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21회차] 페이커-리
▶걱정: 괜찮을까요?
걱정할 필요 없어, 교생 아가씨!
자기가 뭐라고 동대륙과 서대륙의 교역을 막는단 말인가?
저 소용돌이만 없었으면 내 1회차 모험이 2년은 단축됐을 것이다.
“개념이 없는 새끼였지.”
용사 일행의 배가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이동하다가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좌초됐다.
그러면 탈출시켜주는 김에 동대륙 방향으로 보내주면 좋잖아?
그런데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마을 문제를 해결해주며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저딴 장애물은 원활한 모험을 위해서라도 사라지는 편이 낫다.
오! 도착했군.
소용돌이가 어떤지 확인하지 않고 일직선으로 무한의 바다를 가로지른 성과가 있었다.
판타지아 서대륙.
과거에는 초대형 파리 루시퍼 탓에 햇빛 한 점 안 들어오는 차가운 대륙이었지만, 현재는 중앙대륙 못지않은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마중도 나왔다.
“영원한 밤의 제국에 오신 마왕님을 환영합니다. 저는 황제 폐하와 대현자 섹스피어의 여식인...”
“암흑공주지.”
“네? 저는 공주가 아니라 황녀...”
“암흑공주.”
“...네. 마왕님께서 편하신 호칭으로 불러주세요.”
교장의 손자인 용사 리헬이 소지했던 천공선 오르가타를 참고해서 제작한 비행정을 탄 암흑공주가 공손히 답했다.
나는 갑판 위에 착지했다.
대단히 서두르고 있긴 하지만, 나는 환영 인사를 무시할 정도로 야박한 용사는 아니다.
그리고 도착했다는 게 중요하다.
허공에 홀로그램이 떴다.
-희망의 마왕이시여. 당신을 위해 혼돈의 유물을 모아놨습니다. 빼앗기 위해 몰려든 교사들은 어렵다고 판단되자마자 사정권 밖에서 제국의 백성들을 공격하면서 끊임없이 도발해오고 있습니다.
“교사가 아니라 양아치네.”
묻지 않았음에도 내가 원하는 보고를 하는 종결자 섹스피어.
홀로그램에는 그의 귓불을 요염하게 깨무는 서대륙 최고의 미녀 얼굴도 보였지만, 살포시 무시했다.
-어흠! 수집한 유물들은 그 비행정에 모아놨습니다. 교사들이 비행정에 접근하면 우주에서 밤의 태양으로 저격할 계획이었는데, 미끼를 물지 않는군요.
“그 정도 머리는 굴러가는 자들이니까.”
-또한, 주문하신 몰랑폰의 대량생산 준비를 마쳤습니다.
“훌륭해.”
-과찬이십니... 어흠! 여보. 중요한 이야기하는 중이잖소.
-하지만 섹스피어. 당신이 온종일 일만 하는 바람에 제 몸과 마음이 전부 굶주렸어요. 날름~
-크흐으음! 마왕이시여! 변동사항이 있으면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픽-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암흑공주는 부모의 애정행각에 익숙한지 별 표정이 없었다.
“작작 좀 하셔야 할 텐데요. 어머니가 특히 문제예요. 세월이 흐르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황제라는 자각이 없어지세요. 너무 유능한 아버지도 문제예요. 어머니의 방만한 치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덕분에 제국은 2000년 동안 문제없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어요. 그래서 어머니는 더욱 반성할 기미를 안 보이시고요. 아아! 정말...!”
...아니로군.
불만이 매우 많았다.
부러우면 너도 얼른 결혼하라고 한마디 해주려다가 말았다.
암흑공주는 용사의 동료 후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일 뒤에 세계가 고정될 텐데, 그녀가 누군가랑 결혼하면 모험에 참여할 가능성이 현격히 떨어진다.
아슬아슬한 모험은 총각과 처녀의 전유물이니까. 가족이 있는 유부남과 유부녀는 모험하지 않는다.
아이가 생긴다면 더더욱!
“그나저나 이 비행정. 규모가 무시무시하군.”
항공모함을 기차처럼 연결해서 하늘에 띄워놓은 것 같다. 실제로 방향을 틀 때마다 비행정이 부드럽게 휘면서 이동했다.
“마음에 드시나요?”
“무척.”
꼭 척추를 보는 것 같다.
“대현자 섹스피어가 고안한 마왕님의 전용선입니다. 척추처럼 생긴 마왕님의 검을 모델로 잡았고, 조종사가 필요 없는 전자동시스템으로 운전됩니다. 또한, 저는 극구 반대했는데요. 어떤 대륙이든 2초 만에 가라앉힐 수 있는 화력을 탑재한 대신, 장착된 무기 중 다수가 소모성이 매우 커서 장기전이 어렵습니다.”
