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21회차] 머리 위!
아들 크리스가 3살짜리 귀여운 황제였던 나의 관심을 받은 검희의 자궁에서 태어난 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 뒤는?
세상 밖으로 나온 아들은 온전한 영혼으로 독립했고, 더는 모태(母胎)가 필요하지 않게 됐다.
이때부터 상황이 오묘해진다.
개발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분할된 영혼끼리 결합해서 낳은 생명은 모래성이나 다름없어서 존재를 유지할 수 없어. 하지만 용사처럼 완전한 영혼이 관여하면 얘기가 달라.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풀이하자면, 정자와 난자 중 하나만이라도 온전하면 완벽한 영혼이 태어나.”
“안 물어봤는데.”
“설명하라며!”
“나는 4차 교육과정 때처럼 검희가 여전히 크리스의 친모란 설정인지 봐달라는 거였어.”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꿈속에서 만난 너랑 해서 임신한 걸 제외하면 생물학적인 개연성은 확실하게 맞췄으니까.”
“그렇군.”
침입자를 앞질러서 목적지에 도착한 나는 고도를 낮췄다.
이곳은 공작Q의 영지.
마법이 발달한 북대륙에서 드물게 검술로 흥한 귀족 가문이다.
...라고 많이들 착각하는데, 공작Q의 가전검술(家傳劍術)은 지팡이 대신 칼을 쓰는 대량살상마법이나 다름없다.
섬세한 검술 대신 파괴적인 검기로 적들을 쓸어버리니까.
그래서 군신의 황금색 골렘이 출현하기 전까지 공작Q는 북대륙 최강의 가문이었다.
5차 교육과정에서도 그 설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블린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든 평화로운 영지.
그렇다고 몬스터 서식지가 없는 건 아니다.
“타핫!”
“Goooob~?!”
“얍!”
“Goob...?!”
영지 곳곳에 기사지망생들이 경비병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그들은 몬스터가 보이는 족족 사냥하면서 레벨을 올렸다. 하지만 몬스터는 부족하고 기사지망생은 발에 치일 만큼 많았다.
그 결과,
“저 오크는 내 거야!”
“헛소리! 내가 먼저 발견했어!”
“하! 내가 침 발라뒀거든?”
“KuKu~~?!”
경쟁이 붙으면서 몬스터가 생성되자마자 살해되는 일도 허다했다.
북대륙에서 오직 공작Q 영지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광경.
귀족, 평민, 노예 차별하지 않고 재능과 근성만 있으면 누구에게든 검술을 가르치고 기사로 임명하는 아카데미의 방침 때문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기사를 육성하는 영지는 찾아보면 꽤 된다.
하지만 공작Q처럼 유의미한 성과를 내는 곳은 매우 드물다.
차츰차츰 소문이 났고, 현재는 다른 대륙에서 유학을 올 만큼 유명한 곳이 됐다.
그 부작용으로...
“썩 비켜라!”
“길을 열어라!”
“왕자님께서 행차하신다!”
“천민들을 치워.”
유명한 만큼 이상한 놈들도 잔뜩 몰려드는데, 그 대부분이 고위귀족과 왕족의 미혼남이다.
그들은 공작Q의 기사가 되려고 이 영지를 방문한 게 아니다.
이곳의 두 번째 명물.
검술시합이다.
“이건 여전히 안 바뀌었네.”
영주의 성 옆에 지어진 아카데미의 검술훈련장의 관중석에는 건강한 미혼남들로 가득했다.
대련 전에 탐색하는 것이다.
누구를?
“얍!”
“커어어억~?!”
푸른 광체에 휩싸인 청년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훈련장 흙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잘 제련된 갑옷은 알루미늄 깡통처럼 일그러지고,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망토는 걸레짝이 돼버렸다.
그가 약한 게 아니다.
상대하는 여성이 지나치게 강했을 뿐이다.
검희(劍姬).
혼기가 차자마자 자기보다 강한 남성이랑 결혼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북대륙에서 검술로 그녀를 당해낼 자는 없으며, 순수한 공격력은 용사의 동료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중거리 딜러’다.
검사인데도 중거리인 이유?
번쩍- 콰과광!
검희의 칼끝에서 용의 발톱처럼 솟구친 검기의 사정권 탓이다.
▷종족: 휴먼
▷레벨: 999+
▷직업: 기사(충절→불굴↑)
▷스킬: 검기ZZ 불굴ZZ 매력Z
▷상태: 지루
검사와 기사들의 기본 스킬이나 다름없는 ‘검술’이 상위권 5개에 없는 기형적인 능력치.
그래도 검희는 최강이다.
그녀의 검기를 뚫고 그럴싸한 검술을 펼칠 수 있는 검사와 기사가 없기 때문이다.
