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화
[21회차] 운명의 오늘
“수색 범위가 별로 넓지도 않으니 걸어 다니면서 찾아볼까.”
판타지아 행성은 토성의 절반(지름이 지구의 약 5배) 수준으로 커서 수색에 무척 애먹었다.
하지만 위성A의 크기는 지구랑 엇비슷하고, 위성B는 그보다 훨씬 작은 위성 달(지름이 지구의 약 1/4)이랑 비슷하다.
간단히 말해,
판타지아: 20몰랑
위성A: 4몰랑
위성B: 1몰랑
요런 공식이 나온다.
위성B의 지름을 ‘1몰랑’이라고 했을 때, 위성A는 4몰랑, 판타지아 행성은 20몰랑쯤 한다.
실제 표면적을 계산하면 지름을 제곱해야 하기에 탐사시간은 훨씬 더 오래 걸린다.
이것도 공식을 세워보자.
판타지아: 400몰랑몰랑
위성A: 16몰랑몰랑
위성B: 1몰랑몰랑
내가 위성B를 탐사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1몰랑몰랑’이라고 했을 때, 판타지아 행성은 ‘400몰랑몰랑’으로 400배의 시간이 소요된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판타지아 행성을 수색하는 데 400시간이 걸린다고 가정했을 때, 위성A는 16시간, 위성B는 1시간이 필요하다.
“...저기, 잘생긴 남편?”
“왜? 강의 중이잖아.”
“열심히 설명하는 건 알겠는데, 잠들 것 같아.”
“불량한 악마네.”
비겁한 학생의 수업 태도가 나빠서 짧게 마무리하자면, 위성A와 위성B의 수색은 오래 안 걸린다.
깔끔하게 정화한다는 방법도 있지만, 절친 뇌비우스랑 우정을 나누느라 몸이 엉망이다.
그래서 당장은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교장이랑 싸울 여력은 남겨둬야 하니까.
“할머니가 이곳에 산다고?”
전직 음악 선생이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니 당장 불어. 씨디 케이스.”
“씨디엘이야! 멋대로 이상한 성을 붙이지 마. 판타지아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씨디엘!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텐데!”
“전혀.”
“우선은 내 노래 실력을 의심하는 그 눈빛부터 치워. 내가 판타지아트에서 100년 가까이 깐깐한 선배에게 구박받으며 살았지만, 할머니는 본 적 없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부터 도시X를 중심으로 위성A와 위성B를 뒤지면 금방 들킬 거짓말을 씨디가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쏘시아가 참견했다.
“씨디엘 씨.”
“말씀하세요.”
“당신이 기억하는 고모- 할머니의 몸매는 어떤가요. 푸짐한 찐빵? 아니면 잘록한 호리병?”
“찐빵이요. 워낙 개성이 뚜렷하신 분이라서 못 알아볼 수가 없어요.”
“역시...”
쏘시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문의 장손마저 찐빵으로 아는 걸 보니, 교장은 정말로 그것을 절세미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우리는 도시X를 샅샅이 뒤졌다.
“...쏘시아.”
“왜에?”
“굉장히 들뜬 것 같아서.”
“당연하지. 거리의 여자들이 나를 부럽다는 시선으로 힐끔힐끔 훔쳐보는걸. 나, 이 이상한 도시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
찰칵찰칵!
내 팔을 끌어안은 비겁한 마누라는 몰랑폰으로 셀카를 막 찍어댔다.
...이상한 것만 배웠군.
그뿐만이 아니다.
⤷나: 판타지아트에서 잘생긴 남편이랑 데이트01.JPG (오전 9:03)
⤷나: 판타지아트에서 잘생긴 남편이랑 데이트02.JPG (오전 9:03)
⤷어머님: 아가. 거긴 어디니? (오전 9:06)
⤷나: 판타지아의 위성 판타지아트에요. 그이가 잘생긴 줄 아는 여자들로 가득한 나라예요. (오전 9:06)
⤷어머니: 우주는 정말 넓구나! 그런 엽기적인 나라가 다 있다니. (오전 9:07)
⤷나: 저도 놀라는 중이에요. 어머님. ^^;; (오전 9:07)
“......”
어머니의 메시지가 점점 뜸해지시는 이유가 다 있었다.
이 MAX급 효자보다 비겁한 며느리를 더욱 신경 쓰신다니!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 사랑하는 아들이랑 공원에서.JPG (오전 9:45)
⤷어머니: 노산이라서 걱정이 많았는데, 둘째는 우량아인 모양이야. 불쑥불쑥 아주 잘 커. (오전 9:46)
⤷나: 언제 봐도 도련님은 정말 잘생기셨네요. (오전 9:46)
⤷어머니: 얼마 전에 중학교 학생회장이 됐는데. 축하한다고 대통령이 와서 깜짝 놀랐어. (오전 9:47)
⤷나: 와아! 도련님은 정말 대단하네요! (오전 9:47)
일개 중학교 학생회장을 만나려고 대통령이 찾아오는 게 정상이냐고 딴죽을 걸고 싶었지만, 어머니와 쏘시아는 아무런 의문 없이 술렁술렁 넘어갔다.