“멋지군.”
설명하는 암흑공주가 이해 못 하는 것도 당연하다.
종결자 섹스피어는 현재가 아닌 300일 뒤를 보고 이 전용선을 건조했기 때문이다.
팡팡 사용해도 된다.
회귀하면 소모된 무기고가 다시 채워질 테니까. 그러니 장기전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이 비행정의 이름은?”
“몰랑포스.”
“몰랑포스...!”
“고대어가 섞인 합성어입니다. 간단히 풀이하자면 ‘몰랑의 강대한 힘’입니다.”
“이름까지 완벽해!”
“몰랑포스 내부에 안드로이드와 전투기를 생산하는 공장설비가 완비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재료가 없어서 가동을 멈춘 상태지만, 이 또한 자동으로 운영되며, 승무원은 전원 안드로이드입니다.”
“투자한 보람이 있군.”
완벽한 중매 한 번으로 근사한 선물을 받았다.
몰랑포스.
그 화력은 나중에 시험해봐야 알겠지만, 섹스피어가 호언장담할 정도라면 그냥 믿어도 되리라.
▷당혹: 내가 알던 망령왕 섹스피어는 시체와 망령을 다루는 흡혈귀였는데...
유행에 뒤처진 가출선배. 지금은 5차 교육과정입니다.
FFF급 선배가 싸지른 똥을 치우는 이전 교육과정들은 이 MAX급 후배가 싹 갈아치웠습니다.
몰랑포스!
몇 번을 불러도 질리지 않는 아주 멋진 이름이다.
▷불편: 젊은 시절의 실수는 생활기록부와 함께 사라졌다. 이제,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옛 아내들만 회수하면 완벽하지.
이 후배에게 지원만 빵빵하게 해주신다면 그렇게 되실 겁니다.
나는 암흑공주의 안내에 따라, 몰랑포스의 사령실에 보관된 혼돈의 유물들을 쭉 살펴봤다.
사실, 내가 봐선 모른다.
이 중에 옛 아내들의 소지품이 있는지는 선배만 안다.
▷결론: 하나 있다. 굽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붉은색 구두. 자신의 어린애 같은 체형을 싫어했던 그녀를 위해 특별주문한... 뭐냐?
가출선배의 취향은 종족과 국적만 안 가리는 게 아니군요.
이 후배는 감탄했습니다.
“이 구두를 챙겨서 본진에 가져가면 되겠네.”
나중에 추적하면 어린애 체형의 교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울: 후배여.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커 보이게 해주는 저 구두가 왜 버려졌다고 생각하는가?
...가출선배가 집을 뛰쳐나온 이유는 한두 개가 아닌 것 같네요.
암흑공주가 새 몰랑폰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이건, 마왕님을 쓰러트리기 위해 여신이 소환할 용사가 사용할 몰랑폰2입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사용설명서가 뜹니다.”
“참 친절하네.”
“마왕님을 위한 몰랑폰2G는 아직 제작 중입니다. 완성되면 지금 쓰시는 몰랑폰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이것으로 서대륙에서 내 볼일은 거의 끝나간다.
나는 구두를 포함한 모든 혼돈의 유물을 마신의 창고에 넣었다.
종결자 섹스피어가 놓친 유물을 찾는 것이다.
스르륵...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척추 안으로 넣은 후, 나는 전용선 몰랑포스의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냥 떨어지는 게 아니다.
슝! 슝! 슝!
떨어지는 밑 공간을 접으면서 낙하 방향을 조금씩 틀었다.
목적지는 나도 모른다.
그저, 우주 회장님이 알려주는 곳으로 향할 뿐.
▷황당: 후배여. 아무리 네가 우주의 관심을 받는다지만, 자신의 운을 너무 과신하는 것 아닌가?
괜찮습니다. 나름대로 확신이 있어서 밀어붙이는 거니까요.
퍽!
원래는 운석이 떨어지듯 크레이터가 생겨야 하지만, 땅에 떨어진 나는 밑으로 몸이 푹 꺼졌다.
착지한 대지의 아래가 텅 비어있다는 의미.
정의로운 MAX급 중매쟁이의 활약으로 서대륙의 환경과 풍경이 싹 바뀌긴 했지만, 땅속의 구조까지 변한 건 아니다.
나는 이곳을 잘 안다.
“용사의 시련동굴. 얼추 200년 만에 와보네.”
판타지아 북대륙에 숨겨진 ‘용사의 수련동굴’처럼 용사가 아닌 존재는 찾을 수 없는 비밀의 장소.
