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15화 (315/430)

 315화

[21회차] 공정한 협상

흑화 선배가 출현했다.

예전에 집을 초토화해놔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얘기했지만, 이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다.

선배. 말은 쌀쌀맞게 해도 이 후배가 마음에 드신 거 아닙니까?

▷답답: 한때나마 사랑했던 아내의 척추가 마취도 없이 생으로 뽑히는 광경을 보고, 내가 그런 생각을 품으리라고 추측하는 후배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하지.

역시나 마음에 드신 모양이다.

▷신중: 부른 이유를 말해라. 하지만 같잖은 인질극이라면 안 하는 것을 권하마. 수많은 행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정략혼으로 들인 절세미녀가 수백이다. 은하계의 지배자인 내가 과거의 여자에게 얽매이리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흑화 선배에게 거기까진 기대하지 않습니다.

휴지통에서 브로치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정나미가 뚝 떨어진 것 같았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내고 협박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다는 건, 과거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뜻이겠지요.

틀렸습니까?

▷침착: 본론을 말해라. 하지만 말을 신중하게 골라서 할 것을 권하지. 내가 마음먹으면 그대의 고향별인 지구를 점령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하! 흑화 선배. 말은 똑바로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당신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살아있는 최종병기인 최초의 용사가 수도 행성에서 벗어나면 주변국을 자극하게 되니까요.

저는 판타지아 세계의 중2병 걸린 평범한 용사가 아닙니다.

제 마누라는 마스터 몰랑의 고향별인 엘몰랑도 유학파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아내지! 후후!”

“어, 그래.”

첫 번째 아내와 우주의 지식 사이의 연관성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쏘시아에게 우주의 정세에 대해 겉핥기식으로 배웠습니다.

그러니 수작은 안 통합니다.

▷여유: 수작이 아니다. 영원히 혼자 살 것처럼 굴던 쏘시아가 그대랑 결혼하고 두 번째 저주에 속박됐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녀의 지식과 능력은 진즉에 후배에게 넘어갔겠지. 그 말처럼 나는 후배가 반파시켰던 수도 행성의 태양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나의 군대와 자식들은 아니지. 은하계 국경에 배치된 그들 중 극히 일부만 움직여도 지구는 함락- 뭐가 우습지?

“너무 솔직해서 웃었습니다.”

흑화 선배가 아까부터 계속 도덕 선생을 핍박하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아직 본론도 안 꺼냈다.

그런데 선배는 지레짐작하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바쁘다.

아내가 수백이라서 이젠 아무것도 아닌 과거의 여자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패기 넘치는 중2병 시절은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이니까.

회귀해도 안 된다.

영혼을 표백제에 담가서 기억을 싹 지우지 않는 한, 미녀의 골반만 봐도 흥분하던 그때로 돌아가지 못한다.

좋게 말하면 철이 들었고, 나쁘게 말하면 동심을 잃었다.

▷난감: 억측이 심하군.

경험담입니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엉덩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한심한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트라우마, 흑역사의 한 컷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라누벨의 이름은 그때로부터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선배는 어떤가요?

▷항복: 비앙카 라누베르크. 그녀는 자존심이 무척 강한 공녀였다. 나는... 가문의 집사이자 대부였던 엘브하임을 남몰래 짝사랑하던 비앙카에게 부귀영화를 안겨주겠다고 꼬드겨서 몸과 마음을 얻었었지. 고작 여자 하나를 얻기 위해 권력과 재산을 나눈다는 건, 지금의 나는 절대 선택하지 않을 방식의 연애. 후배의 말처럼, 혈기왕성한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결혼이고 아내다. 그리고 온기를 나눈 시간으로만 아내들의 순위를 매긴다면, 지금도 비앙카가 열 손가락에 들 터. 내게 특별한 여자다...

종족 불문의 MAX급 잡식성 하렘의 주인답지 않은 솔직한 연애담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때, 최초의 정령이 내 머리를 통통 두드렸다.

“마약용사. 유감스러운 가출용사가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다.”

“도덕 선생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고백했어.”

