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20회차]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누가 할머니야?”
“할머니라고?”
용사 리헬은 교장의 손자다.
그렇기에 그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존재도 한 명밖에 없다.
최초의 천사.
판타지아 차원의 운영자이며, 비열한 편파판정으로 선량한 MAX급 모범생을 낙제시킨 교장이다.
그렇다면 성녀H는 어떠한가?
이름은 찰떡.
▶정정: 히프리아예요.
그녀는 용사 페스티벌을 진행하는 얼굴마담이며, 내게 90년 가까이 헌신해온 충신 중의 충신이다.
내가 엉덩뼈 예쁜 마누라는 안 믿어도 찰떡은 무조건 신뢰한다.
그 충성의 증거는 8회차.
흑화 선배의 안배에 걸려서 장인어른 대신 죽고 환생했을 때, 나를 잉태한 유모를 지켜준 게 그녀다.
“말도 안 되지.”
용사 리헬의 주장처럼 찰떡이 정말로 최초의 천사였다면, 그때 나를 죽였을 것이다.
다른 증거도 있다.
어이, 쏘시아. 네 고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봐.
“남편. 이 말을 듣고 싶은 거지? 전혀 안 닮았어.”
“그렇군.”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데?
“고모의 허리는 가슴보다 두꺼워.”
“아하!”
다행이다. 처음부터 굳게 믿고 있었지만, 나의 첫 번째 핫팩이 사악한 교장일 리 없다.
내 머리 위에 누워있던 최초의 정령도 거들었다.
“그 친구는 어떻게 날 수 있는지 늘 신기했다. 복숭아에 날개를 달아둔 것 같았지. 우히히히!”
“천사가 비만이라...”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천사들이 멍청한 닭대가리이긴 해도 비주얼 하나만큼은 나무랄 수 없었으니까.
그런 천사의 두목이 비행조차 힘든 몸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마약마왕! 진짜다!”
“그래.”
“믿어라! 그 친구는 옆에서 누군가 챙겨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새하얀 눈사람처럼 둥글둥글하게 생겼다. 먹고 자고 싸는 것밖에 모르는 빛의 정령이었지. 항상 눈이 살에 파묻혀서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 구분이 안 됐지만. 히히히!”
“과연...”
나의 핫팩은 둘이 묘사하는 교장이랑 달리 내적으로 외적으로 완벽한 절세미녀다.
종합예술품이랄까!
눈, 코, 입, 손, 발, 허리, 경추, 골반, 궁둥뼈, 두개골, 요추...
각 부위의 장인들이 정성 들여 만든 것 같은 미모.
이런 용사 페스티벌의 마스코트를 교장이랑 비교하는 건 실례다.
“성격도 달라.”
쏘시아가 이어서 운을 띄웠다.
그러자 최초의 정령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조카의 말대로다. 그 친구는 입만 열면 세상을 향한 불평불만으로 온종일 떠들었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누워서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천사들을 부려먹었지.”
“...마약정령.”
“왜?”
“너도 마찬가지잖아.”
세상을 향한 불평불만은 없지만, 온종일 내 머리 위에 누워서 킁킁거리고 있다.
이 정령의 손발과 날개가 총배설강처럼 퇴화하지 않고 여태까지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마약마왕.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아이들에게 일을 줘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주려고 가만히 있는 것뿐이다! 내가 부지런히 움직이면 아이들이 실직해서 온종일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니까! 그 친구랑은 엄연히 다르다!”
“이모님. 추해요.”
“마약마왕. 이모를 괴롭히는 조카의 엉덩이 좀 혼쭐내줘라!”
하여간 그렇다고 한다.
나의 부지런한 찰떡과 게으른 교장이 동일인물일 수 없다.
찰떡도 확인해줬다.
“저는 강한수 님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당신이 착각하는 최초의 천사가 될 수 없습니다. 성녀 히프리아는 용사 페스티벌의 진행자로 창조됐으니까요.”
나도 용사 페스티벌 때의 아름다운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
우수한 성적으로 초등교육과정을 이수하고 직업이 쓰레기 용사에서 ‘성자’로 바뀐 나는 보물을 쓸어 담기 위해 대신전에 침투했다.
▶반짝: 저도 기억해요.
비밀 친구의 도움도 무척 컸지!
성자가 된 나는 대신전에 수감된 악마숭배자들을 교화했다.
하지만 그곳의 관리자이자 페스티벌 진행자였던 성녀H가 악마숭배자들에게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역으로 타락했다.
