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21회차] 먹이사슬
“원래는 지리 선생님의 팔괘진이랑 연계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실패했군요.”
원예 선생은 요정이었다.
푸른 나뭇잎을 엮어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밭에서 일하는 농부보다는 나이트클럽으로 놀러 온 아가씨 같았다.
▷황당: 후배여! 한눈에 딱 봐도 고결한 숲의 요정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녀를 보면서 어떻게 추잡한 남자들이랑 밤새 어울리는 광경을 떠올릴 수 있지?
그 추잡한 남정네들의 원탑이자 모범이신 가출선배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네요.
숲에서 종아리와 허벅지, 팔뚝이 훤히 드러난 옷을 입는 건, 정신 나간 겁니다.
훤히 노출된 피부가 풀과 나뭇가지에 긁힐 수 있고, 벌레들이 수시로 뭅니다. 넘어지면 무릎이 깨지는 건 기본옵션이고요.
야생동물을 만나면...
▷불편: 그녀가 숲에서 긁히거나 물리면 내가 돌봐줬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가출선배의 마음가짐과 철학에 이 후배는 탄복할 따름입니다.
나는 문제의 원예 선생을 향해 쭉 나아갔다.
하지만 방해를 받았다.
쾅! 콰앙! 쿵! 슝!
나무뿌리로 짐작되는 것들이 시련동굴 곳곳에서 튀어나오더니, 해파리의 촉수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원예 선생답군.”
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공간을 접으면서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끈질기게 시야를 가리는 나무뿌리 때문에 계속 놓쳤다.
원예 선생이 말했다.
“저는 원예를 담당하고 있어요. 모험해야 하는 탓에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원예를 가르치진 못하지만, 필요한 약초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요. 그리고 현재, 지리 선생님의 희생으로 식물들이 자랄 충분한 시간을 벌었어요.”
“성가시긴 하네.”
“자연의 순환은 계속됩니다. 포악한 당신이 이 대자연을 훼손하는 동안, 제가 뿌린 씨들이 다시 자라나서 그 일부가 되지요. 그리고 식물은 척추가 없어요. 강한수 학생이 사도가 아닌 신이란 사실은 놀랍지만, 저에게만큼은 통하지 않아요.”
“말도 많고.”
“꽃과 나무를 돌보며 숲이랑 대화하다가 생긴 버릇이지요.”
“대화라...”
나도 정령들이랑 항상 몸으로 대화한다.
내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불의 정령왕을 불렀다.
싹 태워버려.
주문을 받은 불의 정령왕이 아랫것들에게 턱짓으로 일을 떠넘겼다.
뿅! 활활! 뿅! 화르륵! 뿅! 화륵! 뿅! 뿅! 이글이글! 뿅! 활활! 뿅...
왕의 명령을 받은 최상급 셋이 각자 상급 수십을 부르고, 상급은 다시 수백의 중급을 불렀다. 그러자 중급은 또 수천의 하급을 호출했다.
그렇게 모인 불의 정령들이 수백만에 달했다.
산불이다!
“나무가! 풀이! 꽃이! 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악(惡)을 물리치려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해야 하는 법.”
“...제대로 해보죠.”
잿더미로 변해가는 식물들을 보면서 격분한 원예 선생이 새로운 씨를 뿌렸다.
그것은 꽃이었다.
처음 보는 보라색 꽃이었는데, 신나게 날뛰던 불의 정령들이 그 꽃향기에 노출되자마자 코를 막고 줄행랑을 쳤다.
“우에에엑-!”
“이 망할 정령이?! 어디에 토하려는 거야?!”
“하, 하지만 마약용사! 이건 너무나 끔찍한 악취다! 네 향기로 중화하지 않았으면 나도 아이들처럼 도망쳤을 거다!”
최초의 정령만이 아니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정령왕은 내가 방독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안면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악취를 풍기는 보라색 꽃 때문에 불의 정령들이 도망치면서 산불은 순식간에 진화됐다.
원예 선생이 다시 우쭐댔다.
“잿더미가 된 숲은 다음 세대를 위한 거름이 돼요. 강한수 학생의 끔찍한 만행도 대자연의 순환이란 거대한 흐름 앞에서 부질없어요.”
“그 꽃은 뭐지?”
“이름은...”
“효과만 말해.”
