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21회차] 상담비
눈을 뜬 도덕 선생은 척추가 허전해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내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정말 오랜만인걸?
“강한수 학생. 잘 들으세요. 배우기 위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만큼 불행한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오! 선생은 행복하겠네!”
허리디스크가 도덕 선생에게 뼛속까지 스며드는 진정한 고통을 가르쳐줄 것이다.
우리의 사제관계는 처음 만난 2회차 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냥 졸업시켜줬다면 서로 기분 좋게 끝났을 텐데.
어느새 200년이 흘렀다.
지구 시간으로도 무려 20년!
불공정한 편파판정을 한 교장도 잘못이지만, 제대로 못 가르친 도덕 선생의 잘못도 매우 크다.
“그건 강한수 학생이 수업을 제대로 못 따라왔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치는 똑똑한 학생에게 선생은 불필요한 존재다.
적어도 ‘선생’을 자칭한다면, 덜떨어진 학생도 얼마든지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덜떨어졌느냐?
이건 또 생각해볼 문제다.
도덕 선생이 내게 본받으라고 소개해준 A급 용사 지크는 여태 졸업하지 못한 채 초등교육장에서 헤매고 있었으니까.
즉, 학생의 학습능력을 따지기 전에, 선생의 수업내용이 올바른지부터 의심해봐야 한다.
“이 또한 당신 잘못입니다!”
“이유나 들어보죠.”
“저는 당신에게 지크 학생을 본받으라고 숙제를 내줬는데, 역으로 그가 물들었습니다.”
“억지네요.”
도덕 선생은 지크가 내게 물들었다고 우기는데, 우리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지크는 동족을 배신할 만큼 요정을 끔찍하게 사랑하지만, 나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다.
전투력은 또 어떠한가?
나는 유부남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노력하며 발전했다. 하지만 정력 스킬만 키운 지크는 실비아랑 결혼하자마자 도태됐다.
모험의 과정도 다르다.
나는 원주민 한둘을 구하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지만, 지크는 완전히 정반대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그는 강한수 학생 때문에 삐뚤어졌습니다. 요정을 사랑하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모험이 뜻대로 안 풀려서 인류를 배신하고 칩거하게 된 것뿐입니다.”
“모험이 뜻대로 안 풀린다고 포기한다면, 나는 1회차를 진행하는 동안 수천 번은 포기했어야 했어.”
“그 또한 잘못입니다.”
“뭐가 또 잘못?”
“진즉에 포기했어야 합니다.”
“하아?”
“회귀를 몰랐던 상황에서 인생을 포기하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요. 하지만 당신의 1회차는 너무나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용사의 길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꺄아아악?!”
“저런! 움직이지 마.”
요추 5번이 빠져서 상반신을 지탱하지 못할 거다.
“당신이 절 움직였잖습니까!”
“환상적인 논리를 펼치는 훌륭한 도덕 선생을 땅바닥에 계속 놔둘 순 없잖아.”
의자에 앉은 도덕 선생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합리적인 모험을 외면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당신이 마왕을 쓰러트린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0점 받은 학생이 졸업장을 받은 셈이니까요. 판타지아 교육장은 마왕을 쓰러트릴 정예병사를 키우는 곳이 아닙니다. 인성과 무력을 고루 갖춘 인격자를 양성하는 거지요.”
“선생. 늘 바쁘다며 도망치더니 오늘은 참 말이 많네.”
“......”
“인성과 무력. 무력은 상대적이고 인성은 절대적이지. 하지만 평가에 있어서 무력은 객관적이고 인성은 주관적인 가치 아닌가? 도덕 선생이 생각하는 모험이 뭔지는 잘 알겠어. 매번 도망치고, 어느 순간부터 교생에게 전부 떠넘겨서 물어볼 기회가 없었거든.”
“이젠 알았다는 겁니까?”
“그래.”
언젠가 내 1회차를 남들에게 들려줄 것이다.
압도적인 폭력이 두려워서 용사의 일행 앞에서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이라고 앵무새처럼 말하지만, 뒤에서는 피눈물을 흘리는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자기만족에 취한 용사의 동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자기가 구했다고 확신하는 사람, 마을, 나라의 1년 뒤는 관심 없다.
있더라도 착각한다.
내가 구해줬으니 당연히 행복하게 살 거라고.
소름 돋을 정도의 무지와 맹신은 광신도마저 뛰어넘는다.
