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외전] 쌍월의 용사
지구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판타지아 세계에 소환된 지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았다.
계단에서 구르고 무릎이 까져 피가 난 정도로 엄살을 부리던 내가, 이젠 절벽에서 떨어지고 뼈가 튀어나와도 그러려니 넘어가고 있었다.
“큭! 아직도 욱신거리네.”
그렇다고 안 아픈 건 아니다.
스킬 ‘통감’이 A등급에 도달하면서 고통을 덜어주긴 하지만, 평상시에는 이 스킬을 ‘비활성화’로 해놓는다.
몸은 정직하니까.
어딘가 아프다면 그 부위에 문제가 있다는 경고신호를 보낸다.
예를 들어, 다리뼈가 부러졌는데 안 아파서 모른다면 상처가 점점 벌어질 것이고. 급기야 영영 못 걷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통증을 웬만하면 참으려고 노력한다.
“오빠. 아직도 아파요?”
“오빠는 무슨. 그냥 강한수라고 불러.”
“하지만 오빠 이름은 발음이 어려워요. 그리고 이렇게 함께 잠도 잤는데, 남들보다 좀 더 친근하게 부를 수도 있죠~”
내 옆에 누워있던 소녀 ‘에밀리’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가슴께까지 덮은 이불 안쪽에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쳤는데, 밤새 살펴본 그녀의 몸매는 판타지 여인답게 판타지였다.
이 세상에서는 평균.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밭에서 씨를 뿌리지 않고 부잣집 도련님에게 사랑받으며 호의호식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에밀리. 이젠 아침이야. 부모님이 더 걱정하시기 전에 집에 돌아가. 도시의 경비병이라도 부르면 괜히 골치 아파져.”
“어젯밤에는 정말 고마웠어요.”
“희귀한 약초를 구하러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길이었을 뿐, 감사받을 일은 아니야. 그러니 얼른 돌아가. 내 동료들이 알면...”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불 밖으로 나온 에밀리의 머리를 넣으며 말했다.
“자는 중이야. 그러니 들어-”
쾅-!
문고리가 파괴되며 침실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나도 움직였다.
늘 옆에 두는 단검을 쥐고 침입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침입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단검을 쥔 손아귀와 어깨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뭐냐, 용사. 아침부터 나랑 한 판 붙어볼 셈이냐?”
“알렉스. 당신이 잠긴 문고리를 부수고 제 방에 무단침입만 안 했어도 검을 뽑진 않았을 겁니다.”
“이 여관 복도를 지나가는데, 용사의 방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서 말이지.”
“그렇다면 말로 하십시오. 도적처럼 들어오지 마시고.”
“허! 용사. 창문으로 침투한 미모의 암살자에게 습격받은 줄 알고 걱정돼서 서둘러 들어온 건데, 역으로 내게 고마워해야지!”
“여관 주인에게 망가진 문고리를 배상할 생각이나 하십시오.”
“그놈의 돈 타령은.”
알렉스가 반성의 기미는커녕 역으로 투덜댔다.
나는 옷을 입으며 말했다.
“당신과 아쿠아가 용병들을 때려잡으며 부순 시설물들을 고쳐주느라 여행비가 바닥났습니다. 안전한 도시 밖의 허름한 여관에서 자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건 그 용병들에게 따져야지!”
“그 용병들은 빈털터리였고, 누군가는 주민들의 일터를 고쳐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민들을 도와줬잖아? 뭐가 문제야?”
“그래서 바닥난 여행경비를 신경 쓰란 얘기였습니다. 방금 같은 지출이 없도록 주의를...”
“또 벌면 돼.”
“......”
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알렉스는 빈손이고, 내 손에는 단검이 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초창기부터 무력했던 작년까지만 해도 알렉스가 너무 무서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빈손의 알렉스는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
직업 용사의 경험치 500%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는 단 2년 만에 알렉스를 거의 따라잡았다.
하지만 그는 동료.
내가 마왕 페도나르를 홀로 쓰러트릴 게 아니라면, 좋든 싫든 모험의 마지막까지 함께해야 한다.
그러니 참자.
“알렉스. 조금 이따가 1층에서 함께 돈 벌 궁리나 해보죠.”
오늘도 나는 자문한다.
마왕의 침공보다 여행비를 더 걱정하는 내가 용사일까?
정말 모르겠다.
*
판타지아 북대륙에서 기사들의 성지로 통하는 큐레일 공작령.
이곳의 영주가 사는 도시를 요새처럼 감싼 성벽은 매우 높아서 성문이 닫혔을 때는 출입이 어렵다.
그래서 영주민들은 성문이 열리는 새벽부터 닫히는 초저녁 사이에 외출을 마치고 귀가한다.
이 시간을 놓치면?
우리처럼 치안이 불안정한 도시 밖의 여관에서 머물거나 노숙 외에는 방법이 없다.
“오빠. 정말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 에밀리. 스킬 평정(平靜) 숙련도는 올릴 기회가 흔치 않거든.”
“힝! 안 넘어오네.”
“얼른 가.”
도시의 성문이 열렸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집으로...
