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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301화 (301/430)

 301화

[외전] 마왕 페도나르

우주의 암흑에서 태어난 내게 삶의 목적이란 없었다.

가만히 우주를 표류하며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을 세는 것이 내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영원한 건 없었다.

“냐하하하!”

“돌려줘~ 내 팬티 돌려줘~! 안 돌려주면...”

“뭐라고? 안 들리는-”

“응징!”

“으캬캬캬?!”

귀여운 하늘색 팬티를 들고 도망치다가 분홍색 베개에 맞고 자빠진 성급한 사내를 발견했다.

하지만 웃을 수 없었다.

분홍색 베개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

빛도, 어둠도...

딱 하나를 제외하고.

“살아있습니까?”

“보다시피 멀쩡해. 주위를 살피지 않고 성급하게 도망치다가 자주 겪는 사고지. 냐하하하!”

“그, 그렇군요.”

감정이 대단히 풍부한 존재군.

그리고 강했다.

나였다면 흔적도 없이 소멸했을 베개에 정통으로 맞고도 왼쪽 눈이 퍼렇게 멍들기만 했으니까.

“너는 정령 같네.”

“정령?”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내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는 이어서 말했다.

“어둠의 정령. 나처럼 수련을 통해 완벽해진 존재가 아니라, 자연에서 처음부터 완벽하도록 설계되어 태어난 신(神)이 너야.”

“신...”

“정체성을 자각하자마자 육체를 형성하다니! 제법 소질이 있는... 음? 야! 정령. 이마의 뿔을 따라 하면 어떡해! 그거 표절이야!”

“표절?”

이 뿔을 표절이라고 부른 건가?

나는 그저 이 성급한 사내의 모습을 흉내 낸 것뿐이다.

“마신의 트레이드마크지!”

“......”

“냐하하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네. 표절은 걱정하지 마. 너는 특별히 쓰게 해줄 테니까. 대신, 내가 마신이고 너는... 그래! 마왕으로 하자!”

“마왕...”

“그러면 마왕 친구! 인연이 된다면 또 보자고. 냐하하하!”

“아, 네.”

그날부터 나는 ‘마왕’이 됐다.

이름도 지나가던 어떤 신이 ‘페도나르’라고 지어줬다.

마왕 페도나르.

어딘가 대단히 건성으로 지은 이름 같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긴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동안 수많은 경험을 쌓고, 유명한 식당을 찾아다니고, 마기의 사용법도 발전시켰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한때였다.

그래서 상담해봤다.

“심심하다고?”

“네.”

“저기 보이는 어떤 여신의 순진한 속옷을 한 번 훔쳐봐. 분명히 심심할 틈이 없을 거야.”

“그렇긴 하겠군요...”

모든 인과율을 무시하고 소멸하면 영원히 심심하지 않으리라.

내 선배 격인 이 어떤 마신의 조언은 이처럼 늘 성급했다.

“이봐, 페도나르.”

“네.”

“힘들다고 도망치고 외면하면 당연히 심심해지지. 나를 봐. 심심할 틈이 없잖아. 냐하하하!”

“...그건 당신이 성급해서 자초한 것 같습니다만.”

“그거야말로 성급한 일반화야. 순진한 속옷이 버거우면 세계정복 같은 쉬운 일부터 해보는 게 어때? 신이라면 한 번씩 해보는 신고식 같은 거야.”

“신고식입니까?”

“그래. 신고식. 지금은 네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잖아.”

“그렇군요.”

나는 하늘색 속옷의 어떤 신이랑 정답게 이야기 중인 어떤 여신을 힐끔 바라봤다.

그때, 어떤 사내가 용감하게 다가가서 꽃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내 알을 낳아-”

“응징!”

“아아아악~?!”

어떤 여신이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던 베개가 휘둘러지고, 은하계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태양계 수십만 개가 블랙홀로 변할 틈도 없이 바스러진다.

