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21회차] 우리의 만남은~
“저 애늙은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려나...”
현자를 처리하는 건 간단하다.
내가 실수 한두 번만 하면 5차 교육과정에서 현자를 영구퇴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용사로 모험하는 중이 아니라, 후배들을 위한 모험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자는 용사의 동료 후보.
몰랑소프트에서 파견 나오는 채점관들이 바라는 사랑과 우정을 배우고, 전투능력을 효율적으로 올릴 수 있는 교육환경을 꾸며야 한다.
현재까지는 순조롭다.
“남편. 어디가 순조로운데? 멀쩡히 잘 굴러가던 검희의 결혼 이벤트를 지워버렸잖아.”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처리해뒀으니까. 나중에 와보면 깜짝 놀랄걸?”
문제는 지금부터다.
용사가 타락한 현자의 말을 믿고 종결자 섹스피어랑 대립각을 세우면 그날로 모험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는 내 장인어른이랑 다르다.
용사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부하를 다단계로 보내지 않고, 직접 나서기 때문이다.
아니, 직접이란 표현은 맞지 않는다.
우주에 띄워놓은 군사위성에서 용사의 머리 위로 직접타격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꿈도 희망도 없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확실히 심각하네. 하지만 이렇게 상황을 정리했다는 건, 해결책도 준비가 끝났다고 봐도 되려나?”
“당연하지.”
안 그래도 용사(학생)가 쓰러트릴 적(교보재)이 부족하던 참이다.
기존의 5대 재앙은 5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면서 용어 자체가 사라져버렸으니까.
북대륙도 원래는 설녀를 삼킨 빙룡이 변질하면서 ‘서리여왕 엘쉬’가 되지만, 못 먹고 완전히 엉뚱한 존재가 돼버렸다.
그러니 용사의 앞을 가로막을 새로운 적이 필요하다.
타락한 현자.
결혼하지 못한 것도 서러운데, 대마법사로 인정받지도 못해서 폭주해버린 비운의 마법사란 설정이다.
“그럴싸하네.”
“내가 MAX급 용사야.”
판타지아 차원에서 선동과 날조로 나를 따라올 자가 없다.
사람을 학살하고 즐거워하는 동료들을 변호한 적이 셀 수 없이 많으며, 정략혼과 약혼자가 싫다고 가출한 철부지 공주와 공녀를 설득해서 전쟁을 막은 경력도 화려하다.
그리고 또... 왜?
“어떻게 설득했는지 궁금해서. 들려오는 소문이 매우 안 좋은 난봉꾼 약혼자를 우수한 수컷으로 포장해서 결혼시킨 거 아니야?”
“그럴 리가.”
내 2회차를 돌이켜보면 알겠지만, 나는 남녀의 수준이 안 맞아서 불행해질 결혼은 주선하지 않는다.
음양의 조화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힘든 결혼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뭐가 힘든데?”
“수시로 골반에 얘기해줘도 믿질 않는 아내 때문에 고생이지. 내가 비겁한 악마가 독점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과분한 MAX급 남편인 건 맞지만, 그래도 너 하나로 만족하는데 말이야.”
“거짓말.”
“이 악마가 또 의심하네.”
“나는 두 번째야. 이건 우주가 정한 섭리. 남편에게는 분명히 나보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쏘시아의 논리는 잘 알겠다.
그녀는 두 번째 악마.
뭐든지 두 번째이기 때문에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해주겠다.
“쏘시아. 시어머니를 질투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추하다! 추한 조카야! 남편에게 불효자가 되라고 강요하는 내 조카는 너무 추하다!”
최초의 정령이 추한 조카를 편들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평가했다.
쏘시아가 당황했다.
“어머님?!”
“내 어머니도 여자야. 틀렸어?”
“......”
정의로운 MAX급 남편님의 완벽한 논리에 반박하지 못한 마누라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아직도 할 말 있어?”
“응. 내가 지금까지 생각을 잘못했어. 두 번째란 저주에 얽매여서 너무 극단적으로, 부정적으로만 세상을 봐왔네. 어머님이 첫 번째가 맞는 것 같아! 남편에게 어머님 얘기를 귀 따갑게 들어왔으면서도, 지금까지 남편을 의심해왔네. 돌이켜보니 정말 바보 같아.”
이 비겁한 악마가 남편님을 비겁한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도저히 밀칠 수 없는 분위기.
그녀는 중요한 업무 중인 MAX급 남편님의 오른손을 자신의 치골로 유도하는 대범함마저 보였다.
“...너, 뭐하냐?”
“태어나서 처음으로 첫 번째가 된 기분을 만끽 중이야.”