이건 시스템이랑 깊은 연관이 있기에 종결자 섹스피어의 능력으로도 이곳만을 탐색하지 못했을 것이다. 찾더라도 침투할 방법이 없고.
하지만 나는 용사.
정상적인 출입구를 이용하진 않았지만, 들어왔다는 게 중요하다.
▶깜짝: 선배님들이에요!
놀랄 거 없어, 교생 아가씨.
교사들이 섹스피어가 우주에서 수직에서 쏘는 폭격을 피하면서 안전하면서도 은밀하게 서대륙 내부로 침투하려면 지하밖에 없다.
그 최적의 장소가 이곳이다.
용사의 시련동굴!
물론, 교사는 용사가 아니다. 하지만 시설관리자란 신분으로 입장하는 게 가능하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강한수 학생. 정말 안타깝군요. 당신의 그 추리력과 판단력을 본교의 발전을 위해 사용했다면 많이 이들이 행복해졌을 텐데 말이죠.”
“원예 선생님. 당신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저도 잘 알지만, 이번만큼은 과감히 포기하셔야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말이 통할 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지리 선생님! 앞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풍수지리(風水地理)학적으로 저희가 선 자리는 용혈(龍穴)과 양기가 교차하는 생문(生門)으로 안전합니다. 반면에 저 어리석은 학생은 타고난 운명처럼 사문(死門) 위에 있습니다.”
이번에도 남녀 한 쌍이었다.
원예 선생(여)과 지리 선생(남).
두 교사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부정: 저건 동료와 친구를 쳐다보는 평범한 눈빛이다! 불길한 소리는 적당히 해라!
현실을 인정할 줄 모르는 선배는 잠시 놔두고, 나는 아까부터 내 감각을 어지럽히는 주변 공간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공간을 접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까부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 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지만, 어째선지 팔을 뻗어도 닿지 않는 지리 선생이 말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나는 학생들의 여행길을 짜는 지리 선생입니다. 강한수 학생이 어디로 이동할지 예측하는 건 일도 아니지요.”
“내 동선(動線)을 예측이라... 재미있는 말을 하네.”
“당신이 이곳으로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멀쩡한 출입구를 놔두고 천장을 부수고 난입한 건 예상 밖이었지만, 실수한 겁니다. 여기는 용사의 시련동굴. 당신에게 시련을 선사할 함정이 가득하지요.”
“많긴 하지.”
내가 1회차 때 힘겹게 극복했었던 함정들이 반갑게 환영해줬다.
독화살, 철구(鐵球), 갈고리, 부비트랩, 미로, 가시방석, 개미지옥, 화염방사기, 거울...
지금의 내 몸에는 생채기조차 주지 못했지만, 시련동굴의 효과로 레벨이 떨어진 영향은 있었다.
대단히 성가시군.
나는 재차 공간을 접으면서 지리 선생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공간】
【팔괘】
하지만 간섭으로 실패했다.
그는 만만했던 다른 선생들이랑 달리, 진학상담사처럼 신력을 빌려 쓰는 ‘신의 사도’였다.
마왕의 힘이 멀쩡했다면 무시해도 됐지만, 지금은 두 힘이 상쇄되면서 별 효과를 못 내고 있었다.
“포기하십시오. 당신의 추측대로 저는 신의 사도입니다. 단순한 지리 신생이 아닙니다. 무지한 당신이 이 완벽한 팔괘진(八卦陣)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습니다. 운만 믿고 오만하게 덤빈 대가를 치르세요.”
“...어이가 없네.”
“하하! 너무 쉽게 당해서 어이가 없긴 하겠- 커억?!”
“어이가 없어.”
나는 지리 선생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친 정의로운 용사의 성검을 어깨에 걸쳤다.
그가 허리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어, 어떻게...”
“당연한 거 아닌가?”
자리 선생에게 허리디스크를 안겨준 이 신력은 다른 신에게 빌린 힘이 아니다.
【척추】
오롯한 나의 것이다.
“몰랐어?”
“알 리가 없지 않은가! F급 학생이 신이라니! 척추에 환장한 어떤 신의 사도라고 들었거늘!”
환장하다니!
말이 너무 심하다.
“지리 선생. 척추는 사랑이야. 옆의 원예 선생도 명심해.”
“페이커-리! 거짓 보고를...!”
아무래도 ‘진학상담사 베이커리’가 입 다무는 바람에 교직원 일당들은 여태 몰랐던 모양이다.
어쩐지 부나방처럼 덤벼들더라.
아무튼,
“얼른 꿇어.”
척추를 바짝 숙이며 경배하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