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20회차] 비리의 악취
‘이건 말도 안 돼! 무언가 크게 잘못됐어!’
천공선 오르가타를 압수당한 용사 리헬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왕궁 정원에 주저앉아 있었다.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판타지 세계에 소환되자마자 최종교통수단을 꺼내다니?
그래놓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투덜대고 있었다.
“1레벨에 마왕의 성으로 진격해서 하루 만에 아빠의 멱살을 잡았던 남편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어때서?”
쏘시아는 이 MAX급 남편님을 어떻게든 깎아내리고 싶은 모양이지만, 나는 매우 떳떳하다.
블랙박스는 합법이었다.
흑화 선배가 개발한 스킬이자 직업이다.
그 힘은 판타지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었으며, 시스템에 저항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블랙박스 덕분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굳이 블랙박스가 없더라도 나는 1레벨로 장인어른의 멱살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강했으니까.
어떻게?
마스터 몰랑
이 위대한 존재의 가르침을 토대로 생명과학의 진수를 몸에 담았다.
마기 빼면 시체인 장인어른은 한주먹거리였다.
“나에게 쩔쩔맨 주제에.”
“네가 비겁한 가슴으로 성검을 튕겨내고 시선을 빼앗았잖아! 비겁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성희롱도 정도껏 하시지...?!”
자가용을 빼앗긴 용사 리헬의 모험은 대단히 순조롭게 진행됐다.
만두 왕국을 위해 1년 동안 봉사한다는 약속을 깬 그는 야밤에 탈주해서 북부로 이동했다.
용사 리헬은 용병길드에 들러서 ‘폭풍의 검사’로 불리는 용병A를 또 영입한 후, 매일같이 노숙하며 만두 왕국의 추적자들을 따돌렸다.
어디로 향하는 걸까?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100년 경력의 나조차 몰랐던 비밀의 장소였다.
“묘지로군.”
하지만 평범한 묘지가 아니다.
신성제국을 세운 ‘라누베르크’ 황가의 묘지였기 때문이다.
역대 황제와 훌륭한 업적을 세운 직계와 방계 혈통들만이 죽어서 묻힐 수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도굴꾼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만큼 보안과 관리가 철저한 금역이다.
맹점이었다.
역사가 깊고 유력한 가문 대부분이 크든 작든 이런 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용사 리헬이 묘지 밖의 비석에 자신의 피를 묻히자마자 전혀 다른 장소로 변모했다.
휘이이잉~
비석이 미닫이문처럼 세로로 갈라지면서 통로가 생겼다.
하지만 지하로 내려가는 숨겨진 계단 같은 게 아니었다.
공간이동문.
백색의 신성과 푸른색 마력이 혼재된 하늘색의 회오리가 들어오라고 손짓하듯 휘몰아쳤다.
‘용사님! 용사님! 라누벨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괜찮습니다, 라누벨 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고귀한 혈통이 무엇인지 우매한 자들에게 똑똑히 가르쳐줄 뿐입니다.’
‘우우...’
‘자! 들어가시지요.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판타지 세계에 흥미를 완전히 잃었거든요.’
‘...그런가요.’
나는 한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라누벨이 저런 표정을...?”
죽을 때조차 귀여운 척하던 미소녀의 안면근육과 눈동자에서 감정이 싹 사라졌다.
용사 리헬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오랫동안 라누벨에게 시달려온 나는 알 수 있었다.
평소답지 않다고.
“비겁한 남편. 나는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는데?”
“잘 봐. 던전으로 들어가는 라누벨이 골반을 흔들지 않아.”
“...아무리 생각해도 너는 쓰레기가 맞는 것 같아. 위험한 던전에 들어가면서 미소녀의 엉덩이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소리잖아.”
“거슬려서 본 것뿐이야.”
모든 게 무섭고 낯설었던 1회차 초창기에 라누벨을 짝사랑했던 건 부인하지 않겠다.
상당히 의지했으니까.
그녀가 고의로 함정을 밟거나 험한 길로 유도하면서 모험을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전까지는.
스륵-!
스륵-!
쏘시아가 MAX급 남편님을 평가절하하는 사이, 용사 리헬과 라누벨은 그 공간이동문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가진 않았다.
나는 그림자A의 명예교사 지위를 활용해서 모든 학생을 ‘몰래’ 관찰할 수 있으니까.
교사와 교생처럼.
“엉덩이를 좋아하는 남편. 무언가 이상해.”
“나도 눈치챘어. 리헬이 감시망에서 사라졌어. 그리고 나는 엉덩이보다 엉덩뼈 취향이야.”