나도 집으로 돌아가려면 여기서 머뭇거릴 틈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의 걱정도 커질 것이다. 어쩌면 2년째 실종된 내가 이미 죽은 줄 아실지도 모른다.
“용사님! 용사님!”
“...그만 불러.”
“라누벨도 그러고 싶어요! 대답을 안 해주셔서 계속 부른 거예요!”
고고학자 라누벨.
판타지 여신의 신탁을 받은 그녀는 용사의 모험을 이끄는 길잡이다.
던전의 함정에 빠삭한 것 같으면서도 자주 함정을 밟는 걸 보면, 이론만 빠삭한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돈도 벌고 동료도 영입할 방법이 있어요!”
“일단 들어보고 결정할게.”
“네! 큐레일 공작의 무남독녀인 카이사 큐레일 영애의 혼기가 찼는데요. 자신을 검술로 이기는 사내랑 결혼한다고 선언했어요.”
“영애가 칼 좀 다룰 줄 아는 모양이네. 하지만 너무 안일한걸? 그러다가 늙은 산적두목에게 시집가게 되면 어쩌려고...”
“북대륙 1위에요. 그래서 붙은 별명이 검희.”
“......”
낭만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려는 카이사 공작 영애를 한껏 비웃던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북대륙 1위.
이 여자는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라누벨이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짐작됐다.
“용사님! 라누벨이랑 성검을 구하러 가요!”
“싫어. 참가하지 않... 음?”
“성검부터 구한 후에 검희에게 도전하셔야 해요! 지금은 용사님께 승산이 없어요.”
“성검의 힘으로 이기자?”
“네!”
나는 귀엽게 대답하는 라누벨의 뒤편에 선 알렉스와 아쿠아, 성녀님을 차례차례 돌아봤다.
“당신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좋은 판단이야.”
“용사는 아직 약해.”
“성검이 중요하죠.”
북대륙 어딘가에 봉인된 성검부터 구하자는 라누벨의 판단에 동의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중앙대륙에서 북대륙으로 넘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으니, 잘못된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검희에게 도전하겠어.”
“네! 용사님! 라누벨은 성검이 봉인된 장소를 알고 있어요. 빠르게 구하고 곧바로 도전을...”
“아니. 지금 도전한다.”
“너무 무모해요!”
“라누벨. 네 말대로 실패한다면 깔끔히 포기해야지.”
“검희를 포기하신다고요?!”
“그래.”
성검은 마왕 페도나르가 경계하는 전설의 무기다.
나는 검희라는 여자를 본 적 없지만, 이것만은 장담한다.
그녀가 찾는 남편감은 무기의 힘에 의존하는 남자가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면,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둘러댄 핑계이거나.
“하하! 일단은 가보자고.”
“용사는 참 바보네.”
“신성모독입니다. 성검보다 여자를 우선시하다니...”
알렉스, 아쿠아, 성녀님도 내 결정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적극적으로 반대하진 않았다.
나를 존중해서?
1년 전의 나였다면 그런 착각을 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들은 던전 탐사와 몬스터 사냥보다 이런 이벤트를 훨씬 좋아한다.
직접 싸우거나 구경하거나.
“결정된 것 같네.”
“라누벨은 용사님이 후회하실 거라고 장담해요!”
“안 해. 무기의 힘으로 남의 인생을 빼앗고 싶진 않거든.”
“......”
우리는 알렉스가 부순 여관 문고리를 보상해준 후, 큐레일 공작 영지의 심장부로 향했다.
참고로, 돈이 부족해서 이날 아침밥은 굶었다.
*
검희란 별호로 유명한 카이사 큐레일 공작 영애랑 바로 시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예비신부는 한 명뿐이고, 구혼자는 수백 명에 달한 탓이다.
그녀가 일일이 상대해주는 건 비합리적인 방식이기에, 구혼자들끼리 먼저 실력을 겨뤄서 경쟁자들을 탈락시키는 토너먼트가 진행됐다.
토너먼트.
참가조건은 영지의 중심부에 자리한 기사 아카데미의 부속건물에서 실시하는 기본능력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이다.
“자네. 마음에 안 드는군.”
내 기본능력 테스트를 맡았던 큐레일 가문의 노기사, 로리쿤 백작이 내 시험통과확인서를 성의 없이 휘갈겨 쓰며 말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얼굴부터 전부.”
“......”
충성하는 군주의 여식을 노리는 사내들을 싫어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공정성을 위해 좋은 정보를 알려주지. 저쪽으로 가면 토너먼트 승자를 맞추는 투기장이 있네. 우승에 자신 있다면 가진 재산을 전부 걸게.”
“참고하겠습니다.”
라누벨이 돈을 벌 방법을 찾았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투기장을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당장은 걸 돈이...
“돈이 부족하다면 투기장 옆의 장물가게를 가봐. 값어치 있는 소지품을 맡기고 대출받을 수 있지. 우승하면 최소 60배네!”
“네. 감사합니다.”
“강하고 아름다운 공녀님을 노리는 시건방진 사내라면 가진 전부를 걸 배짱이 있어야지. 안 그런가?”
“하, 하하...”
나는 악의가 느껴지는 로리쿤 백작의 조언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아카데미 시험장을 나왔다.
