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21회차] 5차 교육과정 v2.0
모험은 이래야 한답시고 고의로 함정을 밟는 민폐 안내자.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감찰단이 오기 전에 5차 교육과정을 전반적으로 그럴싸하게 꾸미는 것도 좋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쑥떡에게 라누벨 역할을 맡기겠다는 소리야?”
“그래.”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는 자를 키우는 안내자로?”
“말하는 뉘앙스가 패륜아인데, 결과만 따져보면 그렇게 되겠지.”
“남편. 그 애에게 너무 잔인한 역할을 맡기는 거 아니야?”
“괜찮아.”
이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는 당해줄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
상식적으로 봤을 때, 고작 몇 년 모험해서 레벨을 올린 애송이들이 200년 경력 마왕님을 쓰러트린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걸 해낸다면, 나도 장인어른처럼 방심하거나 무능하다는 뜻이겠지.
좋게 생각해보자.
쑥떡이 용사들을 잘 키워내서 졸업생들의 평균역량이 향상된다면 우리에게 이득이다.
“어... 그건 생각 못 했네. 애초에 남편을 이길 수 있는 학생이 나오는 게 가능한 걸까?”
“있으면 재미있겠네.”
분명히 척추를 꺾는 재미가 충만할 것이다!
나는 출항 날짜를 정한 후, 무역왕부터 산적왕까지 전부 내보내고 우리끼리 따로 모였다.
아직 아무런 준비가 안 됐다.
이대로 그냥 출항하면 망망대해만 끊임없이 지나다가 싱겁게 모험이 끝날 것이다.
그래선 곤란하다.
“남편. 어떻게 하게?”
“시스템을 쑥떡 곁에 붙여. 그리고 쑥떡이 가는 방향에 섬을 하나씩 창조해놔서 다양한 모험을 체험시켜주도록 해.”
“아...”
“쑥떡은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방향으로 계속 항해해. 누군가 다음 목적지를 물을 수 있으니 시스템이 매일 보고하고.”
“굉장히 구체적이네.”
“기본이지.”
날조와 선동을 기본으로 하는 용사라면 이 정도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승인: 강한수 학생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그대로 실행하겠습니다.
이 눈치 없는 시스템은 아직도 나를 학생이라고 불렀다.
교장의 남편에게 뭐래?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그 아이는 원칙대로 했을 뿐이니까. 교장이 바뀌긴 했지만, 남편이 학생이란 건 변함없어.”
“그래? 교감으로 승진시켜줘.”
지구였다면 가족끼리 돌려먹는다고 욕했겠지만, 판타지아에서는 뭐라고 할 교사나 학생은 없다.
“무리.”
“히히히! 야만용사는 학생이 어울린다. 조카야. 고결한 정령인 이모를 교감으로 올려줘라!”
“무리.”
불쑥 끼어든 마약정령도 퇴짜를 맞았다.
“마누라야! 추하다!”
“조카야! 추하다!”
“안 되는 건 안 돼! 학력이 부족하단 말이야! 비리로 폐교되는 꼴을 보고 싶어? 교감이 되고 싶으면 고등교육과정을 졸업해!”
예전에 교생 아가씨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교사가 되려면 해당 교육장의 고등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한다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게 내 출세를 가로막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괜찮겠지.
마누라가 교장이다.
나는 기둥서방이 될 예정이고.
“저기, 잘생긴 남편? 재능을 썩히지 말고 조금은 일할 생각을 하는 게 어떨까?”
“커피숍 오너가 될 거야.”
돈 안 내고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내 마누라의 골반을 힐끔거리는 악(惡)의 무리에게 허리디스크를 심어줄 것이다.
“...이거, 내가 기뻐해야 하는 게 맞는 거지?”
“당연한 소리.”
판타지아 세계에서 가장 잘생기고 뛰어난 남자가 아내의 골반을 수호하고 있다.
감격해야 할 타이밍이다.
“그, 그래. 정말 어렵구나! 첫 번째 아내라는 건! 몰랑코사인처럼 심오한 것 같아!”
쏘시엘이 이해한 걸 확인 하는 쑥떡을 돌아봤다.
녀석은 길을 잃은 몰랑한 어린 양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바다에서 3개월쯤 돌아다니다가 천공선 오르가타를 타고 돌아오면 돼.”
“헉! 그건 아버지의...”
“잘하면 포상을 줘야지. 그게 이 업계의 상식이야.”
“열심히 할게요!”
쑥떡의 의욕이 충만해졌다.
사회경험이 부족하긴 하지만,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약한 용은 아니기에 괜찮을 것이다.
“다녀와.”
“네! 아버지!”
쑥떡이 출항 준비를 위해 씩씩한 발걸음으로 나갔다.
앞으로 남은 건, 위대한 탐험가 쑥떡에게 역할을 빼앗기고 해고될 라누벨의 대응이다.
