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21회차] 신입생 모집
☞알림: 강한수 마왕님. 당신을 좌표로 대량의 물질을 전송하려는 신호가 포착됐습니다. 승낙하신다면 여기에 필요한 차원이동 마법진의 양식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노파심에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마법진으로는 역전송이 안 됩니다.
실낱같은 기대를 미리 짓밟아줘서 고마워, 판타지아 여신!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던 시스템이 이상 사태를 보고해왔다.
명예교사의 지위를 활용해서 나를 염탐하던 가출선배가 정말로 군대를 보낸 것이다.
군대를 집결시키려면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이건 내 예상을 한참 벗어난 속도였다.
그나저나...
“너, 뭐하냐?”
아까부터 쏘시아가 내 잘생긴 얼굴을 빤히 보면서 도둑고양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겁한 남편. 앞으로 우주를 무대로 싸울 거면 기존의 상식을 바꿀 필요가 있어.”
“예를 들자면?”
“그전에 물어볼게. 남편이 판타지아 행성을 완전히 파괴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려?”
“흠... 10초쯤?”
마왕의 힘이 온전하거나, 행성에 척추가 있었다면 0.1초도 안 걸리겠지만, 현재로선 그게 최대였다.
쏘시아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다면 남편 같은 침략자를 막으려면 행성방위대가 10초 안에 준비를 마치고 출동해야겠네? 아니. 더 빨라야 막을 수 있지. 전투준비가 끝나자마자 행성이랑 함께 폭사하면 안 되니까.”
“그래야겠지.”
물리적으로 그게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내 습격으로부터 행성을 지키려면 그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말이 안 된다.
병사들이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하더라도 10초 만에 출진해서 적에 맞서는 게 가능할까?
경고음과 적에 대한 브리핑만으로도 10초가 훌쩍 넘어갈 것 같다.
즉, 말이 안 된다.
“그래도 해야 해. 행성에 사는 수천억 동족을 지키려면.”
“......”
“뭐... 아빠 같은 우주특화형 신격 앞에선 부질없지만, 남편의 두 번째 신격처럼 개인전에 특화되면 행성을 부수기가 간단하지 않아서 이런 군대가 무용지물인 건 아니야. 적어도 중요인물이 행성을 탈출할 시간쯤은 벌어주지.”
“스케일이 바보 같네.”
하지만 전혀 이해 못 할 내용은 아니었다.
우주에 떠도는 수많은 소행성 중 하나가 지구에 떨어져서 공룡들이 싹 멸종했다는 말도 있잖은가?
신(神)에게 행성은 팝콘 한 알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이야기고, 실제로는 행성방위대가 출동하기까지 30초쯤 걸려. 10초는 행성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홍보용 훈련 때나 가능한 속도지.”
“30초도 빠른 것 같은데...”
내 1회차 동료들은 몬스터 대군이 도시와 마을로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숙취에서 깨는 데만 30초 넘게 걸렸다.
“여기는 우주가 아니니까. 절대강자가 날뛰어도 행성은 멀쩡한 판타지아 세계지. 흐응~ 가출용사는 군사훈련을 잘해놨네. 25.4초 만에 출전준비를 마쳤어.”
슥슥.
쏘시아가 마법봉을 흔들 때마다 평평한 대지에 기하학적인 원형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차원이동 마법진.
하지만 그 규모는 라누벨이 용사를 납치하기 위해 그렸던 마법진보다 훨씬 컸다.
“쏘시아. 촉매 없이 가능해?”
“후후! 잊었어? 비겁한 너의 첫 번째 아내는 창조신이야.”
숑! 숑! 숑!
마법진의 활성화에 필요한 최고급 재료들이 가루 상태로 생성됐다.
이 세계의 창조신인 그녀에게는 ‘가슴이 큰 돌연변이 요정 암컷의 골반(0/10)’ 같은 어려운 수집 임무도 손쉬웠다.
그냥 뚝딱 창조하면 되니까.
“못 만드는 게 뭐야?”
“영혼.”
쏘시아가 즉답했다.
“원주민들은 잘만 태어나던데?”
“그건 창조가 아니라 짝짓기를 유도한 결과지.”
우우웅-
창조한 촉매 가루를 뿌린 마법진이 서서히 활성화됐다.
“가출해서 성공한 선배의 군대가 이곳으로 온단 말이지...”
조금은 기대됐다.
”가출용사는 은하계를 지배하는 왕(王)이야. 여기서는 대륙 일부만 가져도 황제(皇帝)라고 떠들지만, 우주에서는 달라. 은하계 서너 개쯤은 보유해야 황제를 자칭할 수 있어.”