“...정령들이 싫어하는 향기를 내는 꽃입니다. 전 우주를 통틀어 판타지아 대륙에서만 자생하지요. 정령의 도움을 받는 요정들이 독초로 지정하는 바람에 멸종 직전까지 갔던 희귀한 꽃입니다.”
“정령이 안 된다면, 이건 어떨까.”
스르륵, 스르륵.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내 등에서 솟아났다.
성검보다 단단한 3쌍의 뼈대 주위에는 악(惡)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가시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쏠 수 있다.
두드드드-
인간으로 변신한 용들을 순식간에 몰살한 전적도 있는 정의로운 용사의 심판이다!
날개에서 정의가 빗발친다!
“이, 이건...!”
방금까지 우쭐대던 원예 선생의 허둥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무룩...
시무룩...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MAX급 용사님의 정의감을 견디지 못한 식물들이 싹 죽었다.
“이것이 정의다!”
“크윽! 세상에! 이 무슨 끔찍한 독성인가요...!”
“독이 아니라 정의다!”
“가시가 나무껍질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나무가 죽어버리는 이 맹독이 정의라고요?!”
“그렇다! 정의다!”
“강한수 학생. 당신은 진정 양심도 없단 말인가요! 사랑스러운 꽃과 나무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여놓고 정의를 운운하... 꺄앗?!”
정의를 인정하지 못하고 내게 맹비난을 퍼붓던 원예 선생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내 잘못이 아니다.
▷식겁: 후배여! 네가 아니면 누가 그녀를 다치게 한단 말인가!
편견은 나쁜 겁니다, 가출선배.
나는 원예 선생의 비명이 들려온 방향으로 공간을 접으며 순식간에 이동했다.
이젠 막아서는 식물이 없었다.
정의로운 용사의 가시가 곳곳에 박혀서 정화된 이곳에는 사악한 식물들이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헛구역질을 멈춘 마약정령이 딴죽을 걸었다.
“마약용사. 오염된 이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은 없다.”
“사악한 교직원 일당을 물리치려면 희생은 어쩔 수 없는 법. 원예 선생도 말했잖아? 시간이 흐르면 자연은 회복될 거라고.”
“아~주 오래 걸릴 것...”
“악취 나는 꽃밭에 던져줄까?”
“마약용사의 정의로움에 최초의 정령은 탄복했다!”
내게 조잘조잘 설교하던 원예 선생의 상태는 처참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옷으로 가리지 않은 그녀의 종아리, 허벅지, 팔뚝, 얼굴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가득했다.
“발을 헛디뎠군?”
내 접근을 막으려고 키운 가시덩굴 수풀에 자기가 빠져버렸다.
“아으으으...”
“오! 이건 나도 아는 식물이야. 던전에서 자주 봤지. 독성을 빨리 중화하지 않으면 능력치랑 상관없이 시커먼 흉터가 생기겠지만, 내가 알 바 아니지.”
“자, 잠시만...!”
쏙!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던 원예 선생을 마신의 창고에 밀어 넣었다.
시커먼 흉터가 안 생기게 조치해달라는 거겠지.
하지만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은 악당이랑은 협상하지 않는다.
▷당황: 후배여! 그녀의 몸에 흉터가 생기지 않게 해다오!
하하! 농담도 잘하시네요. 사악한 여자를 공짜로 치료해주다니요? 그런 정의롭지 못한 짓은 가출선배가 나중에 직접 하세요.
두툼한 엉덩잇살을 도려내서 흉터를 덮으면 될 겁니다.
▷다급: 도려낼 살이 어디 있다고 도려내! 당장 원하는 요구사항을 말하라! 후배에게는 사악한 교사일지 몰라도, 내게는 하나뿐- 사랑하는 아내 중 하나다!
이야기가 대충 정리된 것 같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 가시덩굴의 가시에 긁히면 색소가 신체의 구조를 변질시켜서 검은색 흉터가 남는다.
흉터를 도려내고 치유 마법을 퍼부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변질한 피부를 ‘정상’으로 인식한 탓이다.
그래서 국가반역에 버금가는 대역죄인의 이마에 ‘인권 없음’이라고 큼지막하게 쓰는 용도로도 이용된다.
치료법은 둘.
피부를 이식하거나...
“삼투압 원리로 색소가 자연스럽게 빠지도록 유도해야지.”
나는 가시덩굴의 줄기를 맨손으로 쥔 후에 물에 젖은 수건처럼 힘껏 쥐어짰다.
주르륵, 주륵...