“알겠으니 좀 떨어져. 일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
“후후! 가장 사랑하는 아내라서?”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논외로 친다면, 자연스럽게 쏘시아가 첫 번째가 된다.
두 번째이지만 첫 번째.
쏘시아의 눈동자에서 집착을 넘어선 광기마저 엿보였다.
“이거, 중증이네.”
괜히 말해준 것 같다.
“나를 너무나 사랑하는 팔불출 남편! 일에 치여서 나를 볼 시간이 부족해서 그동안 힘들었지? 그런 남편을 위해 선동과 날조를 대신해줄게! 아!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첫 번째 아내에게 이 정도 내조(內助)는 기본이니까!”
“...그래.”
한껏 고양된 쏘시아를 말리긴 힘들 것 같았다.
내 머리카락 숲에 숨은 최초의 정령도 공감하는 듯했다.
“마약용사! 귀여운 조카가 살짝 무서워졌다!”
“뭐... 일단은 지켜보자고.”
궁금했다.
첫 번째 아내님은 어떻게 선동과 날조를 하겠다는 걸까?
*
“신탁이 내려왔다!”
“창조신 판타지시아라니!”
“오! 맙소사! 신이시여...”
“세상에 이런 일이!”
비겁한 마누라의 수법은 내 예상대로 매우 비겁하다.
그녀는 ‘창조신 판타지시아’라는 또 하나의 신분을 이용해서 북대륙의 신전들에 신탁을 내렸다.
그 내용은?
“현자가 타락했다!”
“현자는 사기꾼이야!”
“현자를 몰아내자!”
쏘시아는 뚜렷한 증거나 증인을 우매한 판타지 원주민들에게 제시하진 않았지만, 그녀의 창조신이란 직함은 법과 논리 위에 있었다.
더 무엇이 필요한가?
신께서 그리 말씀하셨는데.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현자를 끌어내렸다. 여기에 걸리면 용사도 답이 없지 않을까?
북대륙의 대중종교가 몰랑교였기에 그나마 파급력이 낮은 것이다.
아니었다면 지금쯤 모든 나라가 부모님의 원수 대하듯이 현자를 때려잡기 위해 달려들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현자가 발 뻗고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 이게 대체...!”
마법으로 마탑의 입구를 잠그고 벽을 단단하게 보강한 채 농성에 들어간 현자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어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창조신 판타지시아.
딱히 원한도 없는 절대적인 신이 자신을 콕 지목해서 ‘나쁜 놈!’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스킬 업보를 단숨에 SSS급까지 찍어버린 셈!
현자가 이유를 알았다면 더욱 기가 막혔을 것이다.
“남편. 데이트할 시간 되지?”
“...하루쯤은?”
“후후! 가자!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온종일 놀아줄게!”
“너, 아주 기고만장해졌다?”
“첫 번째는 그래도 돼! 그리고 나는 첫 번째지!”
“......”
숫총각인 현자에게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기고만장해진 마누라가 남편의 어떤 주문이든 다 들어준 괜찮은 하루였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반짝: 쏘시아 고문님은 정말 대범하신 것 같아요. 저라면 아무리 사랑하는 남자가 부탁해도 부끄러워서 절대 못 했을 거예요. 그중에서도 그거랑 그거는 정말...
봤지? 사랑의 힘이 이렇게 위험한 거야, 교생 아가씨!
내가 천국에서 천사들을 때려잡는 유쾌한 꿈을 꾸는 동안 비겁한 지옥을 순례한 현자는 탑에 갇혀서 꼼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2위인 현자가 1위 섹스피어를 악당으로 몰기 위해 납치한 젊은 여성들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탑은 아니다.
나와 쏘시아가 대범하게 탑에 침투했을 때, 텅텅 빈 감옥과 밧줄만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보안이 약했다.
“쏘시아.”
“응.”
내 주문을 받은 쏘시아가 오른손에 쥔 마법봉을 휘저었다.
쿠구구구-
허름한 현자의 탑이 순식간에 리모델링됐다.
던전으로.
“예쁜 여자만 보면 코피를 쏟는 현자의 속성은 변태적인 성범죄자에 딱 어울리지.”
어떻게 용사의 동료로 등록되어 활동했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드디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기분.
내년에 새롭게 업그레이드되는 던전 ‘현자의 탑’이 몰랑몰랑한 용사들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컴잉 순(Coming soon)!
쏘시아가 덧붙였다.
“여성들을 납치하는 공범만 찾으면 해결이네.”
“꼭 잡아야지.”
판타지아 세계관 미녀 1위와 2위의 남편들을 여성 납치범으로 몰아넣은 흉악범을 잡아야 한다.
크게 걱정하진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토박이 정령들의 진술을 들어볼까.”