더는 그녀에게 ‘마왕을 쓰러트릴 용사를 소환하세요!’라는 신탁이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라누벨이다.
“남편. 더 남았어?”
“거의 끝나가.”
우리는 섬E의 난쟁이 왕국을 방문해서 비슷한 당부를 했다.
용사가 찾아오면 박대하지 말고 좋은 아이템을 임대 해주라고.
그 뒤에 중앙대륙으로 향했다.
*
어느덧 3개월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동안 나는 판타지아 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버그를 수색하고, 수세식 변기가 보급되지 않은 지역에 마스터 몰랑의 위대함을 전파하며 보람찬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때까지도 라누벨은 얌전했다.
우주의 용병을 소환하지 않고, 용사들의 무덤을 기웃거리며 정보를 수집했다.
“희한하군.”
판타지아의 분노라고 불리는 수상한 존재도 활동을 멈췄다.
버그도 10마리째 잡은 뒤부터는 꼭꼭 숨어서 보이질 않았다.
그 바람에 할 일이 뜸해진 나는 어머니랑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보내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나: 여기로 이사 좀 오세요. (오후 3:04)
⤷어머니: 아들. 그 얘기는 꺼내지 말랬지? 엄마는 여기가 좋아. 최근에 테니스 동호회에서 호적수를 만났거든? 이대로 도망치듯 떠날 수 없어요. (오후 3:05)
⤷나: 아들이랑 테니스 중에 뭐가 더 중요하세요? (오후 3:06)
⤷어머니: 비교할 걸 비교해. (오후 3:07)
⤷어머니: 20년 넘게 코빼기도 안 보이는 아들보다 테니스가 100배 더 중요하지. 테니스가 아니었다면 우울증으로 자살했을 거야. (오후 3:08)
⤷나: 죄송합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네요. (오후 3:09)
페스티벌 이주계획은 실패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아버지도 공략 중이다. 메신저를 워낙 안 하셔서 진행이 매우 느리지만.
⤷나: 아버지. 어머니 좀 설득해주세요. 제가 100번 잘못한 건 압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이사만 오시면 제가 노후는 정말 확실하게 보장해드리겠습니다. (오후 3:10)
⤷아버지: 출근 중 (오전 6:22)
⤷나: 이사만 오시면 직장 다니실 필요 없다니까요? (오전 6:22)
⤷나: 나중에 여유가 되실 때 읽어보시고 답변해주세요. (오전 6:24)
기다려도 답변이 없다.
⤷나: 퇴근하셨으면 아들이랑 문자 좀 해요. 문자가 불편하시면 통화도 좋습니다. (오후 8:43)
⤷아버지: 야근 중 (오후 8:43)
⤷나: 퇴근하시면 잊지 말고 문자나 전화 주세요. (오후 8:43)
⤷나: 아버지. 아직도 회사에서 일하세요? (오후 11:01)
⤷아버지: 회식 중 (오후 11:58)
진짜 돌아버릴 것 같다.
⤷나: 오늘은 주말로 아는데요. 아들이랑 이야기하실 시간이 조금은 있으시죠? (오전 9:23)
⤷아버지: 수면 중 (오전 11:53)
⤷나: 깨워서 죄송합니다. 일어나시면 꼭 연락 주세요. 꼭꼭! (오전 11:53)
⤷나: 아버지. 아직도 주무세요? 어디 아프세요? (오후 3:43)
⤷아버지: 운동 중 (오후 3:43)
아차! 깜빡했다.
어머니가 동네 테니스 동호회의 회장님이고, 아버지가 파트너 겸 부회장이다.
분명히 곤히 주무시다가 어머니께 질질 끌려나가셨을 게 분명하다.
다음을 기약하자...
⤷아버지: 상의 함 (오후 7:10)
⤷아버지: 네 엄마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함 (오후 7:13)
고향을 떠나기 망설여지는 건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저렇게 반대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오후 7:23)
⤷아버지: 너 하나를 위해 가족들에게 이주를 강요하는 건 좋지 않음 (오후 7:57)
⤷아버지: 동생도 생각해주는 좋은 형이 됐으면 함 (오후 8:01)
어머니는 동네 테니스장에서 만난 숙적 때문이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둘째 녀석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대충 이해는 된다.
내게서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아간 대역죄를 안다면, 이 형님을 만나기가 대단히 무섭겠지!
“...저기 남편?”
“뭐?”
“그건 너무 확대해석하는 게 아닐까? 나이를 생각해봐. 동네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어서 이사를 꺼릴 수도 있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이 장남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드리겠다는데도 마다하다니?”
“잘생긴 남편은 관심 없어서 모르겠지만, 이미 지구에 있는 ‘둘째’ 며늘아기 덕분에 충분히 부귀영화를 누리고 계셔.”