방금까지 문제없이 훔쳐볼 수 있었던 용사 리헬이 시야에서 완벽히 사라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그래서 시스템 개발자인 쏘시아의 자문을 구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나를 말랑한 놈처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자존심 상했다.
“쏘시아. 내가 웬만하면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까부터 자꾸 오해해서 어쩔 수 없이 고백할게. 네 엉덩뼈는 최고야.”
내가 두드려본 수많은 엉덩뼈 중에서 그녀가 가장 아름다웠다.
“모, 몰라! 이 바보야!”
“히히히! 새빨간 조카도 귀여워~”
“이, 이모- 아으으으...”
나는 상태가 안 좋은 쏘시아를 놔두고 마왕의 옥좌에서 일어났다.
라누베르크 황가의 묘지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로 훨훨 날아서 가도 되지만, 나는 천공선 오르가타를 활용했다.
형평성 때문이다.
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중앙대륙 북부로 출장을 간다면, 나머지 더미들도 전부 이동해야 공평하니까.
하지만 여기에 ‘변수’가 끼어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론) 용사가 천공선을 소환했다.
본론) 마왕이 천공선을 압수했다.
결론) 천공선에 마왕이 탑승했다.
용사 리헬이 천공선을 소환하는 바람에 마왕 파르마몬이 외출하게 된 것이다.
즉, 나는 형평성을 어기지 않았다.
혼자만 튀는 행동을 한 비열한 후배가 원인이다.
▶감탄: 정말 굉장해요. 그런 해석이 가능하군요!
과찬이야, 교생 아가씨!
뚜렷한 기준 없는 편파판정을 밥 먹듯 하는 교직원 일당도 이러면 아무런 말 못 할 것이다.
[함장님. 환영합니다.]
[항로를 설정해주십시오.]
다른 용사가 천공선을 소환한다면 형평성을 위해 그쪽도 외출해줘야 하지만, 부모 잘 만난 금수저인 리헬을 제외한 모든 용사가 빈털터리로 모험을 시작한다.
그렇기에 전혀 문제없다.
“중앙대륙의 신성제국. 신의 혈통이 세운 나라란 설정이었지?”
반쪽짜리 천사인 리헬이 그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 자기 피로 봉인을 푸는 것을 보았다.
내 판타지 경력이 100년이다.
척하면 척이다.
“신성제국의 라누베르크 가문의 시조가 고모라는 거?”
“따라왔네?”
비겁한 마누라가 천공선 오르가타에 탑승해 있었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지만, 판타지아 개발자인 그녀에게 공간의 제약은 무의미했다.
특히, 나랑 그녀는 우주가 공증한 결혼계약서나 다름없는 ‘두 번째 저주’로 이어져 있다.
바늘 가는 곳에 실 따라가듯, 쏘시아는 언제든 내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다.
“안 따라가면 내가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오해할 거잖아. 흥! 엉덩뼈가 예쁜 게 뭔 대수라고.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내가 그까짓 입바른 소리에 흔들릴...”
“조카야~ 조카야~”
“나, 나는 오해받기 싫어서 따라온 거야. 오해하지 마. 알게써?”
알겠으니 혀 씹지 마.
쏘시아가 비겁하게 귀여운 캐릭터로 바꾸는 바람에 마왕의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 마누라는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을 텐데?
갑자기 1회차 추억이 떠오른다.
북대륙의 수호자에게 빌린 천공선 라우리타를 타고, 5대 재앙인 서리여왕 엘쉬의 둥지까지 눈보라 치는 설원을 돌파하던 때였다.
▶반짝: 무척 낭만적이었겠네요.
무척 춥기만 했어, 몸도 마음도 따스한 교생 아가씨!
정말 이상한 날이긴 했다.
폭주해서 마을 사람들을 해치는 얼음공주를 처치한 나를 맹비난하는 검희에게 반했으니까.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고백하고자 천공선 갑판 위로 불렀다.
그날은 별빛 한 점 없는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기대: 그래서요?
갑판의 투명한 빙판 위를 걷다가 발을 헛디딘 검희는 새하얀 설원 위로 떨어졌다.
▶당황: 운이 정말 없었네요...
그러게 말이야.
판타지아 북대륙 최강의 기사이자 최고의 미녀로 불리는 여자가 추락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수색작업?
툭하면 내 탓으로 돌리는 동료들에게 시달리기 싫었던 나는, 입 다물고 침실로 돌아가서 잤다.
얼어 죽은 줄 알았던 검희는 살아서 다시 합류했고, 내 1회차 모험의 마지막 여정까지 함께했다.
정말 질긴 인연이었지!
“너, 용케도 그런 여자랑 해서 아들을 낳았다?”
“.....”
나는 쏘시아의 추한 질투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3살짜리 귀여운 황제가 다스리는 북대륙은 정통후계자가 필요했다. 지금도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어째서 검희였냐?