이름은 자동등록.
나는 투기장 옆을 지나가다가 낯익은 소녀를 발견했다. 그녀도 거의 동시에 나를 보았다.
“오빠!”
“에밀리?”
“네! 에밀리예요. 오빠를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곧 토너먼트가 열린다고 해서 참가자 명단을 구경하러 왔거든요~”
“아하.”
짤그랑.
그때, 내 귀에 묵직한 돈주머니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이 맑은 금속음은 100% 금화일 때만 난다.
그 소리의 근원지를 눈으로 천천히 쫓아보니...
“저도 돈을 걸러 왔어요.”
“설마... 그걸 다?”
“네! 한 달 동안 부지런히 모은 용돈이에요.”
“그, 그렇구나.”
일개 소녀의 한 달 용돈이 용사 일행의 한 해 생활비랑 맞먹었지만, 따지지 않기로 했다.
“오빠도 출전하세요?”
“그렇게 됐네.”
“우와! 꼭 이기세요! 제가 응원해드릴게요!”
“고마워.”
라누벨과 동료들 때문에 갑갑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를 응원해주는 소녀의 용돈을 위해서 힘내보자.
*
가까운 사람을 더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지구에 살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젠 알 것 같다.
“미친 새끼들.”
웬만하면 욕을 안 하겠는데, 이번에는 안 할 수가 없었다.
믿고 등을 맡기는 동료란 연놈들이 용사의 토너먼트 우승을 방해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실제로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 있다.
“큐레일 공작 각하의 여식이며, 판타지아 북대륙 최고의 미녀, 오우거를 136마리 단독사냥, 북대륙 3대 기사단으로 이름 높은 흑장미 기사단의 단장, 북대륙 동부의 수호자, 동부군단 사령관, 북부군단 부사령관, 백색 대신전의 명예기사, 큐레일 영지의 수호신, 마법검 아이어의 주인, 큐레일의 살아있는 솔로늄, 아이스 트롤 학살자, 외로우나 치명적인 검은 장미, 카이사 큐레일 백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와아아!”
“꺄오오옷!”
“와아아아!”
북대륙 최강의 검사가 대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고급 장비, 수많은 응원, 완벽한 상태, 높은 능력치. 그리고 아름다운 미모...
반면에 나는?
“카이사 큐레일 백작님께 구혼하려는 수컷이 입장합니다. 중앙대륙에서 온 검사 깡한쑤!”
“......”
“......”
“......”
예전에는 야유로 가득했는데, 악착같이 살아서 여기까지 올라온 내가 기특했던 모양이다.
관중석은 조용하기만 했다.
하지만 스킬 청력B가 활성화된 내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오빠! 힘내세요!”
한 달 용돈을 전부 내게 걸어준 소녀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소문에 따르면, 이번 배당금은 역대 최고기록을 가볍게 뛰어넘은 200배라고 한다.
이 싸움에서 내가 이기든 지든 그녀는 배당금을 탈 것이다.
나는 우승자의 권리로 검희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검사님. 당신의 싸움을 중간부터 쭉 봤어요.”
“...그렇습니까.”
상황이 대단히 좋지 않다.
나는 검희의 전투 스타일을 전혀 모르는데, 그녀는 토너먼트를 관전하면서 나에 대해 이미 파악해뒀기 때문이다.
이대로 휘둘릴 순 없다.
검희랑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일단, 나에 대해 얼마나 파악해뒀는지 슬쩍 물어보자.
“보시기에 어떻던가요?”
“...겉만 번지르르한 사내인 줄 알았는데, 제 착각이었습니다. 야성적인 얼굴과 심연 같은 눈빛, 여기에 걸맞은 거친 육체와 투지가 정말... 멋졌어요.”
“칭찬 감사합니다.”
나는 겸손 떨면서 내심으로는 혀를 찼다.
검희.
북대륙 최강의 검사답게 심리전에서도 보통내기가 아니다.
나는 전투의 감상을 물었는데, 엉뚱한 외모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검사님이 보시기에 저는 어떤 것 같나요?”
안 그래도 불리한 내게서 정보를 얻어내려고 한다.
흥! 그렇게는 안 되지.
나도 엉뚱한 대답으로 보답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밤하늘의 눈부신 쌍월(雙月) 같았습니다. 당신의 이중적인 삶처럼.”
“으읏...”
내 도발이 먹혀든 걸까?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진 검희가 대전을 서둘렀다.
나도 바라는 바다.
방금까지 정상이었던 검희의 상태에 ‘혼란’이 추가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내 진면모를 모른다.
용사란 사실을.
나는 상대방의 능력치를 조건 없이 볼 수 있다.
검희도 예외는 아니다.
“갑니다, 카이사 큐레일.”
“예? 네! 얼른 오세요! 아, 아니, 제 말뜻은 그러니까...!”
캉! 캉! 캉!
혼란 상태가 끊기지 않도록 검희를 쉴 새 없이 몰아쳤다.
라누벨. 보고 있냐? 네 설사약으로도 나를 막을 수 없다!
“하아압-!”
“아앗...”
검희와 나의 악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