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44화 (344/430)

 344화

[22회차] 너희가 태어나는 날

“얼마나 굉장한 혼종이 태어났기에 뇌비우스마저...”

팟! 팟!

천사들의 도시국가를 벗어난 나는 공간을 접어가면서 곧장 페스티벌 행성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

천사들이 순진한 용사님께 거짓말한 거라면 당연히 그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해주리라!

...하지만 정말이면?

나도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마왕님. 용을 한 마리 사냥한 게 그리 대단한 일인가요?”

“평범한 용이 아니야.”

“강한수 마왕님의 친구분이시죠. 고룡(故龍)의 명복을...”

“아니. 그건 선후가 뒤집혔어.”

냉철한 이야기지만, 뇌비우스가 친구이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중요한 게 아니다.

애초에 그가 약했다면 내 친구조차 되지 못했다.

즉, 내가 친구로 인정할 만큼 강한 존재가 살해됐다는 게 핵심이다.

“강했나요? 저는 잘...”

“내가 예고도 없이 판타지아 행성을 파괴했을 때, 간단히 살아남아서 내게 반격해왔다.”

“그 얘기는 쏘시엘 님께 얼핏 듣긴 했어요. 그분은 저만 보면 강한수 마왕님 자랑을 하거든요. 이 남자가 내 남편이야! 이러시면서요.”

“그렇다면 뇌비우스가 얼마나 강한지도 대충 알겠군.”

“뭐... 저는 태어날 때부터 우주를 보고 자라서 감흥이 없어요. 별이 파괴됐다는 소식을 자주 들으면서 자랐거든요.”

“우주인이란 거군.”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누구누구가 어디의 별을 파괴했다더라.’ 같은 얘기를 들어왔다면 지구의 교통사고만큼 크게 와닿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예전의 요정 도시의 시청으로 가야 만나볼 수 있으려나?”

판타지아 대륙은 내가 수세식 변기를 보급한 뒤부터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해왔다.

하물며 2000년이나 흐르는 바람에 지형까지 내가 못 알아보게 바뀌었지만, 페스티벌 대륙은 그렇게까지 많은 게 변화하진 않았다.

도로가 좀 더 깔끔해지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어린 요정의 숫자가 매우 많았다. 대략 100년 전에 ‘베이비-붐’이 있던 게 아닐까? 같은 얼빠진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초저녁부터 수상한 소리가 도시의 집들에서 들려왔다.

“아응~ 자기야~”

“사랑해! 헉! 헉!”

“나도 사랑해!”

“크으으으- 간다!”

...일반인들은 얄팍한 방음벽에 막혀서 듣지 못하겠지만, 한죠 정도의 능력만 돼도 생동감 넘치는 충격음까지 들을 수 있다.

탁! 탁! 탁! 탁!

새로운 생명이 요동치는 대자연의 소리다.

“여, 여기 요정들은 인간만큼 적극적이네요...”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진 한죠가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대단하군.”

전제군주제는 굉장히 불안정한 정치제도다.

군주의 능력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들의 왕조들은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매번 훌륭한 군주만 나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정은 다르다.

영원한 수명을 가진 ‘아크 엘프’가 유능한 군주라면, 그 나라는 외침이나 자연재해가 있기 전까지는 무궁한 발전과 영광만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처럼.

물론, 엘브하임이 완벽한 군주라는 뜻은 아니다.

벽보가 붙어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시장 엘브하임이 인사드립니다. 훌륭한 자손이 태어날 때까지 부지런히 사랑을 나누십시오. 성공하면 그 자손들이 여러분의 노후를 책임질 겁니다. 서두르십시오. 이웃보다 먼저 노후를 대비하고 한껏 자랑하십시오. 귀염둥이 손녀들 덕분에 하루하루가 행복한 시장 엘브하임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출산장려정책을 펼치고 있었지만, 홍보 외에는 제도적인 지원을 하고 있진 않았다.

심지어 그 홍보도 정상적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시민들에게 자기 손녀들 자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먹혀든다는 점이 더욱 황당했다.

“세상에나! 이런 출산장려정책은 난생처음 봐요. 시장이 시민들을 약올리고 경쟁을 부추겨서 출산을 유도한다니...”

“강제보다는 낫잖아?”

유감스러운 요정왕 엘브하임다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시청 건물은 예전 그대로였다.