“안 믿는다. 그 녀석은 예쁜 암컷의 페로몬만 맡으면 사랑한다고 외쳐댔으니까. 물론,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일 거다. 마음에 든 모든 암컷을 골고루 사랑하려고 해서 문제지.”

“일단은 진심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거네.”

“그렇다.”

▷부들: 저 정령은 옛날부터 마음에 상처가 될 말을 쉽게 했지. 그리고 가출용사라니! 아내들의 등쌀을 못 견디고 가출한 건 사실이지만, 먼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인 거냐...

흑역사로 가득한 생활기록부를 말소한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가출선배.

▷경고: 그렇게 부르지 마라. 너에게 이름은 기대하지 않으니, 평소처럼 흑화 선배라고 불러.

그건 가출선배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가출선배.

시시콜콜한 과거사는 잠시 접어두고, 이 후배랑 진지하게 사업 얘기를 해봐요, 가출선배.

▷피식: 사업? 무슨 사업? 차원에 갇힌 네가 뭘 할 수 있지? 판타지아 교육장이 몰랑소프트에 넘어가면 너는 영원히 교보재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배운 몰랑이가 운영하는 그 회사는 최초의 천사 파르마엘처럼 허술하지 않으니.

최대투자사 몰랑소프트가 판타지아 교육장을 병합한다는 소문이 외부에 쫙 퍼진 듯했다.

나는 교생 아가씨가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거늘!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가출선배는 우리보다 우주의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

“비겁한 남편. 가출용사는 무시해도 돼. 학교랑 관련된 웬만한 정보는 시스템이 알고 있어.”

“알긴 뭘 알아. 최근에 침투한 우주인의 배후는커녕 정체조차 아직 모르잖아.”

“그건... 그렇네.”

그러니 흑화 선배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도 모른다면 이 거래는 없었던 것으로 하면 되고.

▷수긍: 돈을 받고 활동하는 해결사다. 살인, 납치, 파괴, 절도, 수금, 암살 등등. 누군가에게는 해결사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내게는 박멸해야 할 해충일 뿐. 우주에는 그런 테러리스트가 셀 수 없이 많다.

오! 그냥 알려주시네?

▷으쓱: 별거 아닌 정보다. 지금부터가 중요하지. 우주마를 소유한 해결사는 흔치 않으니. 그만큼 유능하다는 증거고, 유능할수록 과거가 화려한 법이지. 나처럼.

참 잘났습니다, 가출선배.

하지만 그 해결사는 그다지 유능해 보이지 않았다.

내 공격을 전부 회피한 가오리 쪽이 훨씬 유능했지.

“Seeeex!”

울음소리도 비범하다.

▷설명: 단독으로 활동하는 후배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수한 동료와 도구도 개인의 역량에 포함된다. 그리고 지금의 너는 나랑 엇비슷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해결사 따위가 비빌 수 없는 게 당연...

잠깐! 잠시만요, 가출선배!

저에게 실컷 얻어맞으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면 곤란한데요.

죽어도 자존심 세우고 싶은 선배의 마음은 잘 알겠지만, 우리 사이에는 몰랑과 말랑만큼의 전투력 차이가 존재합니다.

▷불쾌: 네가 말해놓고 벌써 잊은 건가? 나는 주변국들을 자극할 수 있어서 움직일 수 없다. 그건 단순히 이동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내 은하계에서 다른 은하계로 원거리 포격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끌어올려도 국제적인 도발이 된다.

“와우!”

우주급 스케일 한 번 멋지네.

수백 광년 떨어진 이웃 은하계를 포격한다니?

발사체가 빛의 속도로 날아가도 수백 년이 걸리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에 판타지가 가미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공간을 접는 내 신격처럼 물리법칙을 깔끔히 무시한 공격수단이 이용되겠지.

▷경고: 이 선배의 힘을 이해했다면 비앙카의 엉덩이와 가슴에 더는 손대지 마라. 너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리본으로 묶는 과정에서 오른손으로 3.6초, 왼손으로 4.2초 동안 만졌다. 심지어 남편이었던 나조차 한 번도 직접 손댄 적 없는 비앙카의 척추도 113.5초 동안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렸지!

