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21회차] 완벽한 용사
시작은 언제나 똑같다.
나는 장인어른의 별장 최상층 옥좌에 앉아있고, 머리 위에는 최초의 정령이 퍼질러 누워있다.
내 더미는 이 상태에서 용사가 올 때까지 온종일 대기하고 있다.
하지만 본체인 내가 직접 더미를 조종할 때는 옵션이 추가된다.
비겁한 마누라.
그림자A.
캡틴 판타지.
찰떡.
쑥떡.
하지만 현재, 그 옵션의 절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최악이군.”
“표정이 살벌한 남편. 안 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는데, 무엇부터 듣고 싶어?”
“안 좋은 소식부터.”
자고로 느끼한 음식을 먹은 후에 청량음료를 마셔야 하는 법이다.
이걸 뒤집으면 의미가 없다.
“응. 알다시피 히프리아와 쑥떡을 잃었어. 네가 보유한 전력이 0.48% 감소했다고 보면 돼.”
“생각보다 매우 낮네.”
못해도 5%는 될 줄 알았는데.
“네가 고모의 권능에 묶인 상태였기 때문에 쑥떡이 살짝 버겁게 느껴졌던 거야. 더미라서 영혼의 출력 자체가 낮기도 했고.”
하긴 그렇다.
분할된 더미의 그릇이 작아서 감당할 수 있는 영혼의 힘에 한계가 있으니까.
“교장은?”
“안 그래도 그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고모는 도망쳤어. 판타지아 어딘가에 있는 건 분명하지만, 은신처는 알 수 없는 상태야.”
그쯤은 예상했다.
이젠 좋은 소식을 들어볼까!
“...설마, 또 있어?”
비겁한 마누라의 얄궂은 표정이 영 심상치 않다.
“아직 많이 남았지. 바람둥이 남편이 밤에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둘에서 하나로 줄어들었어. 앞으로 혼자 자기 싫으면 아내에게 잘해줘야 할 거야.”
“맙소사...”
전력손실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굉장히 안 좋은 소식이잖아!
“계속 말해줘?”
“어.”
맞는 김에 계속 맞자!
“남편이 싸우는 사이에 졸업한 학생이 13명이나 돼. 옥좌에 앉은 채로 무력하게 13번이나 맥없이 죽었다는 소리야.”
“끙...”
“스마트폰을 보면 판타지아 공략집이 벌써 풀리기 시작했어. 그리고 졸업한 13명은 기존의 용사들보다 유별나게 강해서 13영웅이라고 불리는 있는 중이고.”
“어이가 없군.”
내가 더미를 관리했다면 졸업은 어림도 없었으리라.
그런 후배들이 운 좋게 졸업해서 기고만장하다는 사실에 살짝 짜증이 치밀었다.
“더욱 나쁜 소식.”
“허! 이보다 더?”
“판타지아 교육장은 남편의 고향별 외에도 여러 행성에서 입학생을 받아왔었어.”
“입학이 아니라 납치지.”
“응. 그러면 납치라고 할게. 판타지아 교육장은 납치할 인재가 고갈되면 다른 행성으로 표적을 바꾸는 식으로 쭉 운영해왔는데, 최근에 잇따른 운영 실책과 교장의 부재로 평판이 심각하게 악화했어. 남편의 표현대로, 외부에서 입학이 아닌 납치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지.”
“그러면 좋은 일 아닌가?”
교장이 지배하는 판타지아 교육장이 망해간다는 뜻이니까.
“여기가 예전처럼 고모만의 세계라면 그렇겠지. 남편의 집이 될 수도 있는데, 그냥 포기할 거야? 건물주가 될 기회인데?”
“아하!”
“멈춘 설명을 마저 할게. 평판이 떨어진 판타지아 교육장은 회복될 때까지 지금처럼 지구의 원주민만 납치할 거야. 기존에 작업하던 곳이라서 가장 만만하거든.”
“너무하네.”
“그리고 진짜 최악의 소식.”
“......”
“신(神)들이 판타지아 교육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
“그게 최악이라고?”
“음... 자신만의 완벽함을 추구한 끝에 신이 된 그들 중에는 굉장히 변덕스러운 괴짜가 많으니까. 온전한 힘을 갖춘 고모와 아빠가 제멋대로 날뛴다고 상상해봐.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수십 명씩 우르르.”
“그건... 확실히 위험하군.”
지구로 귀환해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문화시민의 삶을 꿈꾸던 내게 어째서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쏘시아. 아직도 남았냐?”
“이게 마지막이야.”
“말해봐.”
“남편이랑 고모가 치고받고 싸운 여파로 시스템의 69%가 망가졌어. 앞으로 버그와 오류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거야. 이젠 개발자인 나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어.”