“하아?”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3세. 왕관 없는 여왕. 해가 지지 않는 그룹의 주인이래.”
“알렉산드라 빅토리아? 영국 여왕의 이름인데.”
지구 반대편에 사는 왕족이랑 나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쪽도 남편이 첫 번째 아내만 사랑한다고 느낀 것 같아! 아직 어린 도련님을 노리더라고.”
“내 동생 놈을?”
“여자의 감으로는 그래.”
“흐음...”
그건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그 망할 동생 녀석 때문에 부모님 이주계획에 차질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보다 다음 계획을 얼른 세워야 할 것 같아. 쑥떡이 무사히 모험을 마치고 돌아왔어.”
“라누벨은?”
“평범한 여행자처럼 중앙대륙의 신성제국을 여행 중이야.”
“......”
그림자A에게 감시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걸까? 아니면 시기가 아직 이른 걸까?
내가 대륙을 돌면서 쑥떡의 견문을 넓혀줬듯이, 라누벨은 직접 뛰어다니고 있었다.
뭐, 좋다.
그녀가 반발하든 아니든 오늘부터 위대한 탐험가 쑥떡이 용사의 안내자가 될 것이다.
삑, 삑, 삑...
몰랑폰2S+의 지도 앱에 천공선 오르가타의 위치가 표시됐다.
단 3개월 만에 몰랑교의 몰랑한 신도가 된 무역왕, 해적왕, 산적왕을 동대륙에 내려주고 곧장 이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빠르군.
마누라랑 얘기하는 사이에 벌써 우리의 머리 위에 도착했다.
“아버지! 모험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몰랑한 아기의 발바닥 섬, 몰랑한 아기의 종아리 섬, 몰랑한 아기의 허벅지 섬, 몰랑한 아기의 엉덩이 섬, 몰랑한 아기의 배꼽 섬, 몰랑한 아기의 손바닥 섬, 몰랑한 아기의 입술 섬 등을 거쳐서 아버지의 분신이신 캡틴 판타지의 위엄에 겁먹은 수호자를 무찌르고 천공선 라우리타의 짝 오르가타를 얻었다는 식으로 모험을 마무리했어요.”
“잘했어.”
섬의 모양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모험한 지역들이 너무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설의 섬A, 전설의 섬B, 전설의 섬C, 전설의 섬D, 전설의 섬E...
이런 식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짰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방식은 남편만 좋아해.”
“편견이야. 아무튼.”
이대로 쑥떡을 용사의 안내자로 임명하면, 능력치를 볼 수 있는 용사들이 식겁할 것이다.
그냥 네가 마왕이랑 싸우는 게 어때? 라는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감춰야 한다.
“남편. 시스템으로 능력치를 감추는 행위는 교칙에 위반돼.”
“누가 너보고 하래? 쑥떡.”
나와 피는 통하지 않지만, 부화할 때까지 영양분을 듬뿍 먹은 쑥떡은 최고의 우량아다.
스킬 ‘영재’는 기본
▷종류: 스킬
▷명칭: 영재
▷등급: GG
▶GGG: ???
▶GG: 씨앗부터 재구성한다.
▶G: 비범한 척한다.
▶ZZZ: 평범한 척한다.
▶ZZ: 뿌리부터 재구성한다.
▶Z: 한계돌파가 약간 쉬워진다.
...
영재 ZZZ등급 효과를 발동하자 쑥떡의 능력치가 단번에 평범해졌다.
이러면 용사도 눈치챌 수 없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을 이 업계에서 완전히 퇴출해버릴 준비가 마침내 끝났다!
“가자.”
중앙대륙의 만두 왕국으로!
라누벨보다 먼저 사회부적응자들을 소환해야 한다.
그때였다.
“남편! 큰일 났어!”
“왜? 라누벨이 접싯물에 코 박고 죽기라도 했어?”
“아니. 라누벨이 촉매도 없이 용사를 소환했어! 남편의 말이 맞았어! 그녀가 범인이야!”
“얼른 그곳으로 가자!”
“이미 늦었어! 남편은 당장 마왕의 탑으로 돌아가서 옥좌에 앉아야 해! 나머지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라, 누, 벨-!”
번쩍!
분할된 판타지아 차원이 붕괴하고 새롭게 개편됐다.
그리고 모든 학생에게 이 같은 ‘신탁’이 내려졌다.
▼진리: 환영합니다, 용사님!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소환돼서 많이 혼란스러우시죠? 이곳은 판타지아. 용사님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랑 다른 차원입니다. 당장 이해를 바라는 건 무리겠죠.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게요~
...꺼져. 필요 없어.
용사들에게는 몰랑폰이 있다.
▼진리: 마왕 파르마몬이 부활했어요! 동료들을 모아서 맞서 싸워... 저기, 용사님?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시나요?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따위에게 당해주기에는 이 마왕님의 안배는 너무나 완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