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28화 (328/430)

 328화

[21회차] 인간의 가능성

“쏘시아. 뒷수습은 어쩌고 여긴 왜 왔냐?”

“다 끝났으니 왔지!”

가출선배의 방공호를 지켜달라는 부탁도 어기면서 내 발자취를 따라다닌 이유는 묻지 않았다.

연기 선생.

빨강으로 둔갑한 그녀가 ‘여긴 내게 맡기고 남편을 도와줘라!’라고 말해서 깜빡 속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교실이 초토화되는 건 교직원들도 원치 않았기에 어떻게든 창조신 판타지시아를 움직이고 싶었으리라.

뭐, 좋다.

“지금부터 주변 신경 안 쓰고 싸울 테니, 실시간으로 수습해줘.”

“야...!”

“첫 번째 마누라만 믿는다!”

“응!”

정의로운 남편은 부수고 비겁한 마누라는 복구하고.

환상적인 커플이다.

【척수】

이것도 좋지만, 내 주특기는 여전히 마스터 몰랑과 장인어른의 가르침을 합친 암흑물질이다.

나는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역사 선생이라고? 덤벼. 둘이 같이 덤벼도 좋고.”

“하하! 강한수 학생. 소문대로 패기가 무척 좋군요. 제 반려이자 사랑하는 교무부장님이 저를 부르는 호칭을 듣고 눈치챈 듯하군요. 맞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상님과 선배님들의 훌륭한 업적을 후학들에게 전하는 임무를 맡고 있지요.”

“마누라는 그 반대던데?”

날조한 역사를 우매한 판타지 원주민들에게 가르쳐줬다.

역사 선생이 오른손 검지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쯧쯧.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자들의 편견입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말을 들어보셨겠지요? 왜곡 또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건 말하기 나름이지.”

“세상에는 모르는 편이 나을 때도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귀족 가문을 예로 들자면, 자신들의 조상 중에 천한 노예 출신이 있다는 사실은 굳이 알 필요는 없지요.”

“틀렸어.”

불편한 진실도 알아야 한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인정한 후에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좋은 것만 보고 싶다면, 가짜 역사를 배울 시간에 탄산수로 가득한 판타지 소설을 읽는 편이 낫다.

역사 선생이 혀를 찼다.

“아직 어리군요.”

“너는 정치 선생이야.”

“...그게 무슨 뜻이지요?”

“역사가 왜곡되는 원인에는 늘 정치가 있었으니까. 교무부장이 그 색골 요정왕을 미화한 것도, 귀족 가문에 섞인 노예의 피를 감춘 것도. 네가 가르치는 건 역사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이야, 정치 선생. 아니, 판타지 소설작가님?”

“이노오옴-!”

발끈한 역사 선생이 눈에 불을 켜며 내게 돌격해왔다.

그는 날개가 없음에도 허공을 두 발로 밟으며, 유명한 보검을 앞으로 쭉 뻗으며 찌르기를 시도했다.

나는 그 이름을 읊었다.

“천마신검 룬. 내 1회차 때, 오토매틱 성검이 너무 쓰레기 같아서 탐냈던 검이었지.”

무능한 동료들의 방해로 얻지 못했지만!

천마신검 룬.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적인 문양이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덕지덕지 음각된 칠흑색 검이다.

그 성능은 판타지아 3대 보검으로 불릴 만큼 뛰어나다.

성마검(聖魔劒) 소드마스타

천마신검(天魔神劍) 룬

정령검(精靈劍) 엔드미온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다는 속성이 있는 성검이랑 비교할 순 없지만, 용사가 아닌 검사들에게는 꿈의 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저건 달랐다.

성검보다 약하긴커녕 성능 면에서 압도적으로 좋은 것 같았다.

【천마】

【탈마】

【신마】

신격을 셋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정치 선생이 말했다.

“천마신검 룬. 최초의 용사가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기 훨씬 전, 그에게 대항하기 위해 우리가 초청한 무림(武林)이란 차원의 절대자가 사용하던 최강의 검이다!”

“...미안. 나는 다른 차원에는 관심이 없어서.”

애초에 판타지 세계도 납치되기 전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인 내게 위협을 줄 정도로 강력한 검은 아니었다.

“얕보지 마라!”

“오호?”

검이 또 한 자루 추가됐다.