저리 응징한 이유는?

“하렘은 안 돼!”

참으로 명확한 이유였다.

“...세계정복이 훨씬 쉽겠군.”

저 순진한 어떤 여신의 속옷을 건드리는 것보다는 이쪽이 훨씬 쉬울 것 같았다.

곧바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

신들이 찾지 않는 먼 시골 은하계로 떠났다.

자신의 지식을 전파하기 좋아하는 신들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덕분에 야생 인류가 속옷조차 안 입고 뛰어다니는 게 보기 좋았다.

여기가 좋겠네.

행성의 이름은 프로네시스.

이 이름의 유래는, 모든 정령의 누나, 언니인 최초의 정령 프로네시스가 사는 별이란 뜻이다.

나는 이곳을 세계정복의 출발점으로 정한 후, 나만의 무기를 만들고 원주민들을 병사로 키웠다.

선배의 말처럼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심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랑에 빠져버렸다.

“마왕 페도나르. 세계정복 같은 유치한 계획은 그만두세요. 당신이 쓸데없이 큰 별장을 짓는다고 숲의 나무를 베는 바람에 집을 잃은 동물과 정령이 얼마나 많은 줄... 페도나르? 내 말을 듣고 있나요?”

“...잘 듣고 있소.”

“조금 전에 뭐라고 했죠?”

“당신이 아름답다고 했소, 판타지아.”

“완전히 틀렸잖아요! 당신은 마왕이 아니라 왕바보예요! 제 언니 프로네시스보다 바보라고요! 어째서 실실 웃는 거죠? 이건 굉장히 모욕적인 말이라고요!”

“그렇소. 나는 그대만 만나면 왕바보가 돼버리오.”

“그러면 왕바보 페도나르. 이번에는 한눈팔지 말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당신에게 같은 말만 몇 번째 하는 줄 모르겠다고요. 저는 언니처럼 한가한 정령이 아니에요.”

“당신에게 혼날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숲의 나무를 베겠소.”

농담이 아니다.

별장의 규모가 쓸데없이 커지는 이유는 전부, 최초의 정령 프로네시스의 여동생 탓이다.

별의 정령 판타지아.

이 프로네시스 행성에 태곳적부터 살던 정령이다.

항상 바쁜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숲의 나무쯤은 얼마든지 베어낼 것이다.

“잠깐만요! 그러면 악순환의 반복이잖아요! 왕바보 페도나르, 당신이 어린애인가요? 어른이 좀 혼나서 기분 상했다고 보복하는 건 좋지 않아요. 그래도 원인을 알았으니 해결책을 찾아보죠. 제가 어떻게 하면 나무를 베지 않을 건가요?”

“당신이...”

“내가 뭐요? 뜸 들이지 얼른 말해봐요. 저는 바쁘다고요.”

“음...”

“고민할 시간이 필요해요?”

정령 판타지아가 떠나려는 조짐을 보였다.

다급해졌다.

별에 사는 조그마한 미생물의 청원까지 들어주는 그녀를 다시 만나려면 짧아도 수십 년이 걸리니까.

이 기회를 놓치면, 나는 또 나무를 베고 그녀에게 미움 받으리라.

하지만 돌이켜보면, 너무 성급했던 것 같다.

나는 은하계를 부숴버린 전적이 있는 고백을 해버렸다.

“내 알을 낳아주오.”

그러나 후회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아빠! 이게 무슨 짓이야?”

성공했기 때문이다.

판타지아를 닮은 어여쁜 악마가 별에서 태어났다.

딸 ‘쏘시아’를 그녀랑 함께 키우는 나날이 너무나 행복해서 세계정복도 접어뒀다.

“히히히! 쏘시아. 앞으로 나를 이모라고 불러.”

“안녕하세요, 쏘시아. 저는 이웃하는 행성의 주인이자 최초의 천사인 파르마엘이에요. 당신의 아빠인 페도나르의 누나이기도 하죠. 즉, 당신의 고모랍니다.”