“많이도 망가졌군.”
“둘 중 하나가 완전히 끝장날 기세로 싸웠으니까. 오히려 69%만 망가진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해.”
“...이제 끝?”
“응. 끝났어. 그러니 정서불안처럼 손가락 좀 꼼지락대지 마. 아까부터 자꾸 신경 쓰이잖아.”
“이건 내 마음이야.”
안 좋은 소식들.
나는 차분히 눈을 감고 상황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대단히 좋지 못하군.
상황이 이보다 더 나빠질 순 없을 것 같았다.
훌륭한 MAX급 남편님을 정서불안으로 몰던 쏘시아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이젠 좋은 소식이야!”
“읊어봐.”
꿈과 희망이 안 보이는 이 상황 속에 좋은 소식이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뭔지나 들어보자.
“정신분열을 일으킨 고모가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어떻게 알아?”
“판타지아 시스템 제어권이 내게 거의 다 넘어왔거든. 고모의 상태가 멀쩡했다면 절대 이렇게 되도록 놔둘 리 없지. 빈집털이라고 할까? 이젠 고모가 제정신을 차려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오...”
절로 감탄사를 내뱉던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판타지아 시스템 제어권을 가져왔다면 어째서 교장의 은신처 하나 찾지 못하는 건데?
“69%가 망가졌다고 했잖아.”
“아하!”
“하지만 이건 장담할 수 있어. 이젠 고모도 우리처럼 판타지아 교육장에 갇혔다는 것. 교실이 붕괴하며 분할된 고모의 더미가 대륙 어딘가에 숨어있을 거야.”
“보물찾기로군.”
희생만 잔뜩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비겁한 마누라의 설명을 들어보니 아직은 해볼 만한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그래. 운이 좋았다.
우주 회장님의 관심이 여전히 계속되는 중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만이 아니다.
▷종류: 종족
▶명칭: 퍼펙트 데몬
▶등급: 신화
▶신화1: 완벽한 용사다.
▶신화2: 완벽한 마왕이다.
▶특성1: ㈜우주의 후원을 받는다.
▶종족1: 완벽한 인간이다.
▶종족2: 완벽한 어둠이다.
결벽증처럼 완벽함에 집착하는 독특한 종족특성.
완벽하다는 오만한 선언이 어째선지 거북하지 않았다.
나는 오만할 자격이 있다고.
그런 기분이 들었다.
“신이니까.”
“시스템상으로?”
“아니. 정말로 신이야. 아빠의 선천적인 신격(神格)을 계승한 순간부터 남편은 신이었어. 분할돼서 약해지는 바람에 그동안 실감이 안 됐을 뿐이지.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신격이 하나 더 생겼어.”
“완벽한 인간 용사?”
“맞아.”
대답하는 쏘시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너, 뭐하냐?”
“비겁한 기둥서방인 줄 알았던 남편이 자수성가형이란 사실에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어.”
“흐음...”
이게 비겁한 마누라를 흥분시킬 만큼 대단한 건가?
잘 모르겠다.
“아빠와 고모처럼 자연에서 태어난 신들은 약해. 선천적으로 타고난 속성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고 휘둘리거든. 하지만 남편처럼 성장하면서 완벽해진 후천적인 신들은 달라. 그냥 강해. 어떤 완벽함을 추구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완벽함은 완벽함으로밖에 상대할 수 없어.”
“그게 뭔 말이야?”
“후천적인 신은 불완전한 존재에게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완벽해서?”
“응. 완벽해서.”
논리적으로 괴상한 개념이었다.
그 당사자가 됐음에도 실감이 되질 않았다.
“좋은 소식이 더 있어?”
“물론이지. 봐. 어머님이 어제 올리신 사진이야.”
“뭣?!”
나는 어째서 쏘시아의 손에 있는지 의문인 몰랑폰을 가로채듯 받아서 메시지를 살펴봤다.
⤷어머니: 아들. 기다려도 왜 답변이 없어? (오전 7:25)
⤷어머니: 어디 아프니? 많이 다쳤어? 엄마에게 말해봐. (오후 1:47)
⤷어머니: 아들. 죽고 싶어? (오전 10:53)
“......”
내가 오랫동안 답장을 안 보내서 대단히 화나신 상태였다.
그런데...
⤷나: 정말 죄송해요. 정말 괜찮은 운명의 여인을 발견해서 정신이 없었어요. (오후 1:29)
이런 느글느글한 답장을 보낸 ‘나’는 대체 누구일까?