【광휘】

【암흑】

【가족】

이번에도 신력은 셋이었으며, 내가 아는 보검이었다.

성마검 소드마스타.

무기의 강대한 힘에 삼켜져서 타락한 중앙대륙의 수호자 ‘검성’이 사용하던 애검이다.

내 1회차 때는 검성의 시험을 통과한 검왕 알렉스가 차지한 후에 죽을 때까지 휘둘렀었다.

이것도 끝끝내 얻지 못했다.

성마검 소드마스타를 애인처럼 항상 끼고 살던 알렉스의 시신과 함께 실종된 탓이다.

정치 선생이 또 말했다.

“성마검 소드마스타. 알렉스 따위가 쥐기에는 과분한 검입니다. 최초의 천사 파르마엘과 최초의 악마 페도나르가 남매의 징표로 자신들의 힘을 깎아서 만든 무기니까요. 성마검 소드마스타는 판타지아 시스템의 기본토대가 되었습니다.”

“낭만적이네.”

그가 저렇게 주절주절 떠들 수 있는 것도 시간을 다루는 신격 ‘광휘’ 덕분이다.

모든 악(惡)의 근원인 교장은 내게 패하고 실종됐지만, 그녀의 신격이 깃든 무기와 종족이 있었다.

성마검 소드마스타.

엘프-데우스 엑스 마키나.

이 둘의 영향으로 내 주변 공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다.

정치 선생의 두 보검이 내 척추를 뛰어넘을 일은 없으니까. 내 도발에 걸려서 ‘사랑의 힘’을 활용하지 못한 그의 패배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그때, 교무부장의 다부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수비적이었던 그녀는 과감하게 정치 선생 옆에 붙었다.

그리고 검을 소환했다.

【정령】

【우정】

【소망】

또 아무렇지 않게 셋이군.

나도 이젠 그러려니 넘어가는 경지에 도달했다.

그러나,

“앗! 이 도둑놈- 아니, 도둑년! 내 검을 내놔라!”

방금까지 느긋하게 관람하던 마약정령이 내 머리 위에서 팔다리를 동동 구르며 흥분했다.

그럴 수밖에.

“정령검 엔드미온까지. 판타지 세계를 대표하는 3대 보검이 한자리에 다 모였군.”

1회차 때는 이기적인 요정왕 실비아가 안 빌려줘서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했지만, 2회차에서는 저걸로 장인어른의 목까지 벴었다.

정령검 엔드미온.

요정왕국에서 국보로 보관하고 있긴 하지만, 요정 종족이랑 아무런 상관없는 무기다.

“그렇지 않아요!”

정령검 엔드미온을 쥔 교무부장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뭐가 아닌데?”

“정령검 엔드미온은 모든 정령이 고귀한 요정 종족에 영원히 봉사한다는 징표입니다.”

최초의 정령이 발끈했다.

“아니다! 정령검 엔드미온은 나의 첫 친구인 엘브하임에게 선물로 만들어준 우정의 징표다! 너 같은 거짓말쟁이를 위한... 아...”

그녀는 말하다 말고 탄식했다.

“왜? 마약정령. 오랜만에 조금 멋졌는데.”

“내 부탁을 받은 난쟁이왕이 만들어준 검에 자발적으로 들어간 아이들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다. 전부 내 잘못이다...”

“울지 마라.”

“마약용사... 훌쩍!”

“...미리 경고하는데, 내 머리카락에 콧물도 닦지 마라.”

“아이들을 구해줘라! 피이잉-!”

“야!”

코 풀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내 머리를 축축하게 적신다.

탈모가 안 생기길 바랄 뿐이다.

“강한수 학생...!”

“뭐?”

“이것이 역사다! 승자의 역사! 무림의 절대자는 패하여 천마신검만 남겼고, 마왕은 친누이에게 패하여 성마검을 잃었으며, 정령검은 요정이 승리하면서 우정에서 노예의 징표로 바뀌었다!”

“승자라... 좋지.”

나도 이기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항상 이길 수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패배하는 법을 잊는다면?

절대 패배해선 안 되는 싸움에서 패배했을 때, 허둥대다가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지금의 너희처럼.

“헛소리! 너는 패배자로 기록될 것이다! 영원히!”

“강한수 학생! 자신의 재능을 과신한 당신의 패배예요!”

...말이 많은 커플이군.

