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21회차] 사회공부?
앞으로 남은 교사는 6명.
가출선배가 원하는 미화된 추억 속 그녀들을 전부 잡으려면 여유 부릴 틈이 없었다.
판타지아 동대륙.
크고 작은 섬이 군락처럼 무리를 이뤄서 형성된 대륙이다.
섬과 섬 사이는 물이 얕아서 대형 해양몬스터가 출몰하지 않지만, 인어랑 영역권으로 항상 다투는 메갈로돈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메갈로돈(Megalodon).
돼지 같은 식성을 자랑하는 초대형 상어다. 하지만 이건 지구에서 온 내가 편의상 그리 부르는 것뿐이다.
여기선 신생대의 화석이 아닌 평범한 해양동물이다.
판타지 원주민들은 ‘돌격상어’라고 부른다. 다짜고짜 돌격해서 배에 박치기하기 때문이다.
쿵쾅!
쾅!
콰앙!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는 메갈로돈이 들이박으면 배가 파괴되고 선원들이 바다에 빠진다.
“으아아악?!”
“누가 좀 도와줘!”
“사, 살려줘~!”
이때, 메갈로돈은 선원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한다.
하지만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다.
선원 대부분은 젊고 건장한 남성이니까. 본능에 충실한 인어들은 그들이 메갈로돈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놔두지 않는다.
“제가 구해드릴게요♥”
“가슴이 참 넓으시네요♥”
“몸만 주시면 돼요♥”
수많은 인어가 메갈로돈 한 마리를 어쩌지 못하고 다치거나 죽지만, 그래도 수적 우위로 큰 희생 끝에 어찌어찌 처치한다.
절대로 손해가 아니다.
먹음직스러운 선원들만 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인간 수컷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서 동족을 늘리면 결과적으로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푸하! 사, 살려주세요!”
“피곤해♥”
“저는 왕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예요! 푸하! 멋진 왕자님이랑 결혼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도와줄게♥”
“수, 숨을 못- 꼬르륵...”
야만적인 판타지 세계의 남녀차별은 충격과 공포 수준이다.
바다나 호수에 빠지면, 남자는 약 80%의 확률로 인어에게 구출되어 한두 달 뒤에 육지로 귀환한다.
영영 실종되는 20%는 미남이거나 추남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여자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생환율이 2%쯤 되며, 미녀는 0.1% 미만이다.
어찌 이리도 잔혹할 수가!
나는 바다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남녀차별의 현장으로부터 애써 고개를 돌렸다.
“동대륙은 여전하네.”
바뀐 점이 딱 하나 있다면, 타락하여 5대 재앙이 되어야 했던 은룡(銀龍)이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지모왕 말파리아스.
하지만 내가 지금 날아가는 목적지는 그 도마뱀의 둥지가 아니다.
거기는 동쪽의 가장 큰 섬인 섬E고, 여기는 중앙대륙의 상인공화국이랑 활발하게 무역이 이루어지는 서쪽의 섬W다.
▷황당: 멀쩡한 섬 이름을 놔두고 어째서 그런 식으로 부르는 거지? 동대륙에는 커다란 4개의 섬이 있다. 용들이 가장 많이 사는 북쪽의 올칸, 난쟁이들이 사는 동쪽의 레웅, 무역이 활발한 서쪽의 바쿰, 해적들의 고향인 남쪽의 룰바.
어차피 1초 뒤에 잊어먹을 게 뻔한 이름을 열심히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출선배.
섬W는 해상무역이 활발한 만큼 해적들의 방문도 끊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찾아가는 곳도 상단과 해적들이 한창 싸우고 있었다.
“전부 빼앗아라!”
“남자는 바다에 전부 던지고, 여자는 배에 실어!”
“서, 선장님! 돌격상어가 이쪽으로 옵니다!”
“미친! 전원! 충격에 대비하라!”
쿵쾅!
우지끈-!
바다 위에서 상단을 탈탈 털고 희희낙락하던 해적선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으아아아~!”
“나, 날아간다?!”
“어머니~!”
풍덩! 풍덩!
수많은 해적이 바다에 빠졌다.
해적선에 설치된 마법과 대포로 대응해봤지만, 이건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메갈로돈의 습격.
동대륙에서는 매우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어머나♥”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구해드릴게요♥”
그리고 바다인어들이 사내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광경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여기서 문제.
흔한 일이 겹치면 어떻게 될까?
영역싸움이 벌어진다.
그리고 내가 메갈로돈을 메갈로돈이라고 부르는 두 번째 이유.
