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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급 관심용사-337화 (337/430)

 337화

[21회차] 연기하기 힘들어요!

이 뒤부터는 내가 나설 게 없었다.

“남편. 내가 할게.”

비겁한 절대권력자가 버그를 향해 손을 뻗어서 검지를 까딱거리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것이 창조신의 위엄.

판타지아 세계에서 그녀에게 저항하려면 ‘신’이 되는 수밖에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상의 생활기록을 볼 수 있다.

*

원리는 혼돈의 유물에 깃든 과거의 기록을 엿보는 거랑 비슷했다.

대상이 사물에서 사람으로 바뀌었을 뿐.

지금까지는 학생들만 ‘생활기록부’를 통해서 볼 수 있었지만, 창조신 쏘시엘에게 이러한 조건과 제약은 무의미했다.

판타지아 세계의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그녀는 버그의 가장 먼 과거를 추적했다.

바로, 탄생의 날이다.

“나의 왕이시여.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습관처럼 아름다운 왕비의 가슴을 보고 있소, 에실리스.”

위성A와 위성B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은 유감스러운 요정왕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왕비에게 답했다.

그러자 왕비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네. 보고 계시긴 하지만, 오늘의 폐하는 작아서 아쉽다는 시선이 아니시군요.”

“흠흠!”

“소녀에게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으실 수 없나요?”

“......”

“엘브하임 칸 라누베르크. 당신은 나의 빛, 나의 주인, 나의 스승, 나의 선배, 나의 사랑, 나의 남자, 나의 남편. 폐하께서 중앙대륙의 어느 노예시장에서 저를 거둬주신 날부터 쭉 당신만을 바라보며 오늘날까지 살아왔어요. 폐하의 눈빛만 봐도 어떤 인간 하녀의 가슴을 생각 중이신지 알 수 있죠.”

“그, 그건 좀 무섭군...”

“후후후! 옛날부터 소녀의 감이 뛰어나긴 했죠. 폐하께서 동족들의 왕이 되신다는 걸 맞추고 첫 번째 왕비가 됐으니까요.”

“그건 엄연한 사기...”

스르륵.

침대 위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온 왕비가 알몸을 얇은 이불로 가린 채 엘브하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 살포시 무릎을 꿇은 후, 허벅지 위에 자신의 뺨을 기대고는 속삭였다.

“위대한 요정왕이시여.”

“......”

“라누베르크 가문의 대부(大傅)이자 총관이란 보장된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비루한 동족들에게 구원의 손을 뻗은 엘브하임 칸 라누베르크. 당신은 우리의 전부입니다.”

“내가 안 했다면 다른 요정이 했을 것이오.”

“그랬다면 수천 년 동안 벌레를 잡아먹으며 살지 않았겠죠.”

“그건 초대 요정왕 때문...”

“3대 요정왕이시여. 아시나요? 이 나라의 역사가 참 단순하다는 것을. 당신이 기쁘면 모든 요정이 기쁘고, 당신이 아프면 모든 요정이 아프고, 당신이 슬프면 모든 요정이 슬펐어요. 그리고... 당신이 죽으면 요정 종족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나 또한 마찬가지요.”

“폐하께서 소녀의 가슴을 보며 말씀하셨지요. 예정된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라고요.”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네. 당시에 너무 어렸던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요.”

“암울한 미래... 그렇지.”

“소녀에게 고민을 털어놓으실 날을 손꼽아 기다릴게요.”

“...고마워, 에실리스.”

“고마우시면 힘 좀 써봐요. 저는 선배의 3번째 아이를 하루빨리 낳고 싶으니까요.”

“하, 하하...”

“폐하. 힘 좀 내시라고 야식을 준비해올게요.”

끼익- 탁.

왕비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침실을 나가고, 방에는 요정왕 엘브하임 혼자 남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가짜라는 사실만큼 암울한 미래가 또 있을까... 큭?!”

변변찮은 요정 부부의 쓸데없는 대화 탓에 지루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르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엘브하임의 몸에서 또 한 명의 엘브하임이 갈라지듯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옷은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틀림없는 엘브하임이었다.

저것이 버그.