⤷어머니: 며늘아기 말대로 정말 살아있었네. (오후 3:34)
⤷어머니: 아들. 엄마와 며늘아기도 잊을 만큼 그 아가씨가 그렇게 예뻐? (오후 3:36)
⤷나: 이 우주에서 두 번째로 예뻐요. (오후 3:37)
⤷어머니: 첫 번째는 누구? (오후 3:38)
⤷나: 당연히 엄마죠. (오후 3:39)
이 사칭범은 양심도 없나?
어머니가 왕년에 미인이셨던 건 틀림없지만, 우주에서 가장 예쁜 건 절대 아니다.
어쩜 이리도 뻔뻔할 수가!
⤷어머니: 우리 아들이 드디어 철들었네. 사랑해♥ (오후 3:40)
⤷어머니: 그런데 무슨 연애를 그렇게 오래 해? (오후 3:41)
⤷나: 최근에 결혼했어요. 제가 술김에 사고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요. (오후 3:43)
술김에 결혼했다고?!
어머니! 저 사칭범의 말을 절대로 믿지 마세요!
⤷어머니: 에휴! 사고 쳤으면 어쩔 수 없지. 그 아가씨 울리지 말고 똑바로 책임져. (오후 3:46)
⤷나: 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후 3:47)
⤷어머니: 감사는 무슨. 그런데 아들이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그 며늘아기 이름이 뭐니? (오후 3:49)
⤷나: 쏘시아에요. (오후 3:50)
이거, 설마...?
⤷어머니: 아들. 쏘시아에게 잘해줘야 해. (오후 3:51)
⤷나: 물론이죠. 혹시라도 나중에 제가 바람피우면 테니스라켓으로 힘껏 때려주세요. (오후 3:53)
⤷어머니: 그래. 우리 아들이 정말 철들었네. ^^ (오후 3:54)
⤷나: 감사합니다. (오후 3:55)
“쏘시아~~!”
“남편. 소리 지르지 말고 메시지를 마저 읽어봐.”
“너, 내 계정으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10년 동안 무심했던 아들에게 화난 어머님을 달래드렸지. 어때? 철들었다고 칭찬까지 받도록 내가 머리를 썼어. 대단하지?”
“이 비겁한...!”
“어때? 이제 좀 안심이 돼?”
“안심은 무슨! 내가 너 때문에 어머니에게... 음? 잠깐.”
어머니라고?
지구의 생명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더라도 인간의 수명을 수만 년씩 연장할 순 없다.
그런데 어머니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고?
마저 읽었다.
⤷어머니: 아들. 네 동생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이야. 참고로 사진 구석에 선 이분이 교육부 장관이래. (오전 9:54)
⤷어머니: 이건 2학년 여름방학 때 바닷가에 찍은 사진. 여행 가는 곳마다 아가씨들이 귀엽다고 난리야. (오전 9:58)
...
어머니의 주석이 붙은 가족사진이 줄줄이 보였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사진마다 빠지지 않는 둘째 놈이 성장할수록 어머니와 아버지는 역으로 젊어지시는 것 같았으니까.
쏘시아가 해석하듯 말했다.
“100년밖에 안 흘렀어.”
“허! 부모님이 흡혈귀라도 되신 건가...?”
대낮에 찍은 사진으로 봐서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어찌 된 걸까?
“아! 오해한 모양이네. 판타지아 차원이 100년이란 얘기였어. 지구는 10년쯤 흘렀겠지.”
“뭐?! 겨우 10년이라고?!”
교장의 수작으로 수천 년쯤 흘렀을 줄 알았거늘!
쏘시아가 얄밉게 웃으며 답했다.
“희생이 크니까.”
“누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 남편이 시간을 잃는 만큼 고모도 잃게 되어있어. 만약, 교장이 오랫동안 교단(敎壇)을 비우면 어떻게 될까?”
“아!”
“완벽한 용사님은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었지만, 최초의 천사는 포기하지 못한 거야.”
“좋은 소식이네.”
가족이 아직 살아있다.
내가 ‘완벽한 악마’로 격상(格上)된 일보다 이 소식이 더욱 기뻤다.
둘째 놈 빼고!
표정이 애늙은이처럼 죽어있다. 귀여움은 눈곱만큼도 안 보였다.
저런 녀석이 뭐가 좋다고 어머니는 감싸시는지 모르겠다.
“좋은 소식은 이걸로 끝.”
“충분해.”
기운을 차린 나는 마왕의 옥좌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모든 걸 희생할 각오였는데, 아직 잃은 건 없었다.
그렇다.
아직은 아니다.
찰떡도, 쑥떡도 아직은.
“찾으러 가게?”
“당연히.”
나와 교장의 숨바꼭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다급: 강한수 생도님! 아주 중요한 소식이 있어요!
음? 교생 아가씨도 소식이야? 좋은 거? 나쁜 거?
이 완벽한 용사님이 들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