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26화 (326/430)

 326화

[21회차] 척수

“마약용사...?”

“...이거, 놀랍군.”

우연의 우연이 우연히 겹쳤다.

사악한 원예 선생이 뜬금없이 내게 ‘미안해요.’라며 사과했고, 이에 예쁜 교생 아가씨가 ‘왜?’라고 질문한 것이 계기였다.

【척추】

나쁘지 않은 신격이었다.

하지만 ‘척추’가 없는 대상에게 취약하다는 허점이 있었다.

야만적인 세계에 정의를 우뚝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종족: 퍼펙트 데몬

▷레벨: 1

▶직업: 탈마(용사=마왕)

▶스킬: 경추GGG 흉추GGG

요추GGG 천추GGG

미추GGG…

▶상태: 성골

접근법이 잘못됐다.

나는 습관처럼 타인의 척추를 평가해왔으면서 정작 내 척추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 척추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단지, 이 우수한 척추를 활용할 생각을 못 했다는 의미다.

우드득.

우득.

판타지 세계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완벽한 척추로 진화해간다.

인체를 구성하는 경추(목뼈) 7개, 흉추(등뼈) 12개, 요추(허리뼈) 5개, 천추(엉덩이뼈) 5개, 미추(꼬리뼈) 4개가 조화를 이룬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감각이었다.

【척수】

척추는 단순히 몸통을 지탱해주는 뼈가 아니다.

이 안에는 중추신경 일부분을 담당하는 척수(脊髓)가 들어있다.

여기에는 뇌에서 보내는 명령을 전달하는 운동신경, 뇌로 정보를 보내는 감각신경이 모여있다.

즉, 척수는 뇌와 근육을 이어주는 중개업체인 셈이다.

이게 완벽해진다면?

“오오...”

“마약용사! 감탄만 하지 말고 고귀한 정령에게도 가르쳐줘라!”

“쉽게 말해서...”

나는 주먹 쥔 오른손을 어깨선 뒤편까지 천천히 당겼다.

대뇌피질에서 운동신경을 타고 밑으로 내려온 명령이 척수를 지나 온몸의 골격근을 수축시킨 것이다.

여기까진 평범하다.

나는 여기서 다시 명령한다.

뒤로 당겼던 오른손을 앞으로 내지르라고.

【척수】

중추신경을 지나던 명령 신호가 척수에서 ‘변이’를 일으킨다.

오른손을 전방으로 내지른다는 명령은 같지만, 여기에 ‘신(神)답게’라는 옵션을 추가했다.

그리고 이 변이된 신호를 받은 골격근도 변이를 일으킨다.

나는 ‘신답게’ 오른손 주먹을 전방에 내질렀다.

팡야-!

그 소리는 홀인원을 노리는 골프공이 날아가듯 상쾌했다.

판타지아 서대륙 지하에 숨겨진 용사의 시련동굴이 분쇄된다.

판타지 시스템 보호를 받는 까닭에 종결자 섹스피어조차 건드리지 못했던 시설물이, 내 주먹 한 방에 파괴된 것이다.

이것이 척추의 힘이다!

▷신중: 자신을 강화했군...

멍청한 정령도 이해하기 쉽게 요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출선배!

그 직후, 몰랑폰이 울렸다.

“왜?”

-희망의 마왕이시여! 조금 전에 서대륙 동부에서 방대한 힘이 감지됐습니다. 힘의 파동으로 보아선 새로운 신의 참전이 예상...

“나야.”

-허허허! 귀찮게 해드려서 송구스럽습니다. 마왕님께 힘을 보태고자 비행정까지 건조했는데, 아무래도 더 업그레이드해야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겠- 크흠! 여보. 중요한 대화 중에는 거길 만지지... 쓰으으읍! 나중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삑-

종결자 섹스피어가 연락할 정도로 위력이 굉장했던 모양이다.

이건 궁극기(Ultimate skill) 같은 회심의 단발성 공격이 아닌, 흔한 평타(Normal attack)인데 말이지.

“다음 장소는... 어?”

실수했다!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우주 회장님의 관심이 또 식어버렸다.

예지력에 가까운 행운이 사라지면서 더는 사악한 교사와 유물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게 됐다.

...너무 성급했군.

승패의 향방을 알 수 없는 박진감 넘치는 대결을 원하는 우주 회장님의 취향을 간과했다.

“마약마왕.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슬슬 합류해야지.”

나 혼자서 가출선배의 마누라 6명을 붙잡았다. 여기에 혼돈의 유물도 추가로 1개 구했으니, 실질적인 성과는 7명인 셈이다.

나머지 2명쯤은 가출선배의 부하들이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짜증: 후배여. 얄미운 소리는 본능처럼 잘하는구나. 내 부하와 병사들은 무능하지 않다. 네가 우주의 관심으로 지나치게 빨랐을 뿐.

