이 힘들 것- 꺄앗?!”
“검색!”
WiFi가 끊길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설명한 쏘시아는 무의미한 콧소리와 비명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너 때문이잖아!”
“그래서 다음 계획은?”
팩토리아랑 하루 동안 얘기했는데, 고작 저거 하나 알아냈다면 매우 실망스러울 것이다.
“당연히 아니야. 우리는 고모에게서 판타지아 교육장의 실권을 가져올 방법을 이야기했어.”
“본론만.”
“과정도 본론이야.”
“과정이라...?”
침대 위에 알몸으로 누워서 과정 운운해봤자 전혀 설득력 없다구?
“우리는 판타지아 정보를 파는 잡지사를 운영하기로 했어.”
“...뭐?”
“잡, 지, 사. 공략법이 적혀있는 게임잡지 같은 거. 처음에는 용사들에게 유용한 정보들로만 구성하다가, 조금씩 너에 대한 좋은 얘기를 풀어서 반감을 줄일 거야.”
비겁한 쏘시아와 비열한 팩토리아가 공동으로 세운 계획다웠다.
“용사들을 위한 공략집이라...”
나를 쓰러트릴 방법을 기록해서 뿌린다는 황당무계한 계획도 어이없지만, 공명정대한 MAX급 마왕님을 쓰러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나를 이기려고 한다면 질 수가 없다.
져줄 마음도 없고.
즉, 쏘시아가 말한 그 잡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구에서 막 넘어온 신출내기 용사들은 그 사실을 모르잖아?”
“사기네.”
깰 수 없는 공략집을 팔다니!
“...나도 마음 같아서는 비겁한 남편이 용사에게 쩔쩔매는 광경을 보면서 팝콘을 먹고 싶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는 용사는 고등교육장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야.”
“있기는 한 모양이네.”
“있지. 그들은 고모가 숨겨둔 최강의 창이자 방패야.”
확실히 고등교육장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었다.
중등교육장까지는 악마를 ‘묻지 말고 적!’으로 규정한 까닭에 치고받고 싸웠다.
그래서 수많은 용사가 죽고, 쏘시아가 깔아놓은 비겁한 스킬 업보로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고등교육장은 어떤가?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은 5차 교육과정에 빠르게 적응하고, 죽거나 좌절하는 일 없이 천천히 모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너무 느린 게 문제지만.
▶빼꼼: 교직원 채용조건에 고등교육과정 졸업장이 있어서 저도 어찌어찌 졸업했는데요.
오! 교생 아가씨. 예쁘고 똑똑한 고학력자였구나!
▶부끄: 대단한 건 아니에요. 간신히 졸업장만 딴 수준인걸요.
그러면 교생 아가씨는 알겠네.
고등학생들의 모험 속도가 왜 저렇게 느린 거야?
대부분이 만두 왕국에서 악을 무찌르며 생활하고 있었다.
▶설명: 취업준비를 위해 생활기록부를 깔끔히 세탁하는 작업이에요. 과거에는 어떠했든 간에 학교에서 착실하게 공부한 현재는 이처럼 훌륭한 용사가 됐다고 자기소개를 만드는 거랍니다.
의도는 잘 알겠다. 하지만 저건 너무 느리지 않은가?
▶답변: 회사에서 원하는 신입사원의 기준은 높지 않은데, 취업준비생들끼리 취업경쟁이 붙으면서 생활기록부를 완벽하게 꾸미게 됐어요.
완벽!
실수는 없다!
확실히, 고등학생들은 초등학생, 중학생이랑 달랐다.
일반적인 용사들은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관적으로 판단되면 뒤를 안 돌아보고 떠난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은 결벽증 수준으로 뒷수습까지 완벽하게 처리한 후에 2차, 3차로 불시에 재방문해서 확인했다.
▶조언: 고등학생이 강한수 생도님께 도전장을 내미는 날은 아무리 짧아도 500년 뒤라고 보시면 돼요. 저는 졸업장만 필요해서 50년쯤 걸렸지만요.
“500년...”
고등교육장의 용사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서...
“비겁한 남편. 듣고 있어?”
“어.”
대충 듣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교생 아가씨가 첫 번째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하는데.”
“여자는 마음씨가 중요해.”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은 기본옵션이다.
“하아... 이런 놈이랑 영원히 함께해야 한다니...”
“설명이나 해.”
정의로운 MAX급 남편님의 손가락에 혼쭐나기 싫다면.
“더욱 설명하기 싫어졌-”
“조카야.”
“지구는 용사의 공급이 끊기면서 조금씩 밀리고 있어. 개발도상국이 몰려있었던 아프리카는 이미 빼앗긴 상태야.”
빠르게 설명하는 쏘시아.
그런 조카를 본 최초의 정령이 어깨와 엉덩이를 위아래로 들썩이며 웃기 시작했다.
“우히히히!”
“...이모님. 그 웃음소리 좀 어떻게 해보세요. 당신은 유일무이한 최초의 정령이라고요.”
“하지만 조카야! 마약마왕 때문에 내 이미지는 진즉 들통났다. 그래서 원래는 고귀했지만, 마약마왕의 손가락에 타락한 정령이란 설정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럴싸하지?”
“타락한 이유가 너무 하찮아요...”
내 손가락이 어때서?
용사들의 성검보다 강력하다고 자부한다.
“조카도 자지러진 주제에.”
“예?”
“마약마왕의 손가락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는 조카를 자주 봤다.”
“아니거든요?! 진실을 왜곡하지 마세요!”