“Megaaaa!”
“Megaaa!”
비슷한 소리를 낸다.
평상시에는 돌격할 때조차 조용하지만, 천적인 바다인어들만 보면 흥분해서 시끄럽게 운다.
쿵쾅쿵쾅!
첨벙! 첨벙!
메갈로돈과 인어들의 싸움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수많은 달걀을 던져서 바위를 깨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야아아압!”
“Megaaaa~?!”
푹! 푹! 푹!
황금색 삼지창을 든 바다인어의 공격을 받은 메갈로돈이 피를 사방으로 뿌리며 숨을 거뒀다.
가출선배가 끼어들었다.
▷추억: 저 삼지창이다. 바다인어였던 아내에게 선물해준 무기. 우주에서 가장 귀한 2대 금속 중 하나인 로맨티넘이 2% 섞인 초강력 삼지창이다. 저걸 아내의 생일날 전까지 만든다고 난쟁이 수백 명을 갈아 넣었었지.
정말 낭만적이네요!
난쟁이들과 지모왕 말파리가 가출선배를 끔찍하리만치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아무튼,
“안녕? 생선비린내가 진동하는 바다인어 아가씨.”
“어머! 멋진 수컷 발견♥”
“...생선 대가리. 소금기 가득한 피부로 들러붙으려 하지 마라. 회 쳐버리기 전에.”
“말투도 멋져♥”
“......”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생선 대가리들은 정상적인 인간의 대화가 되질 않는다.
유부남인 내게 필요한 것은 이 바다인어가 아닌 황금색 삼지창, 혼돈의 유물이다.
이걸 가출선배의 부하들에게 보여주면, 원소유주인 교사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
이번에는 내가 빨랐던 걸까?
“조금 빨랐군.”
나는 오른팔을 죽은 메갈로돈의 시신 방향으로 쭉 뻗었다.
【어둠】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암흑물질이 삼지창에 찔려 죽은 거대한 상어를 순식간에 뭉개버렸다.
그리고 이때,
팟!
납작해지기 직전인 메갈로돈의 등지느러미 부위가 갈라지면서 수영복 차림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흥분: 그녀다! 오일을 바른 것처럼 매끈매끈한 피부의 감촉과 자극이 환상적이지!
너무나 당연한 걸까?
예쁜 암컷이면 종족을 따지지 않는 가출선배가 고른 아내답다.
어째서 메갈로돈의 뱃속에 숨어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측: 강한수 생도님께 들키지 않고 혼돈의 유물에 접근하려고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오오! 몸도 마음도 예쁜 교생 아가씨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렇다면...
“저 메갈로돈을 조종한 조련사도 근처에 있겠군. 아! 그전에 삼지창부터 챙겨야지. 내놔.”
“멋진 신사님~♬ 저와 함께 뜨거운 하룻밤을- 꺅?!”
“소원대로 뜨거운 매운탕에 처넣기 전에 당장 내놔!”
“어쩜 좋아~♪ 거친 모습이 딱 내 취향이셔. 심쿵♥”
“망할 물고기.”
그래도 일단은 황금색 삼지창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바닷속을 유영하는 가출선배의 마누라를 노려봤다.
빠르다.
더럽게 빠르다!
빛의 속도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봐온 인어 중에서 가장 빠를 것 같았다.
수영 선생쯤 되려나?
“하지만 도망치지 못하고 있군.”
그녀는 새끼를 빼앗긴 어미 새처럼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물속에서 아무리 빨라도 커다란 수족관 속에 갇힌 물고기 신세나 다름없으니까.
내가 이 황금색 삼지창을 가출선배의 부하들에게 가져가서 추적기를 만들면, 어디에 숨든 금방 붙잡히게 되리란 것을 그녀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숨바꼭질이다.
감찰단이 오기 전에 붙잡으면 나의 승리고, 그때까지 꼭꼭 숨어서 살아남으면 교사의 승리다.
자! 이제 어쩔 셈이지?
“Megaaaa!”
“Megaa!”
“Megaaa-!”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듯이 무수히 많은 메갈로돈이 내게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정말 물고기 대가리군.
나는 엉겨 붙으려는 바다인어를 밀쳐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메갈로돈도 결국은 물고기. 하늘을 날진 못한다.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의 일을 방해한 괘씸죄로 전부 몰살시킬 수도 있지만, 바다의 생태계 보전을 위해 피하기로 했다.
“Megaaaa...”
“Megaa...”
“Megaaa...”