“안녕하세요! 이모! 고모!”

“쏘시아, 귀여워!”

“호호호!”

하지만 우리의 행복은 수십만 년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이웃하는 행성 ‘파르마엘’에서 찾아온 모험가들에게 유적을 파헤치지 말라고 경고하러 떠난 판타지아가 살해됐기 때문이다.

누이 파르마엘은 사과하긴커녕 내 부주의를 비난했다.

그래.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니,

“복수해야지.”

오랫동안 묻어둔 세계정복의 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이러지 마. 엄마도 아빠가 이러는 걸 원치 않을 거야.”

“쏘시아.”

“응.”

“이 아빠에게 설교할 시간이 있으면, 네 엄마의 유지를 이어서 판타지아 행성을 돌보렴.”

“...아빠는?”

“나는 행복에 젖어서 안일했던 나를 용서할 수 없단다.”

“그래... 안녕.”

그 뒤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딸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재회의 순간도 최악이었다.

다시 만난 쏘시아는 내 복수를 막으려고 결성된 모험가 무리에 합류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가소롭다.

나는 세계정복을 위해 생성한 동족 ‘악마’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그들을 똑같이 몰살시켜줬다.

이것이 신과 인간의 차이.

저들은 나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렇게 자만했다.

“잠깐! 이건 설마...!”

용사라고 불리는 마지막 모험가에게서 성급한 어떤 마신의 기운을 느꼈다.

“받아라!”

“젠장!”

눈치챘을 때는 너무 늦었다.

미리 알거나 대비했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깜빡했다.

내게 세계정복하라고 성급하게 권한 존재가 누구였는지를.

그 어떤 마신도 나처럼 심심했던 게 분명하다.

망할 선배 녀석-!

어찌 됐든 나는 패배했다.

눈앞의 모험가가 순수하게 강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인간에게 이런 힘이?

그래서 물어봤다.

“용사여. 그 강대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이지?”

“동료들을 잃은 분노다!”

“그렇군. 최강이라고 자부해온 나는 우정의 힘에 패배한 것인가? 실로 훌륭한 싸움이었다...”

*

패배한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영원히 잠든 별에 봉인됐다.

누이에게 힘을 빼앗기고 그녀가 키우는 모험가들을 위한 훈련용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비참한 나날들.

그 참담한 기분마저 느낄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안녕, 아빠.”

“...쏘시아?”

“고모에게 배신당했어. 응. 정말로 바보 같아. 엄마의 복수는커녕 아빠를 공격하고 이 꼴이야. 천벌 받은 거겠지. 흑흑... 으아아앙!”

“괜찮아, 괜찮아.”

나는 어린애처럼 우는 딸아이의 등을 토닥여주며 깨달았다.

세계정복.

그것을 진지하게 준비 중인 존재는 내가 아닌 누이, 최초의 천사 파르마엘이란 사실을.

대책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

“이번 용사는 좀 늦는군.”

용사가 마왕의 성이라고 불리는 이 별장으로 진격해오기까지 평균 3년이 걸린다.

그런데 이 용사는 무려 10년.

얼마나 한심한 녀석이길래 이리도 오래 걸리는 걸까?

쾅-!

마침내 그 용사가 건방지게 문을 걷어차며 들어왔다.

“당신이 마왕?”

“그렇다! 짐이야말로 모든 마(魔)의 정점! 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페도나르다!”

퍼포먼스는 화려하게!

관중이 용사 하나뿐이라 썰렁하긴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마지막은 근사하게 마무리하리라.

그나저나...

동료가 왜 하나도 없지?

이상한 놈이었다.

“이번에는 진짜인 모양이네.”

“하하! 용사여. 승리를 갈망하는 눈빛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좋다! 인류의 도전을 받아주마···!”

“잠깐.”