“...그러면 나는?”
본의는 아니지만, 장인어른에게 가업을 물려받아서 마왕(魔王)을 자칭하고 있다.
하지만 은하계는커녕 태양계, 행성조차 소유하고 있지 않다.
우주인에게 나를 소개할 때는 ‘평범한 악마’라고 해야 하나?
“그건 좀 개념이 다른데... 황제와 태풍 중 어느 쪽이 더 위대하냐고 묻는 거나 다름없어.”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
파앗-!
쏘시아가 그린 차원이동 마법진이 순백의 빛에 휩싸이더니 약 200명의 인형을 소환했다.
병력에는 인간종도 있고, 지구에서 봤던 안드로이드도 있었다. 어마어마한 대군을 예상했던 나로선 매우 뜻밖이었다.
선두에는 한 여성이 있었다.
▷종족: 레드 드래고니안 로드
▷레벨: 1
▷직업: 염왕(화염→불사↑)
▷스킬: 통역A
▷상태: 흥미
판타지아 출신이 아니라서 능력치는 이제 막 생겼다. 하지만 약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인간적인 체형 위로 붉은색 비늘이 갑옷처럼 덮여있다.
그나마 목, 허리, 팔뚝, 허벅지는 인간이랑 똑같은 부드러운 피부였지만, 나머지는 극단적인 흉기 그 자체였다.
손발은 붉은색 비늘과 가죽으로 덮여있고, 그 끝은 두툼한 손톱과 발톱이 달려있다.
등허리에 접혀있는 날개와 벨트처럼 허리에 감겨있는 꼬리는 그나마 덜 위협적으로 생겼다.
그녀가 입술을 뗐다.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할 관등성명은 생략하겠다. 나는 이번 작전의 총지휘를 맡은 크로마티구스 장군이다. 586명의 왕비 중 실종된 8명을 찾는 이런 하찮은 임무를 원래는 맡지 않지만, 나의 귀여운 보리스가 있다고 해서 왔다. 협조 부탁하지.”
“귀여운 보리스...?”
내가 아는 그 늙은 왕자 보리스를 말하는 거겠지?
“폐하를 닮아서 외모도 썩 훌륭한 편이지만, 강자에게 반항하는 모습이 특히 귀여운 남자다.”
“그, 그래.”
공감이 전혀 안 됐지만, 이 여자의 취향이 독특하다는 건 알겠다.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겠다. 우선, 폐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포로 교환이다. 한 명을 찾을 때마다 물자지원이 있을 예정이다.”
“물자? 필요 없는데.”
내 비겁한 마누라가 이 세계의 창조신이다. 물자는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
병력 외의 지원은 쓸모없다.
“현재, 판타지아 교육장은 신입생 공급이 완전히 끊어진 상황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감찰단이 와서 살펴볼 것도 없이 폐교는 거의 확정이다.”
더욱 자세한 교육장 상황은 쏘시아가 알겠지만, 지구에서만 신입생을 뽑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몰랑폰으로 지구의 상황을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실종신고가 거의 사라졌다.
지구에 사는 사회부적응자를 마지막 1명까지 쥐어짜듯 납치해서 더는 없기 때문이다.
즉, 신입생 공급이 끊겼다.
그래도 최소연령을 넘긴 수백 명이 매년 입학하긴 하는 모양이지만, 판타지아 교육장 규모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폐하의 명에 따라, 본국에서 그 부족한 신입생을 공급할 의향이 있다. 교육장에서 자급자족할 수 없는 인적자원을 지원하는 셈이지.”
“...가출선배도 제법이군.”
정의로운 MAX급 후배를 위해 아낌없이 퍼주는 선배일 줄 알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머리를 굴렸다.
졸업생은 고향별로 돌아간다.
당장은 신입생을 늘릴 수 있어서 좋지만, 그들이 졸업하면 고스란히 가출선배의 군대가 된다.
즉, 말이 지원이지 가출선배는 손해나 부담이 전혀 없다.
마음에 안 드는걸.
“그렇진 않아. 우리가 그들을 졸업 안 시키면 끝이거든~”
“...천재인데?”
“후후! 내가 MAX급 마왕의 첫 번째 아내야. 이 정도는 기본이지.”
또 우쭐대는 비겁한 마누라는 그러게 놔두고, 나는 총지휘를 맡은 붉은색 용인을 돌아봤다.
“이봐, 빨강.”