엘브하임은 저 2층의 시장실에서 거리를 지나가는 인간 여성들의 가슴골을 훔쳐봤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우연히 오늘, 혹은 지금만 잠시 안 보는 걸지도 모르지만, 엘브하임은 시장실 창가에 없었다.

일단은 한 번 들여다볼까.

제자리에서 살포시 뛰어오른 나는 시청 2층 창문 안쪽을 살펴보았다.

“마왕님. 시장은커녕 아무도 없는데요?”

“흐음...”

버려진 방은 아니다.

책상 위에 펼쳐진 페스티벌 대륙의 지도에는 색연필로 국경선이라 짐작되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일부 지형이나 국가 위에는 붉은색으로 큼지막하게 ‘X’ 표시가 되어있었다.

사장실보다는 전쟁회의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색연필과 스케치북을 보면 어린애들의 단순한 장난 같기도 했다.

도통 모르겠군.

“제가 찾아볼까요?”

“됐어. 저쪽에서 이미 우리를 발견했으니.”

나는 공격하지 않았다.

모르는 자였다면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잡고 대화를 시작했겠지만, 얼마 전까지 동행했던 유부녀의 목을 잡을 순 없잖은가?

그림자A였다.

“일찍 오셨군요, 용사님. 라누벨을 찾는다고 몇 개월은 지난 후에야 오실 줄 알았는데.”

“그러는 너는 단시간에 복장이 참 많이 변했네.”

분명히 수수한 드레스였는데, 성형한 가슴이 강조되는 바람에 전혀 수수하게 보이질 않았다.

“어울리나요?”

“나에게 묻지 마.”

치마 안쪽의 허벅지에 흉기를 잔뜩 매달아 놓고 잘도 질문하는군.

복장만 바뀐 게 아니었다.

표정.

더는 교사도 아닌 평범한 요정으로 돌아간 그림자A의 표정에는 행복 반 근심 반이 뒤섞여 있었다.

“용사님은 엘브하임 님을 만나러 시청에 오신 거죠?”

“어. 녀석은 어디에 있어?”

“본가에 계십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손녀들에게 푹 빠져 계셔서 아내와 딸이 파고들 빈틈이 없습니다...”

*

노을의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에메랄드빛 호수가 잘 보이는 창가 앞에 놓인 길고 푹신한 소파에 1남 2녀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좌우 옆구리에 조숙한 소녀들을 끼고 앉은 중앙의 사내에게서 중범죄의 냄새가 물씬 풍겼지만, 색안경을 빼고 볼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할아버지. 잠이 안 와.”

이 셋은 피가 통하는 진짜 가족이었다.

“허허! 그럴 때는 이 할아비의 기나긴 삶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옛날이야기가 최고란다.”

“설마, 또...?”

“사랑하는 나의 손녀 셀레니스. 네가 태어나는 날, 온 페스티벌이 네 이름을 속삭였단다.”

“할아버지. 나는, 나는?”

“허허! 사랑하는 나의 손녀 셀비너스. 네가 태어나는 날, 이 할아비는 덩실덩실 춤을 췄단다.”

“거짓말. 저번에는 언니가 태어날 때 춤을 췄다면서.”

“셀레니스, 셀비너스. 잘 들으려무나. 너희는 아름다운 기적이란다. 우리 요정은 아기가 무척 귀한데, 너희의 엄마는 그 당연한 상식을 깨고 너희를 하루 만에 품었단다. 무사히 낳게만 해달라고 날마다 빌던 너희의 엄마는 건강하게 태어난 셀레니스를 보고 무척 기뻐했단다. 그리고 언니의 뒤를 이어 세상 밖으로 나온 셀비너스를 본 순간, 너희와 함께 아기처럼 펑펑 울었단다. 쌍둥이. 이 또한 우리 요정에게는 기적이란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쌍둥이의 탄생에 모든 요정이 너희의 이름을 노래에 담으며 밤새도록 축복했단다. (중략) 땅의 정령왕은 너희가 튼튼하게, 불의 정령왕은 너희가 씩씩하게, 바람의 정령왕은 너희가 날렵하게, 물의 정령왕은 너희가 유연하게 자라길 빌어줬단다. 그리고 마음의 정령왕은 너희가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건강하게 자라도록 페스티벌의 모든 생명체를 세뇌했단다. 그리고... 허허! 나의 사랑스러운 보물들. 오늘도 이 할아비의 품에서 좋은 꿈 꾸려무나.”

