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21회차] 마왕의 반격
▷종족: 퍼스트 울트라 휴먼
▷레벨: 1
▶직업: 용자(전원=1레벨)
▷스킬: 사랑GGG 우정GG
희망GG 신성GG ■■G…
▷상태: 강화, 축복, 기적, 용기,
희망, 성룡, 사랑, 우정,
협동, 고양, 격분, 강림,
보호, 패기, 증폭, 성물,
기백, 성령, 불사, 각성,
보정, 지원, 도핑, 초월,
응원, 호부, 정력, 책임,
소망, 가호, 구원…
최초의 용사가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릴 당시의 능력치.
터무니없었다.
심지어 눈앞의 흑화 선배는 생활기록부가 만들어낸 ‘가짜’였으니까. 그런데도 이만한 능력치라니?
물론, 내 상대는 아니었다.
퍼어엉-!
현실에서 장인어른은 용자의 힘과 블랙박스의 효과로 약해져서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완벽한 마왕 겸 용사인 내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느껴진다.
【어둠】
【영웅】
완벽함끼리 충돌하며 상쇄된다.
장인어른에게 물려받은 ‘마왕의 힘’은 암흑물질로 이루어진 공간을 관장한다.
여기에 약점은 없다.
살아가는 공간을 주무르는데 무슨 수로 대항한단 말인가?
그런데 실제로 이루어졌다.
쩌적-!
블랙박스로 짐작되는 ‘영웅의 힘’이 그것을 해냈다.
“타핫!”
흑화 선배는 온몸을 압살할 기세로 짓누르는 암흑물질의 공간에 저항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현상.
완벽한 신이 직접 행사하는 게 아니라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악마 쏘시아가 구축한 시스템 능력치는 첫 번째 악마를 노리고 개발됐다.
친아버지를 쓰러트릴 무기!
이젠 그 무기가 훌륭한 남편님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꺼져.”
눈앞의 흑화 선배가 ‘진짜’였다면 상황이 또 달라졌겠지만, 생활기록부가 만든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내 어둠으로 만들어졌다.
저딴 거에 패배할 리 없잖아?
“큭! 신이여!”
그랬더니 가짜 선배가 새로운 패를 꺼내 들었다.
【영광】
빛이 그를 감싸더니 내 공간으로 가둘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시간 가속!
교장의 힘이었다.
이 또한 당사자가 아니기에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 불완전성을 능력치로 보완하고 있었다.
“과연...”
장인어른이 어떤 식으로 패배했는지 짐작됐다.
상대는 가짜 선배지만, 판타지 시스템에 힘을 빼앗긴 나도 불완전하긴 마찬가지.
조건은 같았다.
“마왕 페도나르! 이걸로 끝이다~!”
끝은 무슨.
나는 장인어른처럼 패배하리란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척.
앞으로 한걸음 전진하며 오른손을 쭉 뻗었다.
선배에게 말해주리라.
이 후배가 얼마나 완벽한지를.
“내가 용사다.”
위기에 빠진 이웃의 척추를 올바르게 잡아주는 용사님이다.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척추를 포기하지 않는 용사님이다.
악(惡)을 옹호한다면 척추라도 용서하지 않는 용사님이다.
사랑과 우정의 척추를 희생하길 망설이지 않는 용사님이다.
척추는... 용사다.
【척추】
세상의 모든 척추가 내 앞에 바짝 접히며 경배하리라.
뿅!
마누라의 비겁한 골반을 닮은 완벽한 무기가 내 오른손에 형성됐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척척척!
내가 그것을 손잡이처럼 움켜쥐자마자 칼날이 솟구쳤다.
경추(목뼈) 7개, 흉추(등뼈) 12개, 요추(허리뼈) 5개, 천추(엉치뼈) 5개, 미추(꼬리뼈) 5개.
총 26개의 척추로 이루어진 칼날이 아름답게 흐느적거렸다.
“멋지군.”
이것이 나의 새로운 성검.
방대한 힘이 느껴진...
“남편! 그건 성검이 아니라 척추와 골반이잖아!”
얄팍한 편견에 사로잡힌 쏘시아의 지적은 무시하자.
빠각-!
흑화 선배의 조잡한 성검과 완벽한 나의 성검이 충돌했다.
둘 중 어느 한쪽이 밀리거나 파괴되진 않았다.
그러나.
“크허어어억~?!”
후속타를 준비하던 흑화 선배가 왼손으로 자기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처절한 절규를 내질렀다.
그럴 수밖에.
삐꺽.
상반신을 지탱해주는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가 어긋났으니까.
척추를 다친 선배는 제자리에 서는 것조차 힘겨워했다.
나의 승리다.
번쩍!
그러나 마무리하진 못했다.