둘째 녀석은 대체 뭐지?
무슨 마법을 부려서 일국의 대통령을 강아지처럼 다루는지 수상했다.
하여간...
“남은 장소는 시청 2층이군.”
저기에도 없으면 위성A와 위성B의 지표면을 망령처럼 떠돈다는 얘기가 된다.
“학생. 노래를 잘하는 내가 몇 번 가봐서 아는데, 위층에는 시장실과 축하장밖에 없어.”
“가보면 알겠지.”
“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게. 선배랑 마주치기 싫거든.”
“마음대로.”
나는 시청 2층으로 날아갔다.
무중력 공간답게 올라가는 계단은 따로 없었다.
가볍게 점프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2층에 도달했다.
씨디가 말한 시장실과 축하장 내부가 훤히 보였다.
쏘시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긴 어느 집이든 방이든 보안이 참 허술하네. 문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아.”
“물욕을 버리고 달나라로 이주한 판타지 영웅이 좀도둑이라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지.”
훔쳐서 팔 곳도 없다.
척박한 달나라에 맨몸으로 와서 동류끼리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물질적인 욕심을 버리고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삶.
노인정 같다고 할까?
겉모습들은 여전히 팔팔한 20대지만, 삶에 지친 알맹이는 노인이랑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시장실은 비어있었다.
“축하장에도 없으면 골치 아파지는데...”
땅속에 묻어둔 벙커 같은 곳에 숨어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 찾기 힘들다.
그때,
“저는 나날이 강성해지는 흡혈귀 제국에 맞서서 사랑하는 조국을 지켜왔습니다. 제 평생을 바쳐왔지요. 하지만 절세미녀로 유명한 황제의 남편을 본 순간... 부질없는 발버둥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자 앞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중략) 제가 조국의 국경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공주님은 다른 사내랑 결혼했습니다. 그녀가 파티장에서 취해 잠들었는데, 며칠 뒤에 임신 사실을 깨달았다고... 크윽!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은 저는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천사님. 이런 못난 저도 받아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아니었다면 애초에 초대하지도 않았겠지요?”
“아아! 감사합니다.”
“마지막 안식처에 오신 당신을 환영합니다, 영웅님. 원하시는 만큼 머물다가 가세요.”
고해성사를 듣는 기분이다.
쏘시아가 말했던 ‘로맨스 소설 표지의 미남’처럼 생긴 남자가 질질 짜면서 과거사를 읊고, 마주 보는 자리에 앉은 여자가 도중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고 있었다.
저 여자가 도시X의 시장일 터.
내 시선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쭉 그녀에게 고정됐다.
쏘시아가 소곤소곤 말했다.
“찾은 것 같아.”
“......”
“얼른 가봐.”
“...보채지 마.”
벌꿀이 폭포처럼 흐르는 착각을 일으키는 머리카락, 오장육부가 들어있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잘록한 허리, 이런 허리랑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
누가 봐도 미녀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계란형 얼굴과 이목구비는 뚜렷한 개성이 없었지만, 입가에 맺힌 잔잔한 미소와 차분한 시선이 그 부족함을 압도했다.
찰떡이 틀림없다.
▶지적: 강한수 생도님. 찰떡이 아니라 히프리아에요. 파르마엘 교장님일 수도 있지만요...
알려줘서 고마워, 교생 아가씨.
나는 비겁한 마누라를 힐끔 돌아보면서 말했다.
“가오리에 타고 있어.”
“응.”
“Seeeeex~”
몰랑몰랑~
여차하면 싸울 태세를 갖춘 나는 천천히 축하장 안으로 입장했다.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안녕?”
“보고받은 기억이 없는데. 새로 오신 영웅님이신가요?”
“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먼저 오신 분부터 인도해드린 후에 상담해드릴게요.”
“이건...”
나는 그녀의 능력치를 서둘러 확인해봤다.
▷종족: 퍼스트 엔젤
▷레벨: 19
▷직업: 환자(투병=생존↑)
▷스킬: 신성GGG 매력MAX
호흡MAX 생존MAX
가호MAX…
▷상태: 고착, 분열, □□, 교장,
성녀, 신룡, □□, □□,
성물, □□, 무한, 망각,
□□…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우주에 단 한 명인 고유한 종족 ‘퍼스트 엔젤’과 상태 ‘교장’은 그녀가 진짜임을 알려줬다. 덤으로 ‘성녀’와 ‘신룡’까지.