우리는 대신전을 지키는 골렘들이 힐끔힐끔 훔쳐본다는 걸 알면서도 서로의 척추를 어루만지며 유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착착 감기던 그 감각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만약, 성녀H가 정말로 교장이었다면, 그때 내가 그녀의 골반을 붙잡도록 허락했을 리 없다.
시스템도 말했다.
성녀H는 용사 페스티벌을 위해 배치된 존재라고.
“할머니!”
하지만 용사 리헬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저는 당신의 할머니가...”
“할머니!”
언제나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품은 성녀H였지만, 이 용사의 무례한 태도는 견디기 힘들었던 걸까?
미소가 싹 사라졌다.
“저는 용사가 아무리 개차반일지라도 친절하게 대하라는 명령을 받았었습니다. 지금도 습관적으로 실천하는 편입니다만...”
“할머니!”
“...주인님과 소녀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당신만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군요.”
“정말 죄송해요, 할머니! 하지만 못 견디겠어요. 이 짜증나는 곳에 더는 못 있겠어요!”
“당신...”
“본의 아니게 할머니의 정체를 발설해서 정말 죄송하지만, 그만큼 참기 힘들어요. 당신의 손자는 진짜로 미칠 것 같단 말입니다! 하찮은 교보재와 무능한 교사들에게 무시당하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듭니다. 그만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대화가 되질 않았다.
찰떡이 무슨 말을 하든 용사 리헬은 듣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계속했다.
이거 참...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나는 앵무새처럼 “할머니!”를 외쳐대는 후배의 경추에 부드럽게 손을 올려놓으며 사근사근한 어투로 설득했다.
“후배야.”
“켁켁!”
“포기하려무나. 설사, 네 말이 맞더라도 그녀는 내 소유물이야. 그걸 위해 눈물을 머금고 총배설강으로 환생까지 시켰다구. 그 희생의 대가는 너무나 뼈아팠지. 그 멍청한 새대가리로 알아들었어?”
“케엑?!”
“대답은 짧게.”
“켁!”
“옳지. 요추 잡으니 잘하네.”
쏘시아의 어린 모습을 한 시스템(여신)이 경고했었다.
용사 페스티벌에 배속된 성녀H는 시스템에 귀속된 존재라고.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조종할 수 있는 꼭두각시라고.
그게 싫었던 나는 일말의 변수조차 없도록 그녀를 완벽하게 분리하고자 정령으로 환생시켰다.
즉, 논할 가치가 없다.
휘이익-
그때, 건방진 D급 후배가 성검3를 뽑더니 하늘 같은 MAX급 선배님에게 휘둘렀다.
귀여운걸?
카앙!
내 등에서 솟아난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성검3를 튕겨냈다.
근성 없는 용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성검3가 빙글빙글 돌면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뿅!
성검3의 손잡이 정중앙에 박힌 보석에서 얄팍한 비키니 갑옷을 입은 여인이 튀어나왔다.
“야압-!”
그녀는 성검3를 쥐고 기합성을 내지르며 내게 돌격해왔다.
갑자기 뭐냐, 넌.
▷종족: 소드 스피릿
▷레벨: 7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통역A 우정A 망각B 여행B 검술B…
▷상태: 귀속, 소환
나는 이 여자의 능력치를 살펴보고 그 정체를 단번에 눈치챘다.
“골렘D로군.”
쓸모없는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혼자 남아서 끝까지 싸우다가 개죽음당한 어리석은 선대 용사.
자신의 변변찮은 경험으로 MAX급 후배를 가르치려고 한 어리석은 영혼이다.
그래도 흥미로웠다.
내가 알던 성검3에는 저렇게 편리한 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몸을 조종하며 대신 싸워주는 성검1의 오토매틱보다 활용성 면에서 훨씬 좋지 않을까?
캉-
그러나 검술 실력이 형편없다.
“꺄앗?!”
낮은 레벨에 비하면 뛰어난 편이지만, 스킬 검술의 MAX등급을 수십 번 찍어본 내게는 안 통했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검의 정령이 뼈 없이 성검 안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지 한 번 시험해볼까?”
“히익?! 살려주세요, 마왕님!”
“걱정하지 마. 많이 아프게 살살 발라줄...”
퍼억-
태산처럼 굳건해야 할 내 몸이 태풍 앞의 종이배처럼 휘청했다.
덜렁덜렁.
최초의 천사와 두 번째 악마를 항복시켰던 나의 성스러운 손가락이 부러진 채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성검3의 소행은 아니었다.