...나를 낳아준 유모가 소꿉친구였던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마약마왕! 사랑은 위대한 거다!”
“알아.”
테니스라켓이 없어도 무쌍하신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지!
장인어른을 상대하는 편이 100배는 더 쉬웠다.
[함장님. 보고드립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착륙합니다]
어린 천사들의 대중교통수단이었던 천공선 오르가타는 빨랐다.
판타지아 중앙대륙 남부에서 북부까지, 쏘시아가 새침한 표정을 3번 짓는 사이에 가로질렀다.
“그걸 세고 있었어?!”
“아니.”
그냥 해본 말이다. 비유 몰라? 그만큼 빨리 왔다는 소리다.
“나, 나도 그쯤은 알아!”
“조카야! 오늘따라 귀여움이 폭발하는 것 같다!”
“이모님. 부탁이니 오늘만이라도 조용히 해주세요.”
“히히히!”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웃지도 마시고요.”
“조카야. 인정하면 편해.”
“인정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는걸요?”
“추하다, 조카야.”
“안 들려요.”
나는 티격태격하는 둘을 무시하고 문제의 비석을 관찰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소란이 벌어지면서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천공선이다...!”
“신의 유람선이 등장했다!”
“오! 맙소사! 신이시여!”
“신께서 강림하셨다!”
천공선 오르가타의 크기가 조각배 수준이었다면 안 들켰겠지만, 판타지아 동대륙에서만 건조되는 돛 5개짜리 초대형 범선보다 크다.
신성제국의 노예, 백성, 기사, 귀족, 황족 할 것 없이 모두가 평지에 정박한 배를 보고 경악했다.
“신의 강림이라...”
틀린 말은 아니다.
마신(魔神)도 엄연한 신(神)이며, 그 힘은 판타지아 세계의 절반을 구성하고 있으니까.
나는 우매한 판타지 원주민들에게 마스터 몰랑의 위대함에 관해 포교하고 싶었지만, 비열한 후배 때문에 지금은 매우 바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내가 마왕 파르마몬이란 사실을 눈치채면 곤란하니까.
그전에 누군가 나서서 저들을 상대해줘야 한다.
마침, 좋은 수가 떠올랐다.
뿅!
“부르셨나요, 주인님.”
정령으로 환생하면서 총배설강이 됐지만,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여신(女神)인 찰떡을 소환했다.
용사 페스티벌의 얼굴마담.
비주얼의 끝판왕!
그녀의 고귀함과 성스러움을 의심할 판타지 원주민은 없으리라.
“찰떡. 부르자마자 귀찮은 일을 부탁해서 미안한데, 저들에게 몰랑교를 전파해줘.”
“맡겨주세요.”
표정과 말투가 유감스러운 최초의 정령이랑 달리, 성녀H였던 찰떡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여신!
“오오!”
“아!”
“신이시여.”
천공선을 나와서 살짝 허공에 뜬 그녀를 본 모두가 바짝 엎드렸다.
신의 백성이라고 믿는 신성제국 국민에게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그때였다.
슈우웅-!
슈웅-!
다시 열린 비석의 하늘색 공간이동문에서 용사 리헬과 라누벨, 용병A가 뛰어나왔다.
하지만 이전이랑 달랐다.
셋의 레벨과 스킬 숙련도가 대폭 올랐으며, 착용한 장비들도 이전보다 압도적으로 좋아졌다.
무엇보다도,
“허! 저 새끼 봐라?”
용사 리헬의 허리춤에는 성검3가 매달려 있었다.
선대 용사의 영혼 삽입.
형태와 크기 변경 기능.
나는 별로라서 쓰지 않았지만, 외로움을 잘 타는 사회부적응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됐다는 것 같다.
이름도 바뀌었다.
몰랑로드!
인어의 성검이라고 불린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5차 교육과정의 성검은 총 5자루이며, 5개 대륙에 하나씩 봉인되어 있다.
그중 성검3는 4차 교육과정이랑 마찬가지로 북대륙의 어느 옹달샘에 봉인되어 있다.
그런데 이 성검을 중앙대륙의 황가 묘지에서 얻었다고?
비리의 악취가 진동했다.
“어엇?!”
내가 성검2에 놀랐듯, 용사 리헬도 이쪽을 보고 경악했다.
잃어버린 자가용을 공명정대한 MAX급 마왕님께서 소지하고 있어서 혼란스럽겠지.
의도한 연출이다.
그런데...
“야. 어딜 보냐?”
이 시건방진 후배는 하늘 같은 선배님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할머니...!”
몰랑교를 전도(傳道) 중인 내 핫팩을 이상하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