그나저나, 상태의 저 새하얀 것들이 상당히 거슬리...
“낯선 이- 켁켁?!”
나는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자동반사처럼 반응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방인A에게 목이 잡힌 남성 천사A였다.
정의로운 용사님은 교장의 기습을 경계하면서 신사적인 언어로 천사A에게 질문했다.
“천사A. 무슨 용무지?”
“저는 천사A가 아닙니- 켁켁! 낯선 이여! 얘기 좀...!”
“말해봐.”
“저는 이곳의 시장입니다!”
“그래서?”
“시장의 목을 잡으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는- 히익?! 낯선 이여! 마음대로 하십시오~!”
*
정의로운 용사님과 잡것들은 시장실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전에...
“놔줘! 놔줘! 대머리는 너 하나로 충분하단 말이야!”
“이봐. 씨디 케이스. 해명해봐. 친할머니가 살 좀 빠졌다고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돼?”
“조금이 아니잖아! 저건 완전히 다른 생명체야! 할머니는 목과 눈이 없었다구~!”
“그래? 너도 머리카락 좀 없어도 괜찮겠군.”
“아, 안 돼!”
나처럼 대머리가 되기 직전이었던 그녀는 의외의 구원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
“씨디엘! 시청 안에서 노래 부르지 말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서, 선배님! 숙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이 야만인 좀 말려주- 아야야야~?!”
“호호호! 잘생긴 영웅님. 제 후배가 자꾸 귀찮게 해서 짜증 나시죠? 씨디엘. 따라와.”
“자, 잠시만요. 귀 떨어져요! 선배- 아야야야~?!”
변명만 늘어놓던 전직 음악 선생이 질질 끌려가고, 시장실에는 나와 시장만 남았다.
쏘시아는 가오리에 탄 채로 멀리서 교장을 감시하기로 했다.
나는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설명해봐.”
“낯선 이여. 그대의 무례함을 주제로 3일 밤낮을 토론하고 싶지만, 오래 살고 싶기에 참겠소. 무엇을 설명하라는 것이오?”
“그녀.”
“축하장에 있던 아름다운 천사를 얘기하는 거라면, 내 딸이오.”
“뒤질래?”
“...수양딸이오. 쏘시아트에 쓰러져 있던 그녀를 발견하고 이곳으로 데려와서 딸로 삼았소.”
“그게 끝?”
“낯선 이여. 더 무엇이 있겠소?”
“내가 지금 굉장히 민감해. 나중에 그녀에게 물어봐서 더 나오면 죽여달라고 빌게 될 거야.”
“그, 그게...”
“얼른 말해. 용서해줄게.”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그녀의 몸에 손을- 켁켁?!”
“했냐?”
“모, 못했습니다! 만지자마자 천명이 빠르게 깎여나가서!”
“그렇군.”
기억을 완전히 잃었어도 본능적인 자기방어는 남아있는 듯했다.
나는 지금까지 찰떡을 잘 보살펴준 시장에게 보답으로 허리디스크를 선물해준 후, 시청을 빠져나왔다.
“같이 가!”
핼쑥해진 씨디가 따라왔다.
나는 살짝 허공에 뜬 채 일직선으로 도시X를 가로질렀다.
섹시하게 우는 가오리를 탄 쏘시아가 감시 중인 찰떡이 보였다.
“영웅님. 여기는 신문사예요. 여기서 판타지아 행성의 최신소식을 매일 알 수 있지요. 몇 년 살다 보면 뜸해지겠지만, 초창기에는 가장 많이 들락날락하게 될 곳이에요.”
“천사님. 저는 판타지아의 소식보다 당신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결혼하셨습니까?”
“했던 것 같아요.”
“네?”
“영웅님. 따라오세요. 외로운 당신을 위한 예배당도 있어요. 몰랑교라고 들어보셨나요? 저곳에서 간절히 기도하면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되실 거예요.”
찰떡은 개뼈다귀같이 생긴 영웅에게 도시의 시설물들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개뼈다귀는 도시보다 그녀에게 더 관심 있는 듯했다.
“천사님도 그 이단- 흠흠! 몰랑교를 믿으십니까?”
“네. 열렬한 신자예요.”
“그래서 당신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셨습니까?”
“아직...”
“그러면 오늘이 운명- 꾸엑?!”
“여, 영웅님?!”
나는 개뼈다귀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질끈질끈 밟았다.
“맞아. 오늘이지.”
“발꿈치를 비비지 말아주세요. 영웅님의 허리가- 우웁?!”
우득-
인간은 절대 모른다.
척추가 부러진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
▶설렘: 너무나 낭만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