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21회차] 신탁
“이 장치는 폐하의 힘이 깃든 물건의 원소유주를 추적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용할 때마다 물건에 담긴 힘이 줄어들기 때문에 잠깐만 가동해야 합니다.”
방공호 중심부에서 일하는 연구직 병사가 내게 설명해줬다.
빨강을 흉내 낸 연기 선생의 활약으로 장치가 거의 쓸모없게 됐지만, 내가 서대륙에서 확보한 혼돈의 유물들은 아직 무사했다.
“이해했으니 빨리 실행해.”
“네. 구두를 저 유리관 안에 넣어주십시오.”
톡.
내가 올려놓자마자 기계가 활성화되고, 거대한 판타지아 지도 위에 교사의 위치가 표시됐다.
“중앙대륙이군.”
이곳을 제외한 모든 대륙을 한 번씩 거쳤으니, 슬슬 한 번쯤은 걸릴 때가 됐다고 생각했었다.
현재까지 전적은 이랬다.
북대륙: 도덕, 연기&체육(교감)
남대륙: 수학&미술, 가정&생물
동대륙: 수영&사회, 화학&기술
서대륙: 원예&지리
중앙대륙: ?
단독행동했던 도덕 선생을 제외한 나머지는 남녀 1쌍의 오붓한 커플로 움직였다.
북대륙에서 둘, 남대륙에서 둘, 동대륙에서 둘, 서대륙에서 하나.
총 7명으로, 남은 가출선배의 아내였던 교사는 2명이었다.
이곳 상황도 빠르게 정리돼갔다.
“교감님이 쓰러졌다!”
“헉! 듀레쥬르 님께서?!”
“이, 이럴 수가...”
“후퇴! 작전상 후퇴!”
뚜레쥬르 교감이 쓰러지자마자 전의를 상실한 교직원 일당들은 썰물처럼 전장을 이탈했다.
“마약용사. 저들을 안 잡느냐?”
“놔둬.”
지금은 중앙대륙에 숨어있는 교사를 찾는 게 급선무다.
추적장치 안에서 교사의 구두를 회수한 후, 나는 목적지까지 일직선으로 이동했다.
*
중앙대륙의 요정왕국.
4차 교육과정 때까지는 이곳이 요정들의 마지막 터전이었지만, 5차 교육과정에선 크게 바뀌었다.
요정들의 고향인 남대륙에 ‘요정제국’이 무사히 건국되면서 중앙대륙까지 올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도 중앙대륙에는 4차 교육과정 때처럼 ‘요정왕국’이 존재한다.
조금 다른 형태로.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현명한 요정이신 엘브하임 폐하의 치세에 불만을 품은 벌레들이 탈주해서 세운 나라입니다. 판타지아 세계에 불필요한 해충들이니 교사랑 함께 소멸시키셔도 무방해요.)
여기까지, 남편 바라기 그림자A의 주관적인 설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중앙대륙의 요정왕국은 4차 교육과정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인간혐오가 극심한 나라였다.
아! 정정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종족을 얕잡아보는, 요정우월주의가 극에 달한 나라다.
(열등한 동족을 버리지 않고 사랑으로 보듬어주신 엘브하임 폐하의 자비로움을 악용한 벌레들입니다. 그분이 독하게 마음먹으셨다면 저런 반동분자들의 나라가 건국될 일은 절대 없었을 텐데!)
그림자A.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좀 조용히 해봐.
나는 추적장치의 지도에 표시된 정확한 좌표로 빠르게 이동했다.
나라의 중심부에 자리한 왕궁 근처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금 외진 곳이었다.
“흐음~ 집회인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숲이었는데, 사슴을 탄 요정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풀과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커다란 바위였다.
근처 나무에 사슴을 묶어둔 요정들이 바위 주위로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모인 바위 위에 한 요정 여성이 당당히 선 채로 연설하고 있었다.
“머나먼 과거, 최초의 요정왕이신 페닉스 님께서 추악한 이 땅을 슬기롭게 다스리고자 태양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은 태양의 아들이며, 모든 요정의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무능함에 실망하신 아버지는 자신의 요추(腰椎) 4번과 5번을 뽑아서 두 반려자를 만드셨으니, 4번은 2대 요정왕이 되었고, 5번은 정령을 다스리는 여신이 되었습니다.”
“오오!”
“오!”
“오오오!”
내가 아는 페닉스랑 너무 달랐지만, 저 요정의 연설을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이게 건국신화(建國神話)란 걸까?
은근히 재미있다.
“거인들의 신(神) 응애가 우리 아버지의 위대한 태양의 날개를 빼앗고, 거인들의 왕(王)은 그분의 육신과 이름을 훔쳤으며, 마왕 파르마몬은 여신을 살해하고 순진한 정령들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2대 요정왕의 아들인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은 그들과 동맹을 맺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배신자!”
“사기꾼!”
“위선자!”