버그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굉장한 추리력이다, 엘브하임 칸 라누베르크. 나는 나에게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필요성이 의심되는 용사의 전설, 신천지가 기록된 고대의 유적, 미래를 손바닥처럼 아는 마왕의 행보, 고스란히 환생한 영웅들. 확신이 생긴 결정적인 계기는 미래에서 넘어온 세 번째 왕비였다.”

“너는... 뭐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나는 너다, 모든 요정이 경애하는 위대한 요정왕 엘브하임. 동족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이 나라를 세우기까지 희생된 자들의 노력이 신기루란 사실에 괴로워하고 절망하는 너다.”

“...틀려. 나는 너처럼 말이 많지 않다.”

“너만 모를 뿐이다. 원수 같은 아버지였던 거인왕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는 나는 정말 말이 많았다. 과거의 끔찍한 대학살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애처롭게 말하고 또 말했다. 부정하지 마라, 엘브하임. 나는 네가 부정해온 진짜 모습이다.”

“경비- 컥!”

침실 밖에 대기 중인 경비병을 부르려던 엘브하임은 버그의 재빠른 손에 목을 붙잡혔다.

버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나는 너에게 없는 힘이 있다. 판타지아의 분노가 나에게 저항하라고 준 힘... 아쉽군. 시간이 좀 더 있다면 나와 대화하는 이색적인 경험이 됐을 텐데.”

“끅... 에, 에실리... 스.”

“위대한 3대 요정왕 엘프하임. 사랑하는 세 아내와 동족들은 나에게 맡기고 편히 쉬게.”

파스스스...

훌러덩~

진짜 엘브하임의 몸이 투명해지다가 끝끝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옷만 남았다.

“폐하. 야식을... 어머! 소녀가 셋째를 재촉하긴 했지만,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닌가요? 무방비하게 알몸으로 서 계시면... 물론, 바라보는 저야 좋지만요.”

“에실리스. 나도 그대의 아담한 가슴이 좋소.”

“설마... 폐하? 걱정하시던 암울한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자기최면을 거신 건가요?”

“잊기로 했소.”

“아아! 나의 왕이시여. 소녀는 폐하의 희생적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감당이 안 됩니다.”

“그대는 지금으로도 충분하오.”

“흑! 엘브하임 니이임~”

...그 뒤의 이야기는 시시했다.

모든 크기의 가슴을 차별 없이 사랑하기로 한 요정왕 엘브하임이 나라를 잘 다스렸다.

왕비들은...

평평한 가슴도 좋아하려고 애쓰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렀다.

*

버그의 생활기록을 순식간에 훑어본 나는 어이가 없었다.

“왕비들이 전부 사랑에 눈이 멀었군. 절대로 그럴 놈이 아닌데.”

엘브하임은 친딸이랑 같은 공간에 영겁의 세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도 건드리지 않았다.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라서?

밀폐된 공간에서 윤리의식을 따질 수 있는 건 잠깐이다.

순전히 그의 취향에 안 맞아서 딸을 이성으로 보지 않은 것이다.

“이럴 수가...”

계약 덕분에 나랑 시야를 공유하는 그림자A는 충격받은 듯했다.

나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걱정하지 마. 너는 변용술(變容術)로 뽕 없이 가슴의 크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잖아. 나머지 두 왕비보다는 사랑받기 유리해.”

“저기, 용사님? 제가 충격받은 이유는, 엘브하임 폐하 행세를 한 가증스러운 버그가 생겨난 원인이 저에게 있다는 거예요...”

그렇긴 했다.

시기로 따지면 2000년 전, 미래에서 넘어온 그림자A는 ‘젊은 시절의 남편’의 국가건설을 도왔다.

이때까지는 문제없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그림자A’가 점차 성장하면서 가슴 빼고 똑같이 생긴 둘이 의심을 불러왔다.

여기에 살을 붙여준 다른 단서들이 엘브하임에게 ‘우리와 세계는 가짜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했다.

진리가 늘 함께하는 종결자 섹스피어랑 다른 방식으로.

요정왕 엘브하임.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유감스러운 취향 빼면 나무랄 구석이 없는 요정 수컷이다.

“저기, 남편?”

“왜?”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시스템으로 버그의 빈자리를 채울 진짜를 부활시킬까? 아니면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까?”

쏘시엘이 불안해하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며 의견을 물었다.