“강한수 학생. 대체 뭘 알았다는 거죠?”
도덕 선생이 비아냥댔다.
“너희들의 방식.”
“하! 참으로 이율배반적이군요. 원주민을 구할 시간이 아깝다며 무시하고 지나친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일반적인 학생들은 수많은 선행을 합니다. 도적을 처치하고, 고리대금업자를 쓰러트리고, 정략결혼을 막아주고, 인신매매범을 때려잡고, 나라를 개혁합니다.”
“도적이 된 원인을 찾고, 고리대금업자도 가정이 있으며, 정략결혼에는 사심이 없어야지. 인신매매범? 이게 범죄인지는 각 나라의 법전부터 살펴봐야 해. 그리고 나라의 개혁은 애초에 용사가 나설 일이 아니야. 소수의 무력과 친목질이 아닌, 다수의 전문가와 백성의 의견을 듣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니까.”
“......”
“......”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먼저 입을 연 것은 도덕 선생이었다.
“저는 교사입니다.”
“그래서?”
“학생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늘 노력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
“물론입니다.”
“허...”
“하지만 강한수 학생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군요.”
“전혀?”
“네. 전혀. 용사가 원주민들을 완벽하게 도울 순 없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한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모험은 진전이 없을 테고, 영원히 마왕을 쓰러트릴 수 없을 겁니다.”
“하하하하!”
“뭐가 우습죠?”
“도덕 선생은 다를 줄 알았는데, 나랑 생각이 비슷하잖아.”
“제가... 당신이랑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건가요? 굉장히 불쾌한 발언이군요.”
“어째서 불쾌하지? 조금 전에 본인 입으로 말했잖아.”
“조금 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고.”
“......”
“드디어 이해한 것 같네. 맞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 그때 이런 의문이 들었지. 용사란 대체 뭘까? 용병도 할 수 있는 일을 무상으로 해주는 게 용사일까? 이 주제로 동료들이랑 싸웠던 기억이 나네.”
“강한수 학생...?”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 용사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용사의 직업특성 경험치 500%와 마왕을 쓰러트리라는 신탁. 둘을 조합해보면, 빠르게 성장해서 최대한 빨리 마왕을 쓰러트리란 해석이 되지.”
“맙소사...”
도덕 선생은 나태한 신을 목도한 어린 양처럼 경악했다.
“저기, 남편?”
“왜?”
가만히 듣고 있던 쏘시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용사의 경험치 500% 특전. 네가 살짝 오해하는 것 같아.”
“오해? 내가?”
“그 특성은 마왕을 빨리 쓰러트리라고 주어진 게 아니야. 2차 교육과정까지만 해도 없었거든. 그때는 학생들에게 온종일 수련만 시켰었어. 그랬더니 대다수가 포기해버리더라고. 그래서 학생들의 자유시간을 보장하면서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 고안된 거야.”
“경험치 500%가?”
“응.”
“충격과 공포로군...”
생각하는 개념이 너무 달랐다.
10시간 수련하면 100의 숙련도가 쌓인다고 가정해보자.
내게 용사는 매일 10시간 수련해서 500의 숙련도를 쌓게 해주는 수련특화형 직업이다.
그런데 다른 용사들은 2시간 수련해서 100의 숙련도를 쌓고, 남은 8시간은 동료들이랑 사랑과 우정을 쌓는 자유시간을 보낸다는 식이다.
미묘하게 달랐다.
그 미묘한 차이가 극단적으로 다른 결과를 초래했지만.
“드디어 이해한 모양이군요. 당신의 잘못된 학습법을.”
“아니.”
“이해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우리의 견해 차이를 알았을 뿐이지. 내 방식이 잘못됐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아.”
“...당신은 최초의 용사 못지않은 본교의 실패작입니다. 그렇게 생각했었기에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와있던 거지만.”
“재미있는 말을 하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이다.
교칙에 묶인 교사들은 교육장에 난입해서 간섭할 수 없다.
그런데 도덕 선생은 판타지아 세계에 들어와서 잡화점을 차린 건 물론이고, 현자를 부추겨서 선동과 날조를 하게 했다.
이건 약간의 참견 수준을 넘어선 노골적인 간섭이었다.
그런데도 교칙에 안 걸렸다고?
“불쾌하군요. 저는 교칙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학생이 없는 교실은 교육장이 아닐 뿐이지요.”
“아하!”
말장난 같지만, 도덕 선생의 반론이 틀린 건 아니다.