그래서 잡았나요?

▷불편: 불필요한 교사들의 방해로 아직은 유의미한 성과가 없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보낸 정보를 토대로 혼돈의 유물은 성공적으로 수집했다는군. 북대륙의 본진으로 돌아가서 추적장치를 받아라.

나는 묻거나 따지지 않고 판타지아 북대륙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둠】

【척수】

공간을 접어서 거리를 좁히고, 척수로 강화된 다리힘으로 발돋움하며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러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하아... 여기도 완전히 부숴놨네. 이, 이건 캡틴 판타지의 엉덩이 자국 같은데?! 이미 떠났겠지? 휴우! 내가 첫 번째 아내라서 참는다.’

‘Seeeex~!’

섹시하게 우는 가오리를 탄 쏘시아가 내 이동 경로를 뒤따라오면서 피해를 복구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마법봉이 좌우로 휘둘러질 때마다 주변 지형지물이 시간을 되감듯 뚝딱 복구됐다.

...걱정할 필요 없겠군.

인정하기 싫지만, 쏘시아 같은 동료가 1회차에 있었다면 모험이 덜 힘들었을 것 같다.

▶빼꼼: 강한수 생도님. 대선배님께 연락이 왔는데요.

진학상담사 베이커리가?

▶긍정: 네. 성함은 틀렸지만, 직책은 그분이 맞아요.

이곳은 내 권능 ‘어둠’으로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다.

그래서 격리하기 전에 침투한 교사는 탈출할 수 없고, 후발주자들은 진입하지 못한다.

당연히 내부사정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외부사정을 전혀 모르고.

단, 유일한 예외가 교생 아가씨다.

▶수줍: 대단한 건 아니에요. 아차! 대선배님께서 준비가 끝났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무슨 준비냐고 조심스럽게 여쭤봤는데요. 그렇게만 전하면 강한수 생도님이 알아들으실 거라고 하셨어요.

준비가 끝났다고? 베이커리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 다른 얘기는 없었고?

▶반짝: 네! 그래서 무슨 준비가 끝났다는 거예요?

...아직은 교생 아가씨에게 말해줄 수 없어. 교생 아가씨가 아무리 예뻐도 이것만은 안 돼.

▶뿌잉: 보안이 매우 중요한 사안인 모양이군요. 조금 섭섭하지만, 강한수 생도님이 말씀해주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이해해줘서 정말 고마워! 몸과 마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생 아가씨!

절대로 무슨 준비인지 몰라서 감춘 게 아니다.

“다 왔군.”

교생 아가씨랑 대화하는 사이, 북대륙에 세워진 가출선배의 침투거점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저 외계인 요새는 나중에 폐기하지 말고, 우주체험 던전으로 재활용하면 딱 좋을 것 같다.

설정은...

색욕에 찌든 가출용사의 침공부대가 머물렀던 지옥의 방공호!

▷식겁: 그러지 마라!

가출선배는 일이 끝나면 전부 회수해가고 싶으시겠지만, 제 요구조건은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아! 거절은 안 받습니다.

이건, 원예 선생의 흉터를 치료해준 대가니까요.

▷제안: 좀 더 무리한 요구를 할 줄 알았는데... 좋다. 내가 한 약속이니 지키겠다. 하지만 색욕에 찌든 용사의 지옥의 방공호란 왜곡된 설정은 치워라. 생활기록부를 기껏 말소하고 또 흑역사를 만들 순 없다.

가출선배. 그 부분은 나중에 추가합의를 하도록 하지요.

▷소름: 네가 용사란 이름을 달고 신격을 달았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군...

나는 방공호에 착지했다.

그곳은 이미 판타지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총화기가 아무렇지 않게 굴러다니는 전쟁터였다.

파괴된 안드로이드 파편이 방공호 주변에 널려 있었다.

어디 기계뿐일까.

“컥!”

“으아악?!”

“꺄앗!”

사람도 수없이 죽었다.

혼돈의 유물을 회수하려는 교사들과 그것을 지키는 가출선배의 군대가 쉴 새 없이 충돌했다.

빨강도 보였다.

“유물을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하나라도 빼앗기면 살아서 집에 돌아갈 생각은 포기해라!”

나는 방공호의 수비군을 지휘하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 빨강.”

“느긋하게 인사할 시간이 없다. 생포한 교사들과 혼돈의 유물을 우리에게 넘기고 방어를 돕- 꺅?!”

“교사 한 마리 추가.”

“어, 어떻게 눈치... 켁켁!”

“안전한 뒤편에서 지휘할 때부터라고 하면 알아듣겠어?”

