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288화 (288/430)

 288화

[18회차] 페도나르의 손바닥

“용사들을 육성하는 판타지아 차원의 역사는 강한수 학생의 생각 이상으로 매우 깁니다.”

“그게 중요한가?”

나는 이미 2000년 전을 경험해본 몸이다.

최초의 용사.

그가 어떻게 용사가 되었으며, 그가 어떻게 5대 재앙을 탄생시켰는지 전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느낀 점.

이보다 더 유감스러운 과거의 역사와 진실을 알더라도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합니다. 인간은 과거의 실수를 반성하며 발전해왔으니까요.”

“이런 얘기를 하려고 나를 만나자고 한 건가?”

“하하!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자고로 성공적인 대화란, 원하는 분위기를 유도한 후에 해야 잘 풀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장난은 사절이야.”

진학상담사의 능글맞은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내게 싸워보고 싶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는 드무니까.

흑화 선배의 집에서 영웅들의 경험을 싹 흡수한 현재는 알 수 있었다.

진학상담사는 판타지 능력치보다 본연의 실력에 자신 있는 타고난 싸움꾼이란 것을.

“판타지아 교육장은 그 깊은 역사만큼 뿌리도 단단합니다. 수많은 풍파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위태로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한 번이 아니지. 전에도 위기가 있었잖아?”

최초의 용사가 가출해서 적으로 돌아섰다.

“그는 수많은 불량학생 중 하나일 뿐입니다.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렸을 만큼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불량학생은 불량학생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데?”

“명분이 없습니다.”

“없으면 만들면 되지.”

“하하! 당신다운 답변이군요. 하지만 그건 모범학생인 당신이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수많은 졸업생과 취업지망생들이 당신의 업적을 질투하지만, 또 선망합니다. 우리는 그 현상을 두루뭉술하게 카리스마라고 부릅니다.”

나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래서 본론은?”

“우리는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린 학생에게 훌륭한 직장과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출했고 자신만의 세력을 꾸려서 모교를 적대하고 있습니다.”

“사족은 됐어.”

“일전에 강한수 학생이 막아준 전쟁. 실제로 전쟁이 벌어졌더라도 판타지아 차원은 절대 패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교를 사랑하는 수많은 졸업생, 기업이랑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니까요. 다만, 학교의 평판과 가치가 떨어지는 것까진 막을 수 없기에 전쟁을 피한 겁니다.”

진학상담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역사와 전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된다.

수험생들이 일류대학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에서 성공한 자들이 그 대학을 거쳤기 때문이다.

학연, 지연, 혈연.

교수진의 수준과 교육환경 등도 더 좋겠지만, 선배가 후배를 밀어주는 힘도 무시할 수 없다.

“취업한 졸업생들이라...”

“엄밀히 말하면 고등교육과정을 이수한 졸업생입니다. 저학력에 해당하는 초등교육과정과 중등교육과정 경력은 어느 회사에서도 인정해주지 않으니까요.”

“깜빡했군.”

진학상담사의 말처럼 판타지아 차원의 역사는 매우 길다.

그동안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했을 것이며, 그들은 우주 어딘가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으리라.

그 힘은 어느 정도일까?

웬만한 사랑과 우정의 힘은 명함도 못 내밀 만큼 거대하리라.

“최초의 용사는 고등교육을 이수한 학생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교에서 가장 성공한 학생을 대기업 회장에 비유한다면, 그는 중소기업 사장쯤 됩니다.”

“허...?”

은하계를 지배하는 흑화 선배가 고작 중소기업 사장이라고?

과장이나 허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란 뚜렷한 증거가 없기도 마찬가지.

“믿어지지 않으시겠죠. 그래서 역사를 운운한 겁니다. 판타지아 차원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안다면,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남편. 속지 마.”

“아! 쏘시아 고문님. 곧바로 인사드리지 못한 점,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주십시오. 옷을 안 걸치고 계셔서 쳐다보기 민망했습니다.”

“인사와 변명을 하기 전에 사과부터 해야지. 부부의 사적인 공간에 멋대로 침입했잖아.”