나는 바로 되물었다.

“쏘시엘. 너도 봐서 알잖아? 그 군대를.”

“응...”

버그는 엘브하임의 대행만 했던 게 아니다.

국가정책을 조금씩 틀었다.

엘브하임처럼 외교를 통해서 다른 종족들이랑 화평을 유도했지만, 내부에서는 필요 이상의 군대를 끊임없이 양성하고 있었다.

비밀리에.

요정제국의 핵심인물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버그가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다른 종족보다 철저하게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라는 말로 설득했다.

그러나 이 군대의 진짜 목적은 국방이 아닌 침략이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쏘시엘. 지금은 엘브하임이 없어도 문제, 있어도 문제야. 그렇지?”

“응, 맞아.”

강제퇴장한 엘브하임은 기억의 공백이 매우 길다.

갑자기 ‘나는 작은 가슴이 싫다!’라고 태도전환을 해버리면 가짜로 의심받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어버리면?

자신들의 왕을 살해한 거인제국이랑 전면전이 벌일 것이다.

그건 좋지 않다.

“이런 초대형 이벤트는 용사가 소환되기 전에 터지면 곤란하지. 전쟁을 막는 모험. 후배들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어떻게 늦추게?”

“쏘시엘. 일의 순서가 잘못됐잖아.”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

“주위를 봐.”

“아... 이해했어.”

쏘시엘은 요정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경악하는 주위의 모든 생명체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이곳으로 들어오는 출입구 앞에 ‘출입금지’ 팻말을 슬그머니 생성했다.

나는 그녀에게 이어서 주문했다.

“연기 선생을 불러.”

“어? 응.”

새 교장의 호출을 받은 연기 선생이 즉각 소환됐다.

며칠 전까지 적대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반항의 낌새는 없었다.

역으로 공손했다.

“부르셨나요, 쏘시엘 교장님.”

“응. 남편이 좀 찾아서.”

“...알겠습니다.”

척추까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연기 선생이 나를 돌아봤다.

나는 케케묵은 과거의 원한을 묻지 않았다. 그녀는 비겁한 마누라의 한마디면 모든 걸 잃게 될 절대적인 약자였으니까.

더는 내 적이 아니다.

이용할 도구일 뿐.

“연기 선생. 남자도 연기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성관계는 조금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이지만, 그 연기를 못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누구를 연기하면 될까요?”

“요정왕 엘브하임.”

“...그는 연기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인물이지요. 전투력이 저를 뛰어넘어서 힘든 자들이랑 달리, 요정 종족을 하나로 통합한 그의 카리스마는 묘한 마성이 있습니다. 또한, 온종일 여자의 가슴을 훔쳐보는 그의 습관은, 여자인 제게 고역입니다. 끊임없이 동성의 가슴을 의식하며 행동해야 하니까요.”

...엘브하임.

그는 전문 배우조차 연기하기 꺼리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생의 생각처럼 끔찍하게 어렵진 않을 거야. 혈기왕성한 엘브하임을 연기하는 게 아니니까.”

“그게 무슨...?”

“불치병에 걸린 요정왕 엘브하임은 시름시름 앓다가 내후년에 죽는다는 시나리오거든.”

“아! 그거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얘기가 대충 끝났군. 쏘시엘?”

“응. 내게 맡겨.”

세세한 조정은 비겁한 마누라가 맡았다.

목격자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건 불안정하기에 이곳의 공간만 따로 분리해서 시간을 되감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쏘시엘. 끝났어?”

“응.”

“그러면 슬슬...

나는 유감스러운 요정왕을 슬쩍 돌아봤다.

그러자 그도 나를 돌아보면서 정해진 대사를 읊었다.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나누시던데, 괜찮으시다면 이 요정도 낄 수 있겠습니까?”

“좋지.”

“감사합- 켁켁?!”

나는 요정왕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움켜쥐었다.

연기 선생이 ‘이 전개는 왜?!’라는 시선을 내게 보냈다.

정말로 몰라서 묻나?

나는 손아귀의 힘을 천천히 풀면서 말했다.

“두 번은 없다.”

“네, 네! 명심하겠습니다!”

“...쏘시엘. 가자.”

남대륙의 일정을 마친 정의로운 용사님은 동대륙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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