“......”

“싸우기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야. 어째서 부하들의 죽음을 수수방관했지?”

흥이 깨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방관? 불쾌하군. 복수하기 위해 더 강한 부하를 늘 파견했었다.”

“그리고 죽었지.”

“그래서 더욱더 강한 부하를 보냈다.”

“그리고 또 죽었지.”

“용사여. 운 좋게 살아서 불만인가?”

정말 이상한 놈이다.

지금까지 이것에 의문을 품었던 용사는 없었으니까.

“처음부터 마왕님이 나섰다면, 나는 여기까지 못 왔을 텐데?”

놀라운 추리력이다.

아니면 저 용사를 제외한 나머지가 멍청하든가.

하지만 대답해줄 수 없다.

내 탈출계획을.

“용사여.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무의미하지 않···.”

“네가 악마의 정치를 아느냐? 모르면 가만히 있거라.”

“......”

대화하면서 시간을 충분히 끈 덕분에 직업 ‘마왕’의 페널티에 적응할 수 있었다.

용사와 레벨이 동등.

심지어 그의 곁에는 동료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완벽했다.

낙승(樂勝)이로군.

...라고 생각했는데 일방적으로 얻어터졌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최초의 용사에게 패배한 과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때처럼 성급한 어떤 마신의 참견은 없었으며, 최초의 천사 파르마엘의 힘이 깃든 성검도 사용하지 않았다.

순수한 실력!

당하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했다.

“큭! 용사여. 그 강대한 힘은 동료를 잃은 분노에서 나온 건가···?”

“아니. 수련의 성과다.”

용사가 상큼하게 미소 짓는다.

소름이 쫙 돋았다.

“그, 그런가. 아무튼, 훌륭한 싸움이었다···.”

내 본능이 속삭였다.

진정한 후계자를 찾았노라고.

*

“근사한 식사 초대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비겁한 따님 때문에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싹 풀린 기분입니다. 그러면 슬슬, 사업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은데요.”

최후의 만찬.

드디어 때가 됐다.

“사위의 말에는 어폐가 있군.”

“장인어른이라고 눈감아드릴 순 없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에게 쓰러져주셔야겠습니다.”

“자네가 용사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자네는 아직 정식 용사가 아니지 않나?”

“용사가 맞습니다.”

“일 처리가 엉성한 교직원 녀석들은 그렇게 말했겠지.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아직 용사가 아니야. 내 말이 틀렸나?”

탕!

사랑스러운 나의 딸이 양손으로 식탁을 박차며 일어섰다.

무척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

“아빠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아는 거야?!”

“나의 사랑스러운 딸아. 설마, 이 아비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 남자를 사위로 삼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용사 강한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점찍어둔 마왕의 그릇이었다. 하지만 정략혼은 꺼려져서 망설이던 차에, 네가 먼저 그를 사랑해줘서 운명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나는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순수한 실력으로 나를 쓰러트리고 소름 돋는 용사의 미소를 짓던 사위의 얼굴을.

자질을 느꼈다.

사위라면 완전무결한 최강의 마왕이 될 것이다.

이건 운명이다.

“운명…? 헛! 도망쳐-!”

“두 번째 악마에게 저주받은 자여! 용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그대는 두 번째 마왕이 될지니! 이것은 우주가 정한 섭리. 최초의 악마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이겠다!”

이 또한 운명.

나는 다시 시작하리라.

듬직한 사위에게 가업을 물려주고 진정한 가족이 되었다.

피가 통하는 진짜 가족이.

“응애~~!”

세계정복을 다시 시작해볼까!

성급한 선배에게도 해줄 말이 잔뜩 있다.

그런데...

“어머! 둘째는 정말 얌전하네. 한수는 엄청 울보였는데.”

내게 젖을 먹이려는 여인의 미소를 보자마자 소름이 쫙 돋았다.

당분간은 얌전히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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