뿅!

나는 정의로움으로 충만한 성검을 양손으로 꽉 쥐었다.

고작 한 자루지만, 척추를 닮은 26개의 칼날에는 각각의 의미와 철학이 담겨있다.

척추의 26개 마디 중 쓸모없는 부위가 단 하나도 없는 것처럼.

【척추】

역사는 우리가 실제로 겪는 건 아니지만, 기록과 구전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 과거보다 강해진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고 강함인 건 아니다.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암흑물질처럼.

【암흑】

패배는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패배를 모른다면 단 한 번의 패배로 모든 걸 잃게 되리라.

승리만 할 순 없다.

파지지직-!

그러나 이번 패배를 잊지 않고 척추에 새긴다면, 다음에는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잠깐...!”

“여보! 이건...?”

실패를 아는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인간】

“나는 너희 같은 악당들이 참 좋더라.”

잡념을 비우고 대충 처리해도 후회나 뒤탈이 없거든~

번쩍-!

*

“비겁한 남편. 행성을 부숴놓고 뒤탈이 없다는 말이 나와?”

“크흠!”

멋 좀 부린다고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도 할 말이 있다.

“절반은 멀쩡하잖아.”

교무부장과 정치 선생이 좌우에서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여기서 문제.

가출선배에게 넘겨야 하는 교무부장이 죽으면 곤란했다.

그래서 힘을 조절했고 판타지아 행성 오른쪽은 무사했다.

나머지 왼쪽은... 흠흠!

“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반파된 행성이 궤도를 완전히 이탈하기 전에 붙잡고, 흩어지려는 파편을 전부 회수해서 수복할 수 있었어.”

“역시! 내 마누라야! 나는 믿고 있었어!”

“말로만?”

“...역시! 내 첫 번째 마누라야! 나는 믿고 있었어!”

“이번에는 안 통해! 이 복구작업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이러다가 이마에 주름이 생기면 첫 번째가 무슨 소용이야!”

“쩝.”

그동안 만병통치약처럼 잘 써먹었는데, 여기에도 참을 수 있는 한계치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는 칭찬만으로 만족 못 하시겠단다.

그러면 뭐가 좋을까?

...아! 있다.

“이건 가터벨트잖아? 설마, 나에게 주는 거야?”

“맞아.”

“선물인 거지? 첫 번째로 받는 제대로 된 선물 같은데?”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휙-

내 손에서 귀신같이 가터벨트를 빼앗아간 쏘시아는 바로 착용했다.

“어때?”

“...골반이랑 잘 어울려.”

그녀는 비겁하게 남자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인간】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의 평정을 시도했다.

▶감탄: 강한수 생도님의 혜안에 정말로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될 줄 알고 미리 준비해두셨군요!

맞아! 가터벨트가 매우 잘 어울릴 것 같은 교생 아가씨!

원래는 비밀 친구에게 주려고 했지만, 쏘시아에게는 비밀이다.

쿡쿡.

비겁한 마누라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멋진 남편. 사소한 문제가 하나 생긴 것 같아.”

“무, 문제? 무슨 문제인데?”

눈치챈 건 아니겠지?!

“가출용사가 원하는 옛 아내가 아직 살아있을 확률이 행성처럼 절반이야. 미리 말해두겠는데, 죽으면 시스템에 귀속돼서 넘길 수 없어.”

“...그래?”

별문제 아니군.

▷초조: 후배여!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다! 빨리 그녀를 찾아라! 너의 그 무식한 판단 탓에 대업을 망치게 생겼단 말이다!

진정하세요, 가출선배.

인간의 가능성을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약한 듯하면서도 인간은 그리 쉽게 죽지 않아요.

▷부정: 네 공격을 맞고도 살아남은 인간이 있을 거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지? 그리고 마지막 그녀의 종족은 인간이 아니라 천사다.

그러면 포기하세요. 닭대가리면 이미 죽었을 겁니다.

쿡쿡.

“저기, 멋진 남편.”

“또 왜? 쏘시아. 힘들다고 불평할 시간에 복구작업을 시작해. 가터벨트 값은 해야지.”

“그게 아니라, 저쪽에서 천사를 본 것 같아.”

“...음?”

“지금은 뒷면으로 도망쳤어.”

“저기는...”

쏘시아가 손끝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푸른색 쌍월(雙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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