요정들이 사방에서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림자A가 바로 발끈했다.
(용사님! 저 벌레들을 제가 처리하게 해주세요! 엘브하임 폐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바퀴벌레나 주워 먹고 있었을 것들이!)
워워. 진정해. 소설은 소설일 뿐, 흥분하지 말자!
판타지 소설의 시조 격인 건국신화는 원래 과장되기 마련이다. 그 난봉꾼 페닉스가 슬기로운 왕으로 서술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당장 위인전만 읽어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잖는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사춘기를 겪지 않은 외계인처럼 묘사된다.
물론, 나는 겪지 않았다.
▷황당: 후배의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조금 부럽군. 네 사춘기에 휘말려서 모교가 이 꼴이 됐다고 본다만? 아무튼, 그녀는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컸군. 가슴 빼고.
가출선배의 메시지에서 무척 유감이란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 발언만으로도 이혼 사유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반박: 무슨 소리!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지. 엘브하임에게 듣지 못했는가? 아름다운 요정은 가슴이 좁아도 마음만은 넓다고.
만날 때마다 들었습니다.
마음만 넓은 딸을 MAX급 용사님에게 떠넘기려고 얼마나 수작 부리던지 말도 마십시오.
하여간 그 이야기는 바위 위에서 연설하는 요정부터 처리한 후에 마저 하지요.
탁!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맨홀 뚜껑이 없는 하수구처럼 생긴 어둠의 구멍이 요정의 발아래에 형성됐다.
“우리는 아버지의 요추 5번으로 빚어진 고귀한 혈통입니다. 요정이란 자부심을 품고... 얍!”
요정 교사의 반응속도는 생물 선생에 버금갔다.
조금 전에 쓰러트린 교감처럼 체육 선생이라도 되는 걸까?
무관심했던 능력치를 살펴봤다.
▶종족: 엘프-데우스 엑스 마키나
▶레벨: 999+
▶직업: 교사(학력→능력↑)
▶스킬: 날조G 선동G 신앙G
위선ZZZ 매력ZZZ…
▶상태: 강림, 신위, 휘광, 어둠
...멋진데?
트리플 G등급.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요정 교사의 종족이었다.
▷종류: 종족
▶명칭: 엘프-데우스 엑스 마키나
▶등급: 신화
▶신화1: 아무튼 신이다.
▶신화2: 우주의 시선을 받는다.
▶신화3: 시공간을 다룬다.
▷특성1: 날조되었다.
▷특성2: 불완전하다.
▷특성3: 전설이다.
▷종족1: 생명력이 무한하다.
▷종족2: 보정된 가능성을 내포한다.
대충 훑어봤을 뿐이지만, 일개 교사가 가지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종족이었다.
G등급 날조.
저 스킬 효과가 틀림없었다.
내가 이럴 것 같아서 스킬 ‘날조’를 한계돌파 재료로 갈지 않고 끝까지 놔뒀던 건데, 앞서간 선구자가 이미 있었다.
다수의 신격이 느껴졌다.
【휘광】
【암흑】
【신탁】
신격 ‘휘광’은 최초의 천사인 교장의 힘이었고, 친숙한 ‘어둠’은 내게서 강탈하다시피 빌린 것이다.
마지막의 ‘신탁’은 교육장 밖의 신에게서 비롯된 힘이었다.
원리는 대충 알겠다.
모든 스킬이 다 그렇지만, ‘날조’는 판타지아 교육장을 구성하는 두 신격으로 만들어졌다.
누군가 능력치로 ‘신’이 된다면 행사하는 ‘신의 기적’도 휘광과 어둠이 될 수밖에 없다.
“제법이군.”
내가 한때 추구했던 최종형태가 눈앞에 있었다.
어둠의 구멍에 삼켜지지 않고 허공에 뜬 요정 교사의 등에 5쌍의 에테르 날개가 솟아났다.
오른쪽 날개는 빛의 백색.
왼쪽 날개는 어둠의 흑색.
끝으로, 순수혈통인 요정 왕족에게는 절대 안 나타나는 황금색 머리카락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한마디로,
“오오!”
“여신이시여!”
“기적이다!”
누가 봐도 완벽한 신의 자태였다.
요정 교사가 말했다.
“일단은 인사를 해두지요. 저는 학생들의 리더쉽을 키워주는 진로상담사 겸 교무부장입니다. 하반신의 지배를 받았던 전 남편이랑 티끌만큼도 엮이기 싫어서 한걸음 물러나 있었는데,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군요, 강한수 학생.”
“최초의 용사가 왜?”
“그 벌레 이야기는 제 앞에서 꺼내지도 마세요. 제 인생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흑역사입니다.”
“...듣고 있어.”
“아! 그런가요? 벌레 놈. 아직도 암컷의 암모니아 냄새만 맡아도 발딱발딱 서면서 환장하고 날뛰냐? 퉤! 내 눈에 띄지 마라.”
