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19회차] 진리 vs 진리
이걸 말해줘야 할까?
하지만 노골적으로 ‘당신 딸이 용사에게 일광욕을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순 없다.
이건 명예교사의 힘이니까.
원래는 최종보스 마왕이 가져선 안 되는 특전이다.
하지만 편법은 존재한다.
우연을 가장한 채 ‘당신 딸을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히 섹스피어가 연락을 취할 것이고, 암흑공주가 강제로 일광욕 중임을 눈치챌 것이다.
내 고민은 짧았다.
교생 아가씨의 말대로, 후배를 올바르게 이끌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야. 너의...”
“용사님. 실례지만, 잠시만 기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2000년 만에 소환된 용사는 당신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섹스피어의 코앞에 홀로그램이 띄워져 있었다.
그 화면에는 용사 리헬의 발에 얼굴을 밟힌 채 흙바닥에 쓰러져 있는 암흑공주가 보였다.
카메라의 각도로 봐서는 하늘에서 수직으로 찍는 것 같았다.
설마...
“인공위성까지...?”
판타지 세계에서 인공위성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밤의 태양. 제가 187년 전에 발명한 회심의 역작입니다. 이후에 꾸준히 우주로 쏘아서 현재는 서대륙 전역에 감시망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휘유~”
“원래는 태양을 가려서 인위적인 개기일식을 일으키는 용도로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제공권을 확보하고 보니, 쓰임새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한 번 보시지요.”
틱.
종결자 섹스피어가 손끝으로 홀로그램을 클릭했다.
그리고 오른손에 쥔 지팡이로 G등급 음양의 힘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 힘은 지팡이에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사라진 게 아니다.
나는 시선을 위쪽으로 향했다.
시야가 돔의 천장에 가로막혀서 하늘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의 거대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가깝진 않았다.
하지만 내 인식범위 안이었다.
“맙소사...”
섹스피어의 의도를 단번에 눈치챈 나는 전율했다.
종결자가 확언해줬다.
“제 지팡이는 밤의 태양이랑 보이지 않는 통로로 이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마법사에게 지팡이는 마법을 증폭하고 집중시키는 도구라면, 저에게는 전송장치입니다. 가장 유리한 높은 지형에서 포격하기 위한.”
이건 유리한 수준이 아니다. 일방적인 폭력이다.
그 직후,
콰아앙-!
용사 리헬의 정수리 위로 무지개색 빛줄기가 뚝 떨어졌다.
신성의 보호막?
속성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진리가 함께하는 종결자의 공격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니까.
이 시점에 용사 리헬의 생존을 논하는 건 무의미했다.
저 공격은 ‘마왕의 화신’으로도 버틸 수 없으니까. 신성만 믿고 까부는 애송이에게는 버겁다.
“...안 끝나네.”
하지만 기다려도 세계가 붕괴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섹스피어가 지팡이를 쥔 오른손을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안 끝나도록 그를 안 죽였기 때문입니다. 2000년 만에 용사님을 집에 초대해놓고 헛걸음하게 해드릴 순 없으니까요. 허허.”
“...정말로 다 아는군.”
“하지만 진리를 들추고 본 미래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미래가 있을 턱이 없다.
용사가 없는 세계는 붕괴하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용사가 소환되는 시점부터.
홀로그램에선 암흑공주와 용사 리헬의 상황이 역전되어 있었다.
인위적인 개기일식으로 햇빛을 피한 암흑공주는 초주검이 된 용사를 포박했다.
휘리릭~
흡혈귀의 새빨간 피로 이루어진 밧줄이 그의 몸을 칭칭 감았다.
‘큭! 라파벨리...!’
하지만 용사 리헬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멀리 떨어트려 놓았던 잡것을 불렀다.
‘리엘 님! 구해드리겠습니다!’
라누벨을 데리고 개별행동하고 있던 용병A가 달려왔다.
‘엇?! 용사님?! 어째서 암흑공주랑 싸우고 계신 건가요?!’
용병A와 함께 숲에서 과일, 버섯 같은 먹거리를 구하고 있던 라누벨의 예리한 질문.
용사 리헬이 외쳤다.
‘암흑공주가 마왕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얼씨구? 선배의 이름을 파네?