내가 본 빨강은 훌륭한 지휘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최전선에서 적들을 몰살시킬 사령관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는 개인전에 특화된 용인(드레고니안)보다는 원래 용의 형태가 훨씬 도움이 된다.

내 말이 틀렸어?

스르르...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정체를 완벽하게 감추고 있던 교사가 진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쪽같았는데.”

“하지만 우주에서 활약하는 막강한 용의 전투력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었겠지. 그래서 어울리지 않는 현장지휘관을 연기한 거겠지만.”

“큭.”

“이젠 하나 남았군.”

“늦었어요. 저는 소극적인 학생들의 친구가 되어 용기를 심어주던 연기 선생이죠. 제 연기에 속은 병사들이 그 골동품들을 이미 엉뚱한 장소로 옮겼어요. 거기에 대량의 폭탄이 심어져 있는 줄도 모르고.”

콰아앙-!

방공호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에서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내게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붙잡힌 연기 교사의 창백한 얼굴에 승자의 미소가 그려졌다.

“뭐가 즐거워?”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저 같은 연기자는 모두를 속였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껴요.”

“그래? 그러면 내가 왜 미소를 짓는지 맞춰봐.”

나는 연기 교사랑 숨결이 닿는 거리에 얼굴을 붙인 후,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히이익-?!”

“꼭 겁먹은 얼굴 같네. 연기 실력이 정말 수준급인걸?”

“으으...”

졸졸...

그녀의 다리 사이로 노란 액체가 수줍게 흘러내렸다.

“...너무하네. 이런 것까지 실감 나게 연기할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다음 전개는 마음에 들어.”

휘익-

나는 연기 선생의 목을 붙잡은 채, 오른발을 중심축으로 팽이처럼 몸을 회전하며 왼발을 휘둘렀다.

일명, 뒤돌아차기.

퍽!

발차기는 확실하게 들어간 것 같은데,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제법인데?

▶깜짝: 대선배님이세요!

이번에도 남자 선생이었다.

이쯤 되면, 가출선배의 아내들이 외로워서 직장 동료랑 새살림을 차렸다는 게 학계의 정설 같다.

그가 말했다.

“강한수 학생. 반갑습니다. 저는 판타지아 교육장의 존경받는 지도자이신 파르마엘 교장님께 교감의 지위를 명받은 듀레쥬르 교감입니다.”

“뚜레쥬르?”

“듀레쥬르입니다. 요즘은 실종된 그분의 대행으로 바빠서 수업을 못 맡고 있지만, 체육 교사입니다. 장기는 창술이지요.”

“오오...”

농담이 아닌 것 같다.

뚜레쥬르 교감의 오른손에는 휘황찬란한 창이 쥐어져 있었다.

저걸로 찔리거나 베이면 조금 아프겠는걸?

【반동】

중간보스 격인 교감답게 신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반동이라?

“아주 유용한 힘이지요. 아! 대화를 계속하기 전에 연기 선생님부터 풀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를 위해 밤마다 변신해주는 그녀가 다치는 걸 원치 않습니다.”

“변신?”

“새하얀 간호사복과 검은색 가터벨트의 조합은 완벽합니다. 여기에 상하반동까지 더해지면...”

“체육 선생답네!”

“하하! 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자! 강한수 학생. 연기 선생님을 풀어주고 남자답게 한 판 붙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승자가 미녀를 차지하는 겁니다. 고대부터 이어진 사나이들의 규칙이지요!”

“아! 그거 좋지. 그런데...”

“망설이지 말고 편히 말하십시오. 저는 교감입니다. 학생의 상담이라면 지긋지긋할 정도로 해봤습니다.”

“창을 들어봐.”

“...그게 무슨- 크어어어억~?!”

푹!

뚜레쥬르 교감은 손에 쥔 창을 살짝 들자마자 도로 땅바닥에 지팡이처럼 찍었다.

【반동】

【척추】

저 반동이란 신격의 효과가 뭔지 모르지만, 뚜레쥬르 교감의 취미생활은 오늘로 안녕이다.

“덤벼.”

“이, 이럴 리 없습니다! 반동으로 척추가 부러져야 할 대상은 제가 아니라 당신이... 설마?! 페이커-리! 나를 속였구나!”

“베이커리를 찾는 교사가 많네.”

팡야-!

교감을 물리친 용사님은 연기 선생의 가터벨트를 압수했다.

▶질문: 강한수 생도님. 그것도 준비에 필요한 물건인가요?

...아차. 깜빡했다.

이 가터벨트는 우리의 계획에 꼭 필요한 물건이야, 교생 아가씨!

“마약용사! 수상하다!”

“자! 계속 찾아보실까!”

번뇌하는 이 가련한 용사를 용서하소서. 몰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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