음란한 쏘시아 때문에 이야기가 잠시 중단됐지만, 그녀가 팩토리아랑 짠 계획은 대충 알고 있다.
기술교류.
쏘시아가 판타지아 세계의 마법과 기술을 지구로 전송하면, 팩토리아가 재현해내는 방식이다.
전송수단은 WiFi 신호가 강화된 최신형 스마트폰.
궁극적인 목표는, 졸업생의 공급이 끊어졌으므로 남아있는 자들의 무장을 강화하는 것이다.
군대의 질적 향상!
질투심에 눈이 먼 쏘시아치고는 대단한걸?
“...심심하네.”
온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 심심할 날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뿐이었다.
판타지아 세계에서 어느덧 100년 넘게 살아온 용사 강한수.
하루도 멈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부지런히 살아온 그에게 지금의 여유는 고역이었다.
이걸 직업병이라고 하던가!
“비겁한 남편. 자화자찬과 과대포장은 적당히 해.”
“사실이잖아.”
그나마 전에는 용사들이 쳐들어 와준 덕분에 괜찮았지만, 4대 군주를 입구에 세워놓고부터 방문객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다.
심지어 어머니는 온종일 남동생 자랑만 하신다.
앞으로는 무슨 낙으로...
▶깜짝: 강한수 생도님!
어휴! 깜짝이야. 교생 아가씨 때문에 뼈가 흔들리잖아.
▶당황: 뼈가요? 아무튼, 얼른 준비하셔야 할 것 같아요. 곧 그쪽으로 대선배님이 가실 거예요.
...그 얘기라면 너무 늦었어. 비밀 친구.
그녀가 말한 ‘대선배님’께서 이미 내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용사처럼 당당하게.
“이걸로 두 번째 만남이군요, 강한수 학생. 저를 기억하시지요?”
“아니.”
두 번째 만남이면 너무 적은 거 아닌가?
심지어 상대는 남자.
내가 기억해주길 기대하면 매우 곤란하다.
“진학상담사 페이커-리입니다.”
“아하! 나와 검희의 아들을 빌미로 협박해서 중등교육과정에 나를 처박았던 그놈.”
“예. 그놈입니다. 정확히 기억해주셔 감사합니다.”
진학상담사.
내 졸업을 막고 중등교육과정에 특례입학시킨 자였다.
“무슨 용무지?”
교생 아가씨가 말하길, 교직원들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교칙까지 세웠다고 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질문하면 교생 아가씨가 난감해질 터.
그래서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저는 진학상담사이지만, 중고등학교 선도위원장이란 직책도 맡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용사의 길을 벗어난 중학생들의 선도하지요.”
“그래서?”
나는 이제 학생이 아니다. 학생들이 토벌해야 할 교보재다.
“용사의 길을 벗어난 학생이 너무 늘어났습니다. 그 원인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마왕에게 있습니다.”
“편법은 없었어.”
비열한 사랑과 우정의 힘을 앞세운 용사들보다도 순수하게 내가 더 강할 뿐이다.
“압니다. 당신은 판타지아 교육장의 역대 기록들을 수없이 갈아엎은 용사니까요.”
▷관리자 권한으로 기록을 열람합니다.
▷이름: 강한수
▷업적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마왕 토벌★★
▷2: 초등교육과정 최초, 망룡왕 토벌★
▷3: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성검 없이 마왕 토벌★
▷4: 초등교육과정 최단기간, 동료 없이 마왕 토벌★
...
▷46: 전체교육과정 최초, 두 번째 악마 패퇴★
▷47: 전체교육과정 최단시간, 두 번째 악마 패퇴
▷48: 전체교육과정 최고기록, 매우 빠른 성장
▷49: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귀여운 용사 선정★★★
......
▷134: 중등교육과정 최연소 입학★
▷135: 중등교육과정 최단기간 입학★
▷136: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존경하는 용사 선정★★★★
▷137: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영향력 있는 용사 선정★★★
▷138: 판타지아 암컷 투표, 가장 사랑하는 수컷 선정★★
▷140: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안전한 용사 선정★★
▷141: 판타지아 수컷 투표, 가장 존경하는 수컷 선정★
......
▷184: 최단시간에 가장 많은 용을 학살한 자★★★
▷185: 최단시간에 가장 많은 천사를 학살한 자★★★★
▷186: 최단시간에 가장 많은 악마를 학살한 자★
▷187: 최단시간에 가장 많은 미남을 살해한 자★★
▷188: 최단시간에 가장 많은 미녀를 살해한 자★★
......
▷234: 역사를 바꾼 자★★★★★
▷235: 문화를 바꾼 자★★★★
▷236: 경제를 바꾼 자★★★★★
▷237: 지리를 바꾼 자★★★★
▷237: 사회를 바꾼 자★★★★
지난 번에 봤을 때보다 업적이 이것저것 많이 늘어났다.
그런데 이게 어쨌다는 걸까?
“강한수 학생이 업적들을 싹 쓸어가는 바람에 취업준비생들의 불만이 엄청납니다. 사회의 많은 직장에서 업적에 가산점을 주니까요.”
“...하아?”
“학생들의 청원이 쌓이면 학생회는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거나 문제를 해결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업적들이 취업을 방해하니 싹 갈아엎겠다고?
“아니요. 자세한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이건 당신을 만나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교칙 때문에 원래는 못 만난다.
그렇다면 이런 편법까지 동원해서 나를 만나려는 이유가 뭘까?
“...재미있군.”
나는 쏘시아의 비겁한 골반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르게 했다.
자! 대화를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