유부남인 나는 암흑공주를 지배하긴커녕 손가락조차 넣지 않았다.
명백한 거짓말!
그런데 비열한 용사 리헬은 라누벨에게 자신의 만행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변명을...
‘공주님! 정신 차리세요!’
...오늘도 라누벨은 어김없이 내 혈압을 올렸다!
“친절한 용사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이곳은 서대륙. 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함께 홀로그램을 통해서 상황을 살피던 섹스피어가 말했다.
그리고 증명했다.
‘공주님을 지켜라!’
‘경고합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두 팔을 올리십시오!’
‘당신들은 포위됐습니다!’
‘순순히 항복하십시오!’
영원한 밤의 제국 군대가 용사와 잡것들을 포위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루살이 같은 무력집단이 아니었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흡혈귀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감싼 검은색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 방탄복.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 선택이었지만, 그들의 저 복장은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심지어 오른손에는 총처럼 생긴 무기를 쥐고 있었으며, 왼손에는 전신을 방어할 수 있는 크기의 직사각형 반투명 방패를 장착했다.
너무 거리가 멀어서 그들의 능력치를 당장 확인할 수 없지만, 절대 낮지 않으리라.
‘어디서 이런 괴물들이...!’
‘너무 강해요!’
상대가 아예 되지 않았다.
흡혈귀들이 맨몸으로 능력치만 믿고 싸워도 힘든 판국에 인간처럼 완전무장했으니까.
그나마 잡것들이 몇 초간 버틸 수 있었던 건, 종결자 섹스피어의 아량과 자신감이 작용한 덕분이다.
“저들도 이 세계에 갇힌 영혼들. 용사에게 이용당했을 뿐입니다.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여전히 무르네.”
라누벨과 용병A는 죽더라도 세계가 붕괴하지 않으니까.
내 핀잔에 섹스피어는 머쓱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천성인 모양입니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암흑공주의 피가 아닌 특수한 밧줄에 팔다리가 다시 묶인 용사 리헬은 꼼짝달싹 못 했다.
스킬 신성의 보호막이 만능처럼 보이지만, 공격이 아닌 포박에는 면역과 반사 효과가 발현되지 않았다.
폭풍의 기사로 불리는 용병A가 나름대로 애써봤지만, 그의 능력은 중앙대륙에서나 통용됐다.
중앙대륙.
명칭만 보면 세계의 중심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지만, 용사들의 시작지점이라서 능력치 평균수준이 낮은 편이다.
“곧 정리되겠군.”
“용사님만 괜찮으시다면 저들을 제국에 가둬둘 계획입니다. 분할된 이 세계가 끝날 때까지.”
“마음대로 해.”
나는 친절한 MAX급 선배로서, 후배 리헬을 따라다니며 좀 더 지도편달 해주고 싶지만, 구해줄 의리와 의무는 없다.
그저 상황을 지켜볼 뿐.
용사를 감금하기로 한 판타지 원주민의 판단을 존중해주리라.
이대로 리헬의 모험이 끝날까?
판타지 경력 100년의 용사였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 예상대로라면,
‘용사님! 라누벨이 어떻게든 해볼게요! 에잇!’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면서 마법을 활성화했다.
“저 무슨...!”
방금까지 여유로웠던 종결자 섹스피어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번쩍-!
번쩍-!
새하얀 빛이 포박된 용사 리헬과 용병A의 몸을 감싸더니, 순식간에 어딘가로 날려 보냈기 때문이다.
공간이동.
말은 쉽지만, 그 정도는 제국에서도 예상하고 대비해뒀을 것이다.
“또 라누벨이군.”
하지만 라누벨의 마법은 그 제약을 귀여운 척하며 무시해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마법은 진리를 따르는 제 발명품을 넘어섰습니다. 이걸로 4번째 실패로군요.”
완벽한 음양의 조화가 깨지기 전까지 성공이 보장된 종결자에게 ‘실패’를 안겨줬다.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라누벨은?”
“...강력한 마법의 발현을 위해 레벨까지 희생한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것 같습니다.”
“튀었군.”
“공감합니다.”
보유한 모든 경험치를 마력으로 치환하면서 ‘0레벨’이 된 라누벨의 시신은 몬스터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나와 섹스피어는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의도된 연출이라고.
이 세계에서 완전히 퇴장했으니 죽은 거나 다름없지만.