검왕 알렉스와 용병왕 정도?
검희는 일반인이 탐낼 수 있는 여자가 아니다.
다만,
“진짜 뻔뻔하네.”
유전자 MAX급 아들 딸린 유부녀이면서 아닌 척하다니?
자기 부주의로 알몸을 보여놓고 칼부림하던 여자답게 얼굴에 두꺼운 철면피를 깔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검희가 유부녀란 사실을 모른다.
“허리가 쑤셔서 힘들겠군.”
“오늘은 컨디션이... 흠흠.”
“내년에 다시 올까?”
“...아차! 약속이 있었지!”
검희의 골반을 노리고 온 미혼남들이 줄줄이 퇴장했다.
방금까지 멀쩡하게 생겼던 경쟁자가 찌그러진 깡통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척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스르릉-
칼을 검집에 넣은 검희는 대수롭지 않게 몸을 돌렸다.
겉모습은 20대 초반.
하지만 초절정 미소년의 친모(親母)임을 잊어선 안 된다.
“크리스 님~!”
“사랑해요! 크리스 님!”
“저를 가져요! 흑흑!”
“이쪽 좀 봐줘! 크리스!”
“크리스 오빠~!”
검술 아카데미 수강생들이랑 멀리서 관전 중이던 아들 크리스가 검희에게 수건을 건냈다.
“고마워, 크리스.”
“별말씀을요.”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이좋은 오누이 같다.
애인으로 오해하기에는 닮은 구석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척추는 확실히 나를 쏙 빼닮았군.
둘 다 건강해 보였다.
“비겁한 남편.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보호해야지. 죽거나 생포되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탁.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둘을 멀찍이서 몰래 지켜주는 방법도 있지만, 상대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는 확실하게 보호하는 편이 낫다.
팟! 팟!
검희와 크리스의 발밑에 시커먼 어둠의 공간이 형성됐다.
“꺅?!”
“앗?!”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날개조차 없던 둘은 ‘마신의 창고’로 떨어졌다.
저곳이라면 안전하다.
“...저기, 보호와 감금을 혼동한 거 아니야?”
“부러워? 너도 보호해줄까? 캡틴 판타지의 입속에.”
“아, 아니야! 호호호! 그것만은 제발 참아줘!”
“집중해. 놈이 왔다.”
이젠 쏘시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빠른 속도로 공간을 주파할 수 있는 생명체는 흔치 않으니까.
탐색을 위한 대화는 불필요.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망토처럼 펼치며 날아오른 후, 완벽한 성검을 전방으로 쭉 뻗었다.
네놈의 척추를 한번 볼까?
그런데...
나는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이상함을 느꼈다. 그리고 정체를 두 눈과 귀로 확인한 순간, 진심으로 놀라고 말았다.
솨아아앙-
요란한 로켓 추진력 소리.
그리고 가오리처럼 납작하게 생긴 검은색 비행체 위에 사람이 두 발로 서 있었다.
저건 뭐야?
“우주마(宇宙馬)야.”
여전히 내 품에 안겨있던 비겁한 마누라 말했다.
“우주마?”
“우주에는 타는 말. 대기권에선 공기저항 때문에 느리지만, 우주에서는 진짜 빨라. 그리고 신의 권능으로 탄생한 생명체라서 튼튼해. 비겁한 남편이 강한 건 틀림없지만, 이번만큼은 조종사 쪽을 노리는 편이 나을 거야.”
“...그런 것 같네.”
공간에 가두려고 했지만, 저 가오리는 종잇장을 찢듯이 아무렇지 않게 돌파해버렸다.
불완전한 마왕의 힘으로 쉽게 쓰러트릴 수 없는 상대.
그렇다면,
팟!
상대를 공간에 가두길 포기하고 내가 공간을 접으며 접근했다.
“마왕?”
“용사다.”
직업이 ‘탈마’인 나는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직업을 바꿀 수 있다.
지금은 완벽한 용사.
직업에 크게 구애받지 않지만, 악(惡)을 무찌르는 MAX급 마왕님은 모양새가 안 나잖는가?
“...내가 받은 정보랑 다른데.”
“누구에게 받았는데?”
“알 필요 없어.”
“라누벨?”
“말 많은 남자는 질색인데.”
“......”
침입자의 유치한 도발에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의 올곧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머! 조용해졌네?”
“그러는 네 골반은 시끄럽네.”
“뭐, 뭐어?!”
나의 도발에 넘어간 침입자가 크게 당황했다.
이 틈에 거리를 좁혀서 골반을 뽑아주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가오리의 눈치가 100단이었다.
미꾸라지처럼 잘 도망친다.