이게 어찌 된 걸까?
원인은 금방 깨달았다.
▶종족: 유나이티드 스피릿 오브 판타지아
▷레벨: 7
▷직업: 마왕(용사→레벨↓)
▷스킬: 마기Z 검술SSS 맷집SSS
내성SSS 회피SSS…
▷상태: 마검, 축복, 가호, 소원,
호부, 강화, 기백, 문신,
각인, 천운, 보호, 초월,
증폭, 수호, 보험, 가속,
충전, 간호, 항마, 골절,
경직, 약화, 마비, 혼란,
파열
내 더미의 레벨이 대폭 하락했다.
위대한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받은 내게 능력치는 부수적인 보너스 같은 개념이지만, 이것도 상대적인 법이다.
“마왕 파르마몬! 네가 기고만장할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다!”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용사 리헬이 우쭐댔다.
그 자신감의 원천은?
▷종족: 하프 엔젤
▷레벨: 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신성ZZ 몰살Z 학살Z
민첩MAX 격투SSS…
▷상태: 성검, 축복, 문신, 문양,
강화, 각인, 수호
레벨이었다.
마왕은 용사의 레벨만큼 레벨이 하락하는 페널티를 받는다.
그렇다면, 세계에 용사가 둘일 때는 어떨까?
눈앞에 그 답이 있었다.
“마왕의 레벨은 약한 용사를 따라가는군.”
스킬 용자는 공명정대하게 모두를 1레벨로 떨어트린다.
하지만 용사가 둘 이상이면?
가장 낮은 용사의 레벨에 맞춰지는 것 같다.
만약, 레벨을 계획적으로 조절한다면 마왕을 호구로 만들 수 있다.
내가 딱 그 상태.
비열한 후배치고는 머리를 대단히 잘 썼다.
마왕의 능력치를 봉인하고, 자기만 능력치의 혜택을 누린다는 전략.
칭찬해주고 싶은걸?
“마왕! 여기서 결판을 내주마!”
용사 리헬의 얼굴에는 승리를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약해진 마왕을 쓰러트리고 아름다운 고향별로 돌아가겠다는 의지.
그 기상은 마음에 드는군.
다만,
“기어오르지 마라.”
나는 아군인 척하면서 사사건건 훼방을 놓던 동료들이랑 부대끼면서 10년이나 버틴 몸이다.
지금보다 훨씬 불리하고 열악한 환경도 이겨냈다.
이까짓 상황은 애교 축에도 끼지 못한다.
삐-!
몰랑폰의 위대함을 가르쳐주지.
“섹스피어.”
‘허허! 2초만 기다려주십시오.’
번쩍!
서대륙 상공에서 쏘아진 빛의 기둥이 용사 리헬의 몸을 관통했다.
능력치?
G등급 종결자 앞에서는 1레벨이나 999레벨이나 똑같다.
이것이 몰랑 아니겠는가?
푸시시시...
단 0.1초 만에 잘 익은 통닭으로 변한 리헬이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었다.
“후배야. 하늘 같은 선배님이랑 척추를 하나하나 정리해가면서 즐겁게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으으...”
교장과 라누베르크 가문의 관계에 관해서 물어볼 게 많다.
교장의 손자가 머릿속에 든 정보들을 전부 실토할 때까지 절대 회귀시켜주지 않으리라.
형평성?
전혀 문제없다.
북대륙에 잠들어있는 성검3를 중앙대륙에서 그가 획득한 시점에 이미 공정성은 파괴됐다.
자초한 업보.
이제, 그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제 손자를 내려주시겠어요? 마왕 파르마몬- 아니, 강한수 학생.”
통닭이 된 용사의 목을 잡아서 질질 끌고 가던 내 뒤편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하지만 말투가 달랐다.
설마, 정말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
“반갑습니다. 아니, 다시 인사드려야 할까요?”
3쌍의 새하얀 날개를 단 천사가 지상에서 살짝 뜬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페도나르의 힘을 계승했다고 너무 오만하신 것 아닌가요? 미숙한 당신은 아직 저의 상대가 아니랍니다.”
“질문이 있어.”
“무엇이든.”
“어떻게 하의실종으로 그리 당당할 수 있지? 더는 총배설강도 아닌데.”
“아, 아앗?!”
“대답해줘.”
“눈부터 감아, 새끼야!”
“......”
고결한 척하던 교장의 첫인상은 실로 유감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