“아차! 죄송합니다, 고문님. 육체적인 수치심은 단명하는 필멸자(必滅者)만 신경 쓴다는 편견에서 못 벗어난 후배의 불찰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을 살아온 두 번째 악마라도 결혼생활은 생소한 경험일 테니...”

“나이 운운하지 마.”

“또 실례. 이래저래 배려심이 부족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흥!”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쏘시아가 진학상담사를 향해 코웃음 치더니, 내 옆에 붙어 앉았다.

“사이가 좋으시군요.”

“입만 열면 거짓말이네.”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쏘시아 고문관님. 당신은 판타지아 차원의 역사가 교육시스템을 구축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아시겠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판타지아 교육장은 존재했습니다.”

“그래. 아주 거지꼴로.”

“거지꼴이었어도 용사를 가르치는 학교였다는 점은 바뀌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때를 1차 교육과정이라고 부릅니다.”

사족이 매우 길다.

판타지아 역사가 매우 길고, 그래서 뛰어난 졸업생이 우주에 많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래서?”

“무력으로는 절대 굴복시킬 수 없는 이 학교에 첫 위기가 찾아왔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교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3차, 4차 교육과정이 연달아 실패하면서 본교는 신뢰도가 떨어졌고, 여기에 불만을 품은 졸업생과 취업준비생... 교사들이 당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기인이란 모양이다.

쏘시아, 들었지? 너의 남편님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를.

결혼해준 걸 감사히 여기라구?

“...나는 인성평가가 뒤집힌 평행우주에 불시착한 걸까...?”

비겁한 마누라가 현실을 외면하려고 발버둥 쳤다.

“조카야! 추하다!”

최초의 정령이 옳은 소리를 하는군.

“이모님. 장난을 좋아하시는 건 알지만,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제 남편이 얼마나 배려심 없는 난봉꾼인지...”

“추하다!”

“......”

쓴웃음을 지은 진학상담사가 다시 한번 업적을 띄우며 말했다.

“쏘시아 고문관님은 강한수 학생의 과분한 사랑에 무감각해지신 모양이지만, 시스템 업적은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49: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귀여운 용사 선정★★★

▷136: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존경하는 용사 선정★★★★

▷138: 판타지아 암컷 투표, 가장 사랑하는 수컷 선정★★

▷140: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안전한 용사 선정★★

▷157: 판타지아 인어 투표, 가장 짝짓기하고 싶은 수컷 선정

▷162: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위대한 지도자 선정

▷166: 판타지아 원주민 투표, 가장 듬직한 남편 선정

▷172: 판타지아 시스템, 가장 치명적인 입맞춤 보유자

▷173: 판타지아 시스템, 가장 치명적인 손가락 보유자

시스템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비겁한 쏘시아는 여전히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이지만, 그런다고 내 업적이 사라지진 않았다.

“남들은 1개 가지기도 힘든 업적이 239개나 됩니다. 교장과 교감을 포함한 일부 교사들이 고문관님처럼 수긍하지 않지만, 강한수 학생의 업적 총점은 중등교육과정 중퇴임에도 전교 1위. 취업준비생인 2위랑 8배가량 차이납니다.”

“정의는 승리하는군!”

나는 1회차 때, 간악한 교장의 편파판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심과 주관이 빠진 객관적인 지표는 내 노고와 경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부터가 진짜 본론입니다, 강한수 학생. 업적은 유동적입니다. 최초의 선구자에게만 주어지는 업적은 영구적이지만, 대부분은 후발주자가 신기록을 세우면 빼앗깁니다.”

“상관없어.”

나는 쏘시아의 패배감 짙은 표정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비겁한 마누라! 앞으로는 이 MAX급 남편님에게 잘하라구?

“업적 1개만 얻어도 기뻐하는 취업준비생과 졸업생들이 알면 졸도하겠군요. 업적은 배우자를 기죽이는 용도가 아닙니다...”

“딱히 쓸모도 없잖아?”

장인어른이 가업을 떠넘기는 바람에 마왕으로 취업한 상태다.

은퇴한 후에는 카페를 운영할 예정이고.

내게 업적은 무의미하다.