“쉽지 않을 거야. 우주마는 회피 하나는 발군이니까. 광속으로 날면서 우주의 미세한 먼지들을 완벽하게 피해낼 정도... 꺅?!”
나는 눈앞의 악당을 처단하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무거운 쏘시아를 허공에 버렸다.
나란 용사는 정말...
“마약용사! 나는 조카보다 훨씬 가볍다!”
“이모님! 저도 안 무겁거든요! 저 쓰레기 용사가...!”
“조카야! 추하다!”
“아아, 진짜!”
비겁한 마누라를 희생해서 추진력을 얻는 완벽한 용사님.
가오리에 탄 침입자를 추적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찰했다.
외모는 30대 중반의 농염함을 뽐내는 미녀였다.
엉덩뼈까지 내려온 은색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랑 대조되는 갈색 피부가 인상적이다.
“침입자. 너도 용사냐?”
“아니.”
“그런데 복장이 왜 그따위냐?”
“내 복장이 어때서?”
“모르면 됐어.”
침입자는 두꺼운 강철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튼실한 허벅지와 팔뚝, 잘록한 허리, 깊게 파인 가슴께를 훤히 노출하고 있었다.
방어하다가 만 느낌?
저럴 거면 안 입는 것만 못하다고 조언해주고 싶다.
그런데...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통역A 기마C
▷상태: 양호
이 침입자의 능력치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기본적인 구성에 스킬만 ‘기마C’가 추가됐는데, 그건 여기까지 저 시커먼 가오리를 타고 오면서 생긴 것으로 짐작됐다.
능력치랑 무관한 존재.
판타지 세계에 납치된 적 없는 평범한 지구인이랑 비슷했다.
그러나 나를 보자마자 ‘마왕’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은 아니다.
척척.
나는 완벽한 성검의 칼날을 곧게 세웠다.
의문은 잠시 접어두자. 침입자의 얄팍한 척추를 무력화한 후에 천천히 물어보면 되니까.
“흉흉하게 생긴 무기네.”
“성검이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비웃어줄 생각이었는데, 그 신성한 힘, 아무래도 진짜인 것 같네. 그렇다면...”
계속 나랑 거리를 벌리려고 애쓰던 침입자가 허공을 향해 양손을 둥글게 휘저었다.
쿠구구구...
그러자 방금까지 맑았던 하늘에 시커먼 먹구름이 형성됐다.
이건 마법이 아니다.
【벼락】
신의 힘이었다.
1레벨로 어떻게 검희와 크리스를 노리는지 아까부터 의문이었는데, 믿는 구석이 있었다.
번쩍-!
벼락이 예고도 없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둠】
그리고 어둠에 삼켜졌다.
내가 회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른 특수한 벼락임은 틀림없지만, 위협적이진 않았다.
“이게 끝인가?”
“그럴 리가.”
철컥.
방금까지 비무장이었던 침입자가 들고 있는 저 쇳덩어리는 기관총이 틀림없었다.
판타지에 재래식 무기라니!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외쳤다.
“쏘시아!”
두두두두두-
내가 비겁한 마누라를 부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침입자의 기관총 총구가 불을 뿜었다.
무작위 포격.
나는 그 모든 공격을 무시하고 거리를 좁혔다.
“헛...!”
“왜?”
회피의 달인 같았던 가오리도 조종사가 가만히 있고 날뛰면 도망치기 힘든 듯했다.
푹- 콰앙!
기관총의 총구에 내 왼손 주먹을 박아넣고, 오른손은 침입자의 경악으로 벌어진 입에 쑤셔 넣었다.
“어, 어째에서어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
내가 무작위 포격을 막지 않고 추적에만 전념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왜 모르지?
희생은 용사의 교양이거늘.
“웃차.”
온순해진 가오리에 올라탄 나는 기관총을 부순 왼손으로 침입자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부르르.
방금까지의 패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침입자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너, 너어느으은...”
“나는 말 많은 여자는 질색이야.”
“이 개새-!”
우득.
우리의 대화는 이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때,
“남편! 위...!”
【벼락】
우르르 쾅쾅-!
깔끔히 무시했던 번개가 공간을 꿰뚫고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위가 뭐?”
이것은 전기맛 용사로군!
“...아무것도 아니야. 응. 하던 불륜 계속해.”
“조카야~”
“이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착한 아내로서 위험하다고 경고해준 것뿐이에요. 그런데 저 남편 놈이 비겁하게 튼튼해서 멀쩡...”
“추하다!”
“정말로 아니라니까요!”
“우히히히!”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은 말 많은 악당을 생포했다!
“...아닌가?”
방금 입수한 외국산 전기매트가 과전류로 터진 것 같다.
아씨! 110V면 110V라고 써두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