빛에 휩싸인 흑화 선배가 공간이동으로 도망친 탓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
이 일대의 공간은 내 지배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외는 늘 있는 법.
“쯧. 보험을 들어뒀었군.”
“미안.”
쏘시아가 대뜸 사과부터 했다.
저 공간이동은 교장과 그녀의 합작품이기 때문이다.
흑화 선배가 마왕 페도나르 토벌에 실패했을 때, 전력을 조금이라도 보전하기 위한 생명보험.
그것까지 재구현된 듯했다.
“뭐, 상관없겠지.”
척추를 다친 ‘가짜 선배’가 재기(再起)해서 패자부활전을 시도할 가능성은 현저하게 낮으니까.
나는 후환을 남기지 않는다.
그 의지가 새로운 힘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내 성검에 당한 척추는 완벽한 존재 외에는 치료할 수 없다.
절대로.
“남편의 두 번째 신격은 너무 비겁한 것 같아. 맞붙기만 해도 척추를 다친다니...”
“하하하! 쏘시아. 앞으로 이 남편님에게 잘해라. 허리디스크로 고생하기 싫으면.”
“폭군이네!”
“마음대로 지껄여라.”
이젠 탈주한 장인어른도 나를 막을 수 없다!
그때였다.
몰랑?
쏘시아의 양팔에 안겨있던 마스터 몰랑께서 좌우로 몰랑하셨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에 휩싸였다.
깨달았기 때문이다.
척추가 없다.
내 힘은 이 위대한 존재에게 티끌만큼의 피해도 줄 수 없다는 의미.
“아아...!”
전율이 내 척추를 휘감았다.
내가 오만했다.
조금 강해졌다고 우쭐대다니!
진정한 절대강자를 앞에 놓고 완벽함을 논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척추 깊숙이 반성하고 겸손한 용사님으로 빠르게 복귀했다.
“...남편. 바보 같아.”
“히히히!”
몰랑몰랑.
오늘만큼은 마음껏 비웃어라! 내일부터는 용서하지 않겠지만!
아! 마스터 몰랑은 언제든 이 제자를 비웃으셔도 좋습니다.
▶흐뭇: 초심을 잃지 않는 강한수 생도님이 멋지다고 생각해요.
고마워! 나도 교생 아가씨가 예쁘다고 생각해!
“그래서 저건 뭐였지?”
나는 폐허로 변한 마왕의 성을 둘러보며 쏘시아에게 질문했다.
최초의 용사.
이미 생활기록부에서 말소된 그가 이곳에 등장한 이유를 모르겠다.
비겁한 마누라가 답했다.
“말해줬잖아.”
“언제? 뭘?”
“판타지아 시스템의 69%가 망가졌다고. 앞으로 저런 버그가 자주 등장할 거야.”
“...돌겠군.”
감찰단이 곧 오는데 판타지아 차원은 버그투성이란다.
이러다가 진짜 폐교되는 거 아니야?
*
완벽한 용사님은 매연으로 숨 막히는 고향별에 하루빨리 돌아가서 둘째 놈을 밀어내고, 어머니의 테니스라켓에 덜 맞고 싶다.
그렇기에 나를 붙잡아둔 판타지아 차원이 너무나 밉지만, 폐교는 별개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판타지아 교육장이 폐교돼도 우리는 못 빠져나가.”
“왜?”
“폐교된다고 해서 학교 건물을 허물진 않잖아. 마왕인 남편은 건물의 중추고.”
“내가 부수겠다면?”
“하아... 잘 들어. 건물은 용도에 따라 이름이 결정되는 건 알지? 경찰서, 소방서, 왕궁, 사무실, 침실, 유치원 등등.”
“그런데?”
“판타지아 시스템도 똑같아. 고모와 내가 교육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교육장으로 불릴 뿐이야. 폐교돼도 시스템은 사라지지 않아.”
“그렇군...”
좋지 않은 소식이다.
“게다가 분할된 상태로 판타지아 차원을 부숴버리면 거기에 살던 생명체들은 전부 소멸해버려. 네가 판타지아 차원에서 검희랑 사고 쳐서 생긴 아들도 포함해서.”
“......”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판타지아 행성이 파괴되면 살던 원주민들도 몰살이었다.
아주 간단한 이치.
지금까지는 행성이 파괴돼도 회귀하면 복구됐기에 무심코 넘어갔던 문제였다.
하지만 시스템이 차원과 함께 파괴되면 더는 회귀할 수 없다.
진정한 죽음이다.
“남편. 이제 이해됐어?”
“하나만 더.”
“뭔데?”
“그러면 폐교되든 아니든 나는 못 빠져나가잖아. 막으려고 내가 애쓸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88%.”
“뭐가 88%야?”