누군가에게 정신지배를 받는 메갈로돈 무리는 허공에 뜬 나를 추적해오지 못했다.
하지만 저대로 놔두는 것도 좀 그렇군.
일해라, 마음의 정령왕!
내 공성추를 뺨으로 온종일 닦는 정령왕에게, 메갈로돈 무리를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주문했다.
뿅? 뿅!
마음의 정령왕이 성희롱을 멈추고 실력을 발휘했다.
그러자 나를 여전히 잡겠다고 수면 위로 폴짝폴짝 뛰면서 체력과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하던 메갈로돈 무리가 얌전해졌다.
대충 상황은 처리된 듯했다.
가출선배의 생선 마누라는 나중에 천천히 낚아주기로 하자.
“다음 장소로...”
촤아악!
물기둥을 일으키면서 무언가 기습적으로 하늘 높이 솟구쳤다.
...웬 기둥?
기둥이 아니다. 메갈로돈이 점프한 것도 아니다.
쉬이익-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 거대한 무언가를 성검으로 쳐냈다.
【척추】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효과가 없다.
퍼어억-
풍덩!
위에서 밑으로 내리찍는 무지막지한 물리력에 밀린 나는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또 뭔...”
“Kraaaa-!”
“...크라켄이군.”
나는 울음소리를 듣자마자 단번에 그 괴생명체의 정체를 파악했다.
크라켄(Kraken).
메갈로돈은 ‘조금 큰 상어’로 취급되지만, 이 녀석은 해양몬스터로 분류되는 초대형 문어다.
내가 기둥으로 오해하며 성검으로 쳐내려고 했던 것은 녀석의 다리 중 하나였다.
그렇다. 문어.
크라켄은 척추에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나의 정의로운 성검이 통하지 않는 연체동물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군.
“강한수 학생. 내게는 그대 또한 관찰해야 할 난폭한 야생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수면 위로 올라온 크라켄의 머리 위에 남자가 있었다.
능력치의 직업은 ‘교사’였다.
그래도 예의상 물어보기로 했다.
“너는 뭐냐?”
“존경심과 경애를 담아서 선생님이라고 불러야지요, 강한수 학생. 못 배운 짐승들도 당신보다는 예의가 바를 것 같습니다.”
“너도 도덕 선생인가?”
“사회 선생입니다. 무리를 이루며 더불어 사는 방법을 가르치지요. 사육사로 오해하진 마시길. 애완동물을 길러보는 것도 사회를 배우는 한 방법입니다. 정서불안, 인간불신, 공황장애 등의 증세를 보이는 용사들에게 귀여운 애완동물을 붙이는 심리치료를 주로 합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나는 무능한 동료들 때문에 1회차가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귀여운 애완동물을 선물 받은 적이 없다.
“챙겨줬습니다.”
“내 기억에 없어.”
“당신이 그 귀여운 생명체들을 태연하게 경험치로 바꿔버렸으니 당연히 없지요. 저는 무려 25번이나 시도하고 포기했습니다.”
“......”
“시시콜콜한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지요. 저는 다양한 몬스터를 부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신격에 대항할 최적의 몬스터로 크라켄을 골랐습니다.”
“과연...”
훌륭한 선택이다.
크라켄은 연체동물이라서 척추가 없고, 암흑물질의 몰랑한 파동도 버틸 수 있다.
공간을 짓눌러서 압살하기에는 덩치가 너무 컸다.
연구 좀 했네, 사회 선생!
“짐승을 사냥하려면 관찰은 필수지요. 자! 강한수 학생. 참패를 맛보기 싫다면 수영 선생님의 삼지창을 저에게 넘기십시오.”
“...이봐. 나를 관찰했다고?”
“그렇습니다.”
“푸하하하! 거짓말을 아주 입에 달고 사는군!”
“...크라켄에게 쓴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군요.”
“거짓말인 증거를 대주지.”
“하십시오.”
“첫째. 사회부적응자가 아닌 나는 귀여운 애완동물이 필요 없어. 둘째. 너는 관찰을 똑바로 하지 않았어. 셋째. 그 증거가 지금, 네 애완동물 위로 떨어지는 중이야.”
거짓말이 아니다.
거인제국에서 추앙받으며 이것저것 얻어먹은 나의 분신이 막 도착했다.
귀여움의 결정체!
인간의 가능성 농축액!
캡틴 판타지가 아담한 문어를 통통한 발로 밟았다.
“응애♪”
“Kraaaaa~?!”
사회 선생. 저 귀여운 생명체는 뭐로 막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