...대단히 상세하게 기억하고 계시네요, 가출선배.

이 후배는 선배의 인생관에 다시 한번 존경심을 느낍니다.

“비겁한 남편. 설녀 때를 봐서 알겠지만, 가출용사는 옛날부터 자기 여자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어. 여전히 그럴 줄은 몰랐지만.”

“정말 대단하네.”

말랑한 사람의 마음이 한결같기는 쉽지 않은데 말이다.

▷한숨: 은하계의 지배자가 된 나를 대놓고 욕하는 자는 보리스 이후로 너희가 처음이다. 아! 보리스는 네가 죽여서 안드로이드로 개조한 내 아들의 본명이다.

보리스, 그 친구는 저도 잘 압니다. 이 후배의 기억력을 너무 무시하시네요.

▷본론: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로 내 시간을 빼앗기만 해서 먼저 제안하지. 판타지아 교육장 뒤에 숨은 내 여자들을 전부 넘겨라. 그러면 추억의 모교가 몰랑소프트에 삼켜지지 않도록 도와주겠다.

오! 나쁘지 않은 제안이네요.

내 영향권 밖인 우주에서 가출선배가 도와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하게 몰랑소프트의 야욕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버그, 교사, 우주인.

감찰단이 온갖 트집을 다 잡을 텐데, 이것들이 방해하면 통과할 가능성이 더욱 낮아진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

나도 외부의 힘을 빌려야 한다.

▷결론: 이야기가 대충 정리된 것 같군. 비앙카를 포함해서 내가 파악해둔 교사는 총 9명이다. 그전에 죽은 아내들의 영혼이 아직 판타지아 시스템에 남아있다면 더 되겠지. 하지만 일단은 9명이다.

9명! 정말 많네요!

이곳에 와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그녀들을 1년 안에 찾으려면 척추 빠지게 뛰어다녀야 할 것 같다.

▷제안: 비앙카처럼 찾아서 생포할 때마다 지원을 늘려주지. 하지만 한 명이라도 도중에 죽는다면 이 임시동맹은 무효다.

은하계 지배자답게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아시는군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후배는 남의 여자를 찾아다닐 만큼 한가한 유부남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 제안입니다.

“선배가 직접 잡아가세요.”

늦으면 그녀들의 척추는 전부 제껍니다.

*

지구를 당장 정복한다고 한참 동안 발광하던 가출선배는 내 제안을 끝내 받아들였다.

헤어진 옛 연인들의 변변찮은 척추들을 지키기 위해?

아니다.

정의로움이 충만한 MAX급 용사님은 삼류악당도 생각할 법한 그런 저급한 협박을 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용사라면?

“도덕 선생. 최초의 용사는 속물적인 당신의 등쌀 때문에 가출했다고 주장하는 중이야.”

“궤변입니다!”

“하지만 물증이 있어. 남편이 선물로 준 브로치를 휴지통에 버린 정확한 이유가 뭐야?”

“그, 그건 왜 묻는 건가요?”

“나중에 판타지아 원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도덕성을 증명하는 연설을 해야 하니까.”

“연설?!”

“이런! 벌써 긴장하면 어떡해, 도덕 선생. 지금은 단순한 예행연습일 뿐인데. 가출한 남편이나 변호사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 눈물을 살짝 섞어서 날조하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구?”

▷전율: 마왕 페도나르도 너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처럼 잔인무도한 발상을 할 수 있지?

그건 오해입니다, 가출선배.

판타지아 원주민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용사님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신속하게 보도할 의무가 있고요.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버럭: 꼼짝 말고 기다려! 그곳으로 곧 군대를 보낼 테니!

오래는 못 버팁니다.

제 오른손에 봉인해둔 정의감이 얼른 진실을 보도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고 있거든요. 큭! 서두르십시오.

▷다급: 아니다, 이 악마야!

정의로부터 눈 돌린 이 어리석은 용사를 용서하소서. 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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