녹색 수액이 내 붉은색 피와 섞이며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에 부드러운 모래를 반죽처럼 섞어서 진득하게 만들었다.
▷의문: 뭘 하려는 거지?
간단한 민간요법입니다.
전문약초꾼이라면 여러 약초를 혼합해서 사용했겠지만, 산속에서 그런 호사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서 고안해냈다.
뿅!
마신의 창고에서 원예 선생을 다시 꺼낸 나는, 방금 만든 치료제를 그녀의 온몸에 덕지덕지 발랐다.
“아아아악-!”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척추가 부러져서 전신불수인 그녀는 발버둥조차 치지 못했다.
많이 아프겠지. 상처에 모래를 넣고 비비는데.
주르륵.
상처에서 빠져나온 독소가 모래 속 수액에 섞여들었다.
그 뒤에는 물의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상처 부위의 모래를 깨끗하게 씻겨냈다.
나머지는 알아서.
나는 치료 마법을 구사할 줄 모르지만, 능력치가 높은 원예 선생의 몸은 빠르게 재생됐다.
척추 빼고.
“응급처치 끝. 흉터는 안 생길 거다. 옛 남편에게 고마워하라구?”
“......”
“왜?”
“강한수 학생. 당신이 어떻게 이 민간요법을 아는 거지요? 그 고통을 견딜 바에 흉터를 안고 살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사라졌는데.”
“바보 같은 질문인걸.”
동료들 때문에 돈은 없는데, 내 얼굴에 새겨진 검은색 글자는 어떻게든 지우고 싶어서 배웠다.
“...미안해요.”
“엥? 갑자기 뭔 소리야?”
“미안해요. 풀어달라는 구걸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많이 아픈 모양이군.”
쏙!
나는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원예 선생을 마신의 창고에 넣었다.
▶의문: 선배님이 갑자기 왜 저러시는 거예요? 검은색 글자? 저만 이해를 못 하는 건가요?
별거 아니야, 교생 아가씨!
“시시한 이야기지.”
1회차 때, 나는 살인누명을 써서 어느 왕국의 법정에 스스로 출두했던 적이 있었다.
체포하러 온 경비병들을 제압한 동료들은 도망치자고 난리 쳤지만, 나는 떳떳했기에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웬걸?
누명이 아니라 진짜였다.
훈련으로 지친 내가 여관에서 곤히 잠든 사이에 ‘용사의 동료’들이 왕족을 살해한 것이었다. 가엾은 소녀를 지키기 위해.
주모자로 ‘용사’가 지목됐다.
그 살인현장에는 없었지만, 용사의 동료들이 저질렀기에 모든 책임은 용사가 뒤집어써야 했다.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처형되지 않았다.
나는 고문받지 않았다.
내 동료들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는 분통을 터트렸지만, 용사가 죽으면 마왕 페도나르에 의해 세상이 멸망하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했다.
대신, 얼굴에 낙인을 찍었다.
▶우울: 어째서 도망치지 않으셨어요? 강한수 생도님의 잘못도 아니었잖아요.
내가 도망치면 누군가 대신 벌을 받기 때문이야, 교생 아가씨.
방조죄(幇助罪).
흉악한 용사의 동료들이 왕족을 살해할 때까지 수수방관한 죄다.
방조한 자들을 처형하고, 이 죄인을 낳은 부모도 벌하고, 형제자매들은 평생 감시를 받는다.
그걸 아는데 동료들처럼 ‘나쁜 왕족을 처리해서 기분 좋네!’라고 깔깔 웃으며 도망칠 수 있겠는가?
나도 억울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잘못을 끌어안고 순순히 벌을 받았다.
▷불편: 후배여. 너의 사고방식은 용사에 어울리지 않는다. 판타지 세계의 그 어떤 용사도 너처럼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선배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철학: 맞서 싸워야지. 네 잘못이 아닌데 끌어안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잘못된 나라를 엎고 새 왕조를 세웠...
“하하하!”
제가 신성제국의 황제를 바꿔봐서 아는데, 그럴 바에 도망치는 편이 훨씬 피해가 적습니다.
왕족은 마음에 안 드는 백성을 괴롭히고, 용사는 마음에 안 드는 왕족을 치워버리고...
왕족이나 용사나 차이가 없다.
단순한 약육강식일 뿐.
“누군가는 그 먹이사슬을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끊을 수 없다면?
나는 무능한 용사를 그만두겠다.
그리고...
빠직--!
스스로 신(神)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