일반적인 판타지아 세계는 용사가 죽으면 붕괴하지만, 1년 전의 과거인 이곳은 용사 없이도 잘 굴러가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는 얘기는...
“대륙 어딘가에 있는 고모를 찾으려고 교사들이 더 와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네.”
“교장을?”
“응. 남편과 내가 몰랑소프트의 감찰단에 대비하듯이, 교직원 측도 그들이 오기 전에 고모를 찾아서 대안을 마련하고 싶겠지.”
“과연...”
겸사겸사 내 일도 방해하고.
하지만 이건 다시 말해, 판타지아 세계를 좀먹는 교직원 일당을 일망타진할 기회란 소리도 된다.
나는 신격을 둘이나 갖췄음에도 여전히 교무실에 난입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안전한 교무실에서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나와줬다.
“비겁한 남편. 찾으려고?”
“아니.”
찾는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교직원들이 어디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을지는 뻔하니까.
그들이 노릴 표적은 많지 않다.
종결자 섹스피어
검성 알렉스&설녀
흑각룡 뇌비우스
검희&아들 카리스
거인왕 페닉스
서리여왕 엘쉬
지모왕 말파리아스
...나열해보니 생각보다 많군.
마왕의 탑에 배치한 군주들을 포함해서 찾아보면 더 있겠지만, 내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려면 이들을 공략해야 한다.
판타지아 대륙 자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진 않을 것이다.
교직원 일당들도 학교가 존속되길 원할 테니까.
단, 지배체계가 교장에서 마왕으로 바뀌는 걸 원치 않을 뿐.
그래도 뭐...
“도덕 선생은 예쁘게 포장해놨다가 나중에 교섭재료로 써먹어야지. 흑화 선배가 좋아할 거야.”
“자, 잠시만요! 강한수 학생...!”
쏙!
나는 도덕 선생의 불필요한 겉껍질을 벗겨서 부피를 최소화한 후, 빨간색 리본으로 예쁘게 묶어서 ‘마신의 창고’에 넣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는 유일한 흔적인 속옷과 겉옷만이 잡화점 바닥에 외로이 굴러다녔다.
쏘시아가 이런 나를 신기하다는 얼굴로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그녀를 너무 쉽게 용서해주는 것 같아서.”
“내가? 언제?”
“만지작거리던 5번 요추도 마지막에는 넣어줬잖아.”
“내 권능을 새겨뒀지.”
도덕 선생이 두 발로 꼿꼿이 서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아...”
“하던 작업을 마저 해보자고.”
탕!
잡화점 지하에는 여성들이 붙잡혀 있었다.
영화와 소설에서는 포로가 예쁘게 포장되어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손발이 묶여서 꼼짝달싹 못 하는 그녀들의 엉덩이는 자신의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생리현상은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아니니까.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두 눈에는 생기가 없고, 어떻게든 밧줄을 끊어보려고 애쓴 손톱과 이빨은 부러져서 피가 났다.
이미 죽은 여성도 있었다.
굶길 마음이 없었는지 지하창고 구석에 놓인 가축용 물통과 사료통 같은 게 채워져 있었지만, 사용한 흔적은 거의 없었다.
사인(死因)은 불명.
마음이 먼저 죽고 뒤따라 몸이 죽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망: 정말 너무해요. 저와 동기들에게 도덕성을 강조하시던 선배님이 이런 짓을 하시다니...
힘내, 교생 아가씨!
종결자 섹스피어에게 누명을 씌우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여기서 내가 분개하면 도덕 S학점이 나오려나?
그러나 내 마음은 평온 그 자체였다.
나는 악(惡)이 좋다.
어정쩡한 정의감은 ‘악’으로 단정하기 힘들어서 골치 아프니까.
반면에 이처럼 뚜렷하면 상대하기가 매우 편하다. 망설이지 않고 응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 그래도 모든 선배님이 잘못하시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믿고 싶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 몸도 마음도 예쁜 교생 아가씨!
교생 아가씨를 우울하게 만든 교사들은 내가 척추를 뽑아서 빨랫줄로 이용해주겠다.
하지만 그전에,
“흑화 선배. 훔쳐보고 있는 거 압니다. 도덕적인 엉덩이를 걸고 이 후배랑 이야기 좀 하시죠?”
...대답이 없다.
상담비에 도덕적인 가슴도 얹었어야 했나?
▷피로: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