“남편이 고모를 박살 낸 덕분에 확보할 수 있었던 경영권. 시스템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판타지아 차원은 우리의 소유가 됐을걸? 그때는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어.”
“아...”
“하지만 몰랑소프트가 경영권을 침해하면 얘기가 달라져.”
“...그렇군.”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때는 단순한 협력업체로 끝나지 않아. 몰랑소프트의 기술력과 자금력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하면 우리는 판타지아 경영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될 테니까. 남편은 마기를 제공하는 노예로 전락할 테고, 고모 때보다 훨씬 힘겨운 싸움이 되겠지.”
“최악이네.”
내가 판타지아 교육장이랑 공동운명체임을 알게 됐다.
가업을 떠넘기고 튄 장인어른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천벌 받았을 것이다.
“내 아빠가 좀 그래.”
“너는 아니고?”
“남편. 긍정적으로 생각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아름다운 여성을 날로 먹었잖아.”
“조카야~ 조카야~”
“...이모님은 또 왜요? 추하다고 트집 잡힐 부분은...”
“설명충도 귀여워~”
“아, 아니거든요!”
나는 정신을 바짝 곤두세웠다.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기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덤으로, 나를 200년 동안 못살게 괴롭힌 교장과 교직원들에게 복리로 복수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일에 집중하자.
“쏘시아.”
“말해.”
“파괴된 마왕의 성을 복구할 수 있겠어?”
“간단하지.”
놀리는 마약정령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진 마누라가 오른손에 쥔 마법봉을 까딱거리자마자 급격한 변화가 찾아왔다.
쿠구구구-
폐허로 변한 성터에 예전보다 훨씬 웅장한 성이...
“야. 이건 탑이잖아?”
창문 하나 없는 원기둥 오벨리스크가 건설됐다.
쏘시아가 설명했다.
“요즘 소설의 용사들은 100층짜리 수련의 탑을 오르는 게 대세래. 우리도 유행에 뒤처질 순 없잖아? 안 그래도 어머님께 촌스럽다고...”
“오케이! 탑으로 변경!”
촌스러운 FFF급 마왕이라고 불리는 것만은 사양이다!
“잘 생각했어. 탑의 내부구조는 요즘 읽는 로맨스 소설을 참고해서 1층부터 100층까지 반복 없이 다양하게 구성해놨으니 걱정하지 마.”
“로맨스...?”
벌써 걱정된다만!
“조금 전에 버그 용사처럼 강하면 탑을 오르지 않고 외부에서 파괴하겠지만, 그 실력이면 애초에 너 빼고는 막을 수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을 거야.”
전설의 군주: 야스호(20층)
배신의 군주: 한죠(40층)
죽음의 군주: 실바라스(60층)
강철의 군주: 2D(80층)
쏘시아는 탑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마법봉을 부지런히 휘둘렀다.
뿅! 척! 쿵! 퐁!
탑의 주변이 숲과 호수, 늪지대 등으로 빠르게 뒤덮였다.
기존에 인류가 세운 요새와 도시들은 유령과 언데드가 출몰하는 으스스한 던전으로 변모했다.
즐기는 것 같은데?
“조카가 즐기고 있는 게 맞다, 마약용사. 이곳은 그녀가 태어나고 자란 행성이니까. 자기 엄마를 닮아서 행성 꾸미는 걸 좋아해. 오랜만에 하게 돼서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다. 히히히!”
“장모님...?”
“먼 옛날에 죽었다. 이웃 차원에서 넘어온 사악한 모험가들의 손에.”
“...그렇군.”
어째서 쏘시아가 시스템 여신에게 ‘창조신 판타지시아’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지형지물이 뚝딱 창초됐다.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채워 넣는 것 같지만, 조금만 살펴봐도 어색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게다가 저 모습은 실로...
“...아름답네.”
진심으로 그렇게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조카가?”
“판타지 세계가.”
쏘시아는 나와 버그 선배의 전투로 허허벌판이 된 탑 주변을 야생의 밀림으로 바꿨다.
그 뒤에는 용사의 모험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던전을 곳곳에 배치했다.
동굴, 무덤, 신전, 성채, 유적, 폐허, 사원, 지하, 둥지...
몬스터와 함정은 기본이다.
▶감탄: 대선배님들께 종종 얘기를 듣긴 했지만, 고문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너무 겸손한 거 아니야?
교생 아가씨의 도움과 응원이 없었다면 나는 완벽한 용사님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끄: 제가 뭘요. 강한수 생도님이 뛰어나신 거죠.
나는 뛰어나지 않아.
마스터 몰랑이 몰랑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못 이기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노력할 수밖에!
“저기, 바보 남편. 어디 가게?”
“라누벨 잡으러.”
용사를 납치하기 전에 납치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