“늘 이런 식이지.”
내게는 익숙한 전개였다.
라누벨은 귀여운 척하면서 용사들을 돕다가 모험이 마음에 안 들면 저런 식으로 도망치니까.
특이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나이가 아주 많은 비겁한 마누라에게도 넌지시 물어봤지만,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라누벨이 용사를 소환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건 틀림없지만, 나머지는 다른 동료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움 안 되는 존재.
용사의 모험과 성장을 방해한다. 죽을 때까지.
하지만 섹스피어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는 진지한 어조로 설명했다.
“라누벨. 고대어로 진리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단순히 이름일 뿐이라고 여겼었는데, 조금 전에 제 진리를 상쇄한 걸 보면서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됐습니다. 또 한 명의 종결자. 혹은, 친절한 용사님처럼 이 세계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은 존재. 그녀는 이 둘 중 하나일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지.”
“라누벨을 직접 만나서 대화해보고 싶지만, 이미 도망쳐버렸으니...”
섹스피어는 무척 아쉬워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방법이 있지. 네가 나에게 정보를 넘겨주면, 나는 라누벨이 아직 살아있는 다른 차원의 너에게 그 정보를 전달해줄게.”
“오-!”
“괜찮은 생각이지?”
“그렇습니다! 아니, 어쩌면 용사님께서 구상하신 것 이상의 성과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용사님의 힘을 빌리긴 하지만, 2000년 동안 불가능했던 차원이동과 시간여행을 간접적으로 성공한 셈이니까요!”
적당히 맞장구치며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여행은 아닌 것 같은데?”
머나먼 과거가 아닌 몇 년 전으로 회귀할 뿐이다.
심지어 역사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습니다. 용사님께서 소환되신 날을 0년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곳에서 100년을 보낸다고 해보지요. 저는 지난 100년 동안 축적된 발명품의 설계도와 지식을 용사님께 전달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아!”
“하하! 이해하신 듯하군요. 네! 그렇습니다! 100년 동안 축적된 정보를 계승한 또 다른 섹스피어는 0년부터 매번 같은 발명과 발견만 하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단숨에 100년의 연구를 앞당길 수 있으니까요! 이건 혁명이자 반역입니다!”
섹스피어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가 저렇게 흥분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굉장히 흥미로운 얘기였으니까.
이론상으로는 멈추지 않고 무한히 발전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의문: 강한수 생도님. 여기가 판타지아 세계가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판타지가 맞아! 교생 아가씨!
...아마도?
“대충 이야기가 정리된 것 같으니 빠르게 시작하자고. 일단은 이 천공선의 제어권을 언제든지, 몇 번이고 내 수중에 넣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부터.”
“하하! 그거라면 간단합니다.”
라누벨의 마법으로 중앙대륙에 불시착한 후배와 용병A는 내 머릿속 구석에 밀어뒀다.
지금은 이게 훨씬 중요하니까.
1개월, 3개월, 1년, 3년...
정의로운 MAX급 마왕님의 판타지 경력이 범람하는 강물처럼 빠르게 쌓여갔다.
그러나 영원하진 않았다.
종결자의 진리를 벗어난 WiFi를 활용할 방법을 연구하던 어느 날.
변화가 찾아왔다.
“드디어 왔나.”
용사 리헬이 수많은 동료를 이끌고 마왕의 성으로 침공해왔다.
웬만하면 무시하겠는데...
‘리엘 님을 위해.’
‘용사님을 위해.’
‘주군을 위해.’
‘주인님을 위해.’
‘당신을 위해.’
그 규모가 상당했다. 그리고 잡것들의 상태도 매우 이상했다.
“쯧. 아무래도 가봐야겠는걸.”
내가 마왕의 성에 세워둔 4대 군주가 돌파당할 것 같았으니까.
연구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허허! 그렇군요.”
이 세계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종결자 섹스피어.
그가 회심의 역작을 내게 공손히 내밀었다.
“디자인이 상당히 잘 뽑혔네.”
감촉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희망의 마왕이시여. 이것을 또 다른 저에게 보여주시면 됩니다.”
“이름은?”
나는 천공선 오르가타에 올라타면서 넌지시 질문했다.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몰랑폰1입니다.”
나로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오만한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