...듣다가 나까지 잠들 뻔했네.

하지만 끼어들 수 없었다. 손녀들을 향한 엘브하임의 정성이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집은 내가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넓어져 있었다. 사는 인원이 둘에서 넷으로 늘어났으니 리모델링은 당연했다.

끼이익-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두 손녀에게 어깨와 팔을 빌려준 엘브하임이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다지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그림자A가 귀환한 시점부터 내 방문을 예상했을 테니까.

그는 손녀들이 깰 것을 염려하여 말을 아꼈다. 그저 손끝으로 위층을 가리킬 뿐이었다.

...네가 가란다고 가야 하냐?

나는 뇌비우스를 사냥했다는 문제의 두 소녀를 관찰했다.

▷종족: 미라클 엘프

▷레벨: 999+

▷직업: 투신(전투→손해↓)

▷스킬: 정령MAX 천재MAX

영재MAX 만능MAX

매력MAX 지진MAX

홍염MAX 폭풍MAX

해일MAX 격노MAX

축복MAX 조숙MAX

행운MAX 무한MAX

혼돈MAX 흡수MAX

사랑MAX 용기MAX

희망MAX 학살MAX

추적MAX 척추MAX

생명MAX 불멸MAX…

▷상태: 수면, 축복, 가호

사기적인 스킬들로 능력치가 도배되어 있었다.

등급이 아쉽긴 하지만, 성능과 희소성을 전부 갖춘 MAX등급 스킬은 제물로 날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그래도 한두 개쯤은 Z등급을 찍을 법한데, 아예 안 하는 걸 보면, 능력치 쪽에 관심 없거나 한계돌파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게 틀림없다.

뭐든 간에...

저 능력치로는 뇌비우스를 절대 쓰러트릴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응징】

【자매】

【요정】

어이없게도 신격이 느껴졌다.

두 소녀가 신(神)이 아닌 ‘신의 사도’인 건 틀림없다.

하지만 신에게 빌린 세 신격의 순도가 매우 높았으며, 그중에서도 신격 ‘응징’은 나조차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저것이 분명하다.

망룡왕 뇌비우스가 어린 요정에게 패배한다는 부조리를 강제로 합리화시킨 힘!

“...나중에 얘기하자고.”

곤히 자는 어린 요정들을 깨워서 좋을 게 없었기에 나는 엘브하임이 가리킨 위층으로 향했다.

계단의 벽부터 심상치 않았다.

요정K와 두 소녀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곳으로 올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소녀들의 모친이 누구인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온 한죠가 작게 말했다.

“강한수 마왕님. 엘브하임의 손녀들이요. 어린 나이치고는 상당히 뛰어났지만, 뇌비우스를 사냥할 만큼 강해 보이지 않던데요?”

“신(神)이 아닌 자들에게는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군.”

“아...”

“그 아이들에게 덤비지 않는 편이 좋아.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이치를 무시하고 순식간에 소멸하는 수가 있다.”

“그, 그 정도인가요...?”

“내가 제대로 봤다면.”

도대체 어떤 신이 순진한 어린애들에게 저런 위험천만한 힘을 빌려줬는지 모르겠지만, 태양계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다.

2층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공통점을 발견했다.

“가족사진에 친부가 전혀 안 보이는군.”

처음에는 엘브하임과 요정K의 근친혼도 조심스럽게 추측해봤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

딸이랑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을 때도 안 건드렸던 그가 자유를 얻은 후에 욕망이 폭주했다는 건 말이 되질 않았다.

그렇다면 친부는 누구지?

두 손녀의 종족 ‘미라클 엘프’로 봐서는 혼혈이 아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조숙한 몸매는 인간 혼혈이 아니면 절대 나올 수 없다.

도무지 모르겠군.

“사고 치고 떠났거나 요절한 게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한죠에게 적당히 대답해주던 나는 걸음을 딱 멈췄다.

아이들 방을 청소하고 거실로 막 나오던 요정K랑 시선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두 딸의 엄마라는 게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예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프로락틴(prolactin)이 호르몬 역할을 똑바로 못한 건가?

요정K가 머뭇거리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용사님.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잘 지냈어?”

“네. 당신이 남겨주신 소중한 선물 덕분에.”

“다행이네.”

“하나 더 주실 수 있나요?”

“...생각 좀 해보고.”

내가 예전에 뭘 줬길래 또 달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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