뿅! 뿅!
정령은 어디에나 산다.
자연이 훼손된 도시에는 많이 살지 않지만, 그래도 감시카메라의 숫자보다는 훨씬 많다.
단, 정령들의 지식은 단편적이다.
우리가 동거 중인 바퀴벌레의 복지를 신경 쓰지 않듯이, 정령들도 인간사에 관심 없다.
그래도 머리를 맞대면 그럴싸한 정보가 모이게 되어있다.
약간의 동기는 필요하지만.
“마약정령. 조카의 은밀한 하루 2탄을 시청하고 싶으면 얼른 정보를 뱉어내.”
“너무하다! 순진한 정령을 대상으로 유료서비스라니!”
최초의 정령이 분개했다.
그러자 공급처에서 받아쳤다.
“이모님. 조카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건 괜찮고요?”
“조카야! 정령은 순진해서 봐도 뭔지 모른다! 어제의 조카는 정말 굉장했지! 어떻게 손가락을- 웁웁?!”
“떠올리게 하지 마세요!”
얼굴이 새빨개진 마누라가 손바닥으로 이모의 입을 막는 동안, 순진한 정령들이 정보를 모아왔다.
목격자의 진술은 기본.
범행 동기까지 밝혀지면서 주위 정령들을 설레게 했다.
“정령들이 참 순진해.”
비겁한 마누라가 싫다고 하면 제작될 수 없는 2탄을 기대하다니.
“나, 나는 싫다고 한 적 없거든! 그렇다고 좋다는 건 아니지만!”
“우히히히!”
“이모님은 이 타이밍에 그렇게 웃지 마요!”
“내 마음이다! 은밀한 조카야!”
“우으...”
나는 정령들이 알려준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현자의 탑에서 멀지 않았다. 공범은 대범하게 근처 잡화점에 머물고 있었다.
도시의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서 이곳으로 데려가는 인간 암컷을 보았다는 정령들의 제보가 많았다.
누굴까?
곧 알게 되리라.
나는 잡화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거리는 현자의 탑을 포위한 시민과 병사들로 시끌시끌했지만, 이 잡화점은 태풍의 눈처럼 한산했다.
실내는 판타지아 대륙 어디에나 있을 법한 잡화점.
어떤 물건이든 원가 미만으로 매입하고, 팔 때는 정가에 웃돈을 얹어서 비싸게 판다.
누군가에게는 쓰레기가 누군가에게는 보물이 될 수 있다.
잡화점은 그러한 점을 중점적으로 노린 가게다.
“손님. 어떤 물건을... 어?”
진열장의 상품들을 정돈 중이던 잡화점 주인이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나는 씩 웃었다.
“매력적인 아가씨. 우리는 분명히 오늘 처음 만났을 텐데, 나를 단번에 알아보는군?”
“...글쎄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손님.”
팟!
시치미 뚝 뗀 아가씨는 일개 잡화점 주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도주를 시도한다.
콰당!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랑 충돌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포기해.”
“이, 이게 무슨 짓인가요...!”
도망치기 어렵다고 판단한 잡화점 주인이 성질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뿐, 그녀는 내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보자마자 빠르게 조용해졌다.
뒤따라 쏘시아가 들어왔다.
“엇! 너는...”
무심코 남편을 뒤따라 들어온 비겁한 마누라도 아는 눈치.
잡화점 주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난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나와 이 아가씨가 처음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
“최초의 용사에게 선물 받은 브로치를 휴지통에 버린 하렘의 일원- 아니, 교직원이라고 불러드릴까?”
“히익-?!”
현자를 부추긴 공범은 버그나 라누벨 따위가 아니었다.
내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틀림없다.
“정말 반가워, 도덕 선생!”
판타지 세계에서 방황하는 어린 용사에게 도덕을 가르쳐준 분이다.
너무 반가워서 어떻게 대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남편. 벌써 작별할 것 같아.”
“뭐? 아앗! 정말 죄송합니다, 도덕 선생님.”
나는 존경하는 도덕 선생님의 요추(腰椎) 4번을 제자리에 돌려놨다.
“하나 더 있잖아.”
“쏘시아! 그게 무슨 말이야! 남편을 모함해도 유분수지!”
“왼손을 봐.”
“...이 5번은 선생님이 내게 선물로 주신 거야. 물어봐.”
“기절했어.”
“피곤해서 잠시 주무시는 거야. 쏘시아, 가장 사랑받는 아내를 유지하려면 너는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볼 필요가 있어.”
“어? 그런 거야?”
“그런 거지.”
“정말 어렵구나! 첫 번째 아내라는 건! 하지만 해볼게!”
“......”
내 마누라의 행복 상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