요정만을 위하는 고결한 여신 같았던 이미지가 단숨에 부서졌다.
가출선배, 싫다는데요?
▷충격: 소박해서 귀여웠던 그녀가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이상적인 하렘을 추구한 수컷의 갈기갈기 찢긴 마음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꾸욱-
나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힘껏 도약했다.
공간을 접으며 빠르게!
“어머! 마왕이자 용사님. 벌써 잊으셨나요?”
【휘광】
【암흑】
내가 접었던 공간이 늘어나고, 주변의 시간이 느려졌다.
그 탓에 도약했음에도 제자리에 선 것 같은 상태가 됐다.
나도 이 정도는 예상했다.
【척수】
스스로 육체를 가속했다.
내 뇌에서 시작된 명령이 온몸의 말초신경을 통해서 확산했다.
더욱더 빨라지라고.
신속(神速)을 보여달라고.
나는 느려진 공간 속에서도 평범한 속도로 움직였다.
“내게 안 통해.”
“파르마엘 교장님을 운으로 쓰러트린 건 아니란 소리군요.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요?”
【신탁】
집회에 모인 모두가 볼 수 있는 높이로 떠오른 교무부장.
그녀는 깍지낀 양손을 평평한 가슴 앞에 붙이며 말-
“명백한 성희롱입니다! 평평하다는 불필요한 서술을 왜 넣는 거죠?!”
“내 생각을 읽지 마.”
허락도 없이 멋대로 읽은 교사가 잘못이다.
“큭! 신으로서 명합니다! 고귀한 신의 가슴을 비하한 저자를 쓰러트리세요!”
【신탁】
정의로운 용사의 도발에 넘어가서 풀렸던 신력이 다시금 발동했다.
나는 그 미지의 효과를 경계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때, 집회에 모인 요정들이 그녀의 신탁에 반응을 보였다.
“신탁이 내려왔다!”
“고귀한 여신님을 위해!”
“평평한 가슴을 지키자!”
“힘이 솟아나요!”
팟!
파앗!
하루살이나 다름없는 전투력을 보유한 요정들이 강화됐다.
너무하다 싶을 만큼.
▷종족: 엘프
▷레벨: 195
▷직업: 광신도(신앙→광기↑)
▷스킬: □□ZZZ □□ZZZ
신앙ZZZ 채집D 농사D…
▷상태: 고양, 신탁
블랙박스처럼 텍스트가 깨진 ‘미구현 스킬’이 추가됐다.
전혀 위협이 안 되는 비전투원이었던 수천 마리의 요정이 갑자기 ‘신의 군대’로 돌변했다.
어떤 효과의 신력인지 알겠다.
그렇다면 나도 질 수 없지!
【척수】
위대한 존재를 향한 내 신실한 마음을 척추에 담아서 외쳤다.
“몰랑하라-!”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은, 악(惡)의 선동과 날조로부터 절대 등을 보이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맞서 싸울 것이다.
몰랑교 제1 사도 강한수.
평평한 이단자들 앞에서 몰랑한 마스터 몰랑을 찬양하리라!
들어라! 그분의 몰랑을!
보아라! 그분의 몰랑을!
느껴라! 그분의 몰랑을!
이 음성을 들었다면, 우매한 너희들도 이제 몰랑할 것이다.
“몰랑교가 또...!”
“이, 이것은 몰랑!”
“나는 신탁- 큭?!”
신탁을 듣고 내게 덤벼들려던 요정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서 능력치는?
▷종족: 엘프
▷레벨: 195
▷직업: 농부(토지→농사↑)
▷스킬: 채집D 농사D 신앙E
휴식E 민첩E…
▷상태: 혼절
다들 원래대로 돌아갔다.
간단하군?
“어, 어떻게 이런...”
“사악한 교무부장. 각오는 됐겠지? 몸과 마음이 딱딱한 너를 몰랑하게 해주마.”
“당신! 태연하게 교사를 성희롱하고도 양심이... 꺅?!”
“나는 정의다!”
【척추】
딱딱한 척추를 몰랑하게 해주겠다는데 성희롱이라니?
피해망상이 심한 것 같다.
내 정의로운 주먹에 날개가 파괴된 교무부장이 발악하듯 외쳤다.
“역사 선생님! 도와주세요-!”
“멈춰라!”
“아! 정말 와줬군요!”
“늦어서 미안해! 안 다쳤어?”
“네!”
비열한 감속을 압도하는 신속(神速)으로 따라잡은 내가 교무부장의 척추를 심판하기 직전.
초대하지 않은 교사가 난입했다.
이젠 볼 것도 없었다.
“또 커플이군.”
정의구현으로 바쁜 기러기 남편은 서러워서 어디 살겠나!
정의로운 용사님의 이름으로 너희를 용서하지 않-
“비겁한 남편~!”
“Seeeex~!”
몰랑몰랑~!
...방금 한 말 취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