“...보고받은 대로의 용사라서 놀랍지도 않군. 나를 그런 식으로 부를 자격이 그대에게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핫! 단순명료하네!”
내가 더 강자이기에 뭘 하든 건드리지 않겠다는 논리다.
물론, 싸울 수밖에 없다면 빨강도 피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같은 목적으로 움직이는 동맹이었다.
“남편. 저 여자가 마음에 든 모양이네.”
또 질투심에 불타는 쏘시아가 내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너그러운 남편님은 마누라의 척추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야. 애초에 용(龍)은 중성이라고. 그냥 강해. 저 상태에서 능력치가 얹어지면 얼마나 강해질지 궁금할 만큼.”
“그 정도야?”
“아직은 괜찮아. 내 첫 번째 마누라보다도 약해. 아직은.”
“응응! 내가 첫 번째야!”
“......”
나는 질투심이 눈 녹듯 사라진 쏘시아를 안은 채, 가출선배가 그토록 원하는 옛 아내를 소환했다.
뿅!
이후, 꼼짝달싹 못 하도록 예쁘게 포장한 도덕 선생을 빨강 앞에 사뿐히 내려놨다.
“빨강.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거래가 성사됐다고 폐하께 보고하겠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챈 도덕 선생이 발악하듯 내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적을 용서해라, 그러면 친구가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교의 자랑인 강한수 학생. 당신이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선택은 옳지 않습니다! 교직원 일동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입니다!”
“괜찮아.”
교장을 구출하고 나를 방해하기 위해 이곳에 숨어든 교사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처리할 테니까.
도덕 선생은 그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빨강. 어떻게 그녀를 데려갈 거지?”
“방법은 준비해놨다.”
뒤편에서 대기 중이던 안드로이드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다른 병사랑 다르게 목줄이 채워진 그것은 무기 하나 없는 완전한 비무장 상태였다.
나는 그 안드로이드의 능력치를 보자마자 살짝 감탄했다.
▷종족: 올드 안드로이드
▷레벨: 1
▷직업: 영웅(경험치 200%)
▷스킬: ■■MAX
▷상태: 소켓, 종속
망각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MAX등급 블랙박스를 보유했다. 직업도 하필이면 용사 다음으로 경험치 효율이 좋은 ‘영웅’이었다.
나는 이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단번에 눈치챘다.
“온전한 경험치로 치환해서 데려가려는 거군!”
“아, 안 돼! 이러지- 컥컥?!”
영웅 안드로이드가 도덕 선생의 목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고통스러운 얼굴로 목숨을 구걸하던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일용의 경험치로 변했다.
▷종족: 올드 안드로이드
▷레벨: 999+
▷직업: 왕비(총애→마성↑)
▷스킬: ■■MAX 살인E 냉정F
▷상태: 소켓, 종속
경험치는 1%쯤 흡수되고 나머지는 자연으로 흩어지지만, 내가 과거에 그랬듯이 이 안드로이드는 블랙박스와 직업특성으로 온전히 흡수했다.
도덕 선생의 영혼을 깔끔히!
나중에 그 영혼을 추출해서 인간의 육체 같은 그릇에 옮기면 완벽하게 살려낼 수 있다.
이론상으론 말이다.
“왕비의 육체도 회수해라.”
“네. 사령관님.”
빨강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도덕 선생의 ‘0레벨 육체’를 옮겼다.
하지만 가상과 현실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푹! 위이이잉-
병사들은 도덕적인 엉덩이에 청소기 같은 것을 꽂아서 내부의 노폐물을 싹 제거했다.
부패를 막기 위해.
장의사가 하는 작업이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덕 선생에게 괜히 미안해지려고 하네.”
“비겁한 남편. 신입생을 납치할 수 있는 행성 목록이 추가됐어.”
“오! 가출선배가 약속은 철통같이 지키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지. 쏘시아. 도덕 선생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자!”
“응!”
도덕 선생은 떠나기 전에 내게 마지막 가르침을 내려줬다.
적을 용서하면 친구가 생긴다고.
그녀의 말이 맞았다.
도덕 선생을 용서했더니 가출선배랑 친해졌다.
▶작별: 선배님. 뒷일은 이 후배에게 맡기고 편히 쉬세요.
아! 그렇지!
오늘부터 교생 아가씨를 도덕 선생으로 임명합니다!
▶당혹: 그런 엉큼한 의도로 한 작별인사가 아니었는데요...
괜찮아, 교생 아가씨! 자주 작별하다 보면 엉큼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