“그렇지 않습니다. 공신력 있는 판타지아 업적은 제삼자가 당신을 평가하는 지표가 됩니다. 갑작스럽게 마왕이 되지만 않으셨다면, 교사의 필수조건인 고등교육과정을 이수하시는 즉시, 절대다수의 지지로 교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교감이 되면 외출은 자유?”

“외출뿐이겠습니까? 강한수 학생의 성공을 방해해온 교사들에게 징계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잘 따르는 교생을 곧장 정식교사로 채용하고 비서처럼 옆에 두는 것도 가능합니다.”

“오오...!”

유감스러운 장인어른을 향한 분노가 또 하늘을 찌르는구나!

비겁한 따님을 떠넘기는 것으로 모자라서 사위의 출셋길마저 막다니!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당신을 교감으로 추대하려던 이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중퇴로.”

“그러게.”

참 공교롭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치밀한 함정에 빠진 겁니다. 판타지아를 탈출하고 싶었던 마왕 페도나르와 당신의 등판을 원치 않았던 교사들의 목적이 일치해서 벌어진 합작이지요.”

“아!”

어떻게 된 일인지 앞뒤가 딱딱 들어맞기 시작했다.

“고모는?”

“교장은 아닙니다. 강한수 학생을 탐탁지 않게 여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왕 페도나르의 탈출을 용인할 만큼 어리석진 않으십니다.”

“그렇구나...”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린 쏘시아가 갑자기 내 팔을 끌어안았다.

너, 뭐하냐?

“꼭 말해야 알아? 싫으면 말해. 떨어져 있을 테니까...”

“안 어울리게 약한 척하네.”

“......”

“요리를- 잘하시는 어머니 대신 앞치마를 자주 두르셨던 아버지는 내게 웃으며 말씀하셨지. 일단 선택했으면 끝까지 책임지라고.”

나는 진학상담사를 돌아봤다.

계획이 실패했다고 한탄이나 하려고 힘들게 찾아오진 않았을 터.

내 예상대로였다.

“강한수 학생이 마왕으로 취임하면서 상황이 묘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실패한 줄 알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반대였죠. 판타지아 시스템 개발자인 쏘시아 고문관이 당신의 옆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학상담사가 입꼬리를 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도 미소로 회답했다.

“우리의 계획을 아는 모양이네.”

실권을 장악해서 판타지아 교육장을 집어삼키려는 계획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모든 상황이 무서우리만치 딱딱 들어맞으니까요. 마치, 운명의 톱니바퀴처럼. 우리는 이걸 ‘페도나르의 손바닥’이라고 부릅니다.”

마왕 페도나르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의미.

그래서 살짝 불쾌해졌다.

“내 인생을 장인어른이 멋대로 손댔다는 거네.”

수컷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다는 거잖아?

“그렇진 않습니다. 강한수 학생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의 1회차 모험 난이도는 고등교육과정보다 어려웠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쏘시아 고문관이 설치한 스킬 업보는 애교스러운 수준이지요.”

“...그게 무슨 뜻이지?”

“교실은 유지비용이 듭니다. 그래서 용사답지 않다고 판단되는 학생은 빠르게 탈락시킵니다.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서. 하지만 당신은 탈락하긴커녕 마왕을 처치했습니다. 신이 정한 운명을 거부한 셈이죠. 마왕이 그런 당신에게 호감을 품은 것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나는 옆에 앉아있는 쏘시아의 비겁한 가슴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심란했던 마음이 안정됐다.

“보통은 반대 아니야?”

쏘시아의 불만을 무시한 나는 진학상담사를 노려봤다.

“이것이 네가 원했던 대화의 분위기인가?”

“맞습니다.”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부드럽게 만져주고 싶은 남자가 시원하게 긍정했다.

“그렇다면 이 지루한 설명들을 나열한 이유도 있겠지?”

“교장이 직접 움직였습니다.”

“오...”

드디어 나랑 한 판 붙어볼 마음이 든 건가?

“아! 잘못 이해하신 듯하군요. 교장의 손자가 강한수 학생의 업적을 빼앗기 위해 초등교육과정에 입학했습니다. 당신의 지지층을 늘리려면 업적을 반드시 사수해야 합니다.”

“누구지?”

교감이 될 뻔한 MAX급 선배님께서 뼛속까지 교육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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