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22회차] 반반씩 닮았네!
▷종족: 카오스 엘프
▷레벨: 999+
▷직업: 무녀(미녀→근력↑)
▷스킬: 민첩Z 혼돈Z 육아Z 사랑Z 매력Z···
▷상태: 수줍, 마검, 마탄
요정K의 능력치는 과거에 보았을 때랑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보니 모든 게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판타지아 경력 53년이 되던 해,
나는 요정K의 요청을 받아서 뜨거운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에 보건교사를 만났지.
“두 아이는 만나보셨나요?”
“자는 중이더군.”
“그렇군요. 아! 이쪽으로 오세요. 용사님의 방도 마련되어 있어요. 교직원들이 마련해준 S급 기숙사보다는 못하겠지만, 불편하시진 않도록 최대한 꾸며봤습니다.”
“흠.”
나는 사양하지 않고 요정K의 안내에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느끼한 표정의 내 초상화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나는 정의로운 용사님이다. 절대로 지크 같은 저런 얍삽한 미소는 짓지 않는다.
그래도 실내는 전반적으로 깔끔했다.
“마음에 드시나요?”
“제법...”
“다행이네요. 그... 손을 잡아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요정K는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내 왼손을 쥔 후, 자기 뺨에 가져다가 살포시 맞댔다.
...이쯤 되면 나도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뇌비우스를 사냥한 두 요정 소녀.
아무래도 요정K가 낳은 내 피붙이인 것 같다.
맙소사! 내 자식들이 나의 친구를 살해하다니?
어째서 사냥했냐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애초에 망룡왕 뇌비우스는 5대 재앙으로 ‘사냥감’이었다.
나도 사냥했었기에 자식들을 탓할 처지가 아니다.
“요정은 기다림에 익숙한 종족이지만, 그래도 161년은 조금 길었던 것 같아요. 손만 잡았을 뿐인데, 이토록, 이토록 가슴이 벅찰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나를 그렇게나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객관적으로 분석해보자.
요정K는 남자로서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다.
천사들이 만든 지하감옥에 갇혀 있던 그녀를 구해준 대상이 남자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고마운 감정이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충동적인 감정일 뿐이다.
내가 1회차 초창기에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을 좋아했듯이.
의지가 됐던 내게 그녀가 집착하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161년.
더는 충동적인 감정으로 치부하기 힘들었다. 태어난 두 아이가 지탱해줬을 수도 있지만, 뭐든 간에 현재가 중요하다.
“수고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저는 용사님이 이렇게 찾아와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셀레니스와 셀비너스는 착한 아이지만, 제 교육의 부족함으로 용사님께 섭섭해했거든요.”
“...이름이 뭐지?”
나는 스쳐 지나갈 인연들의 이름은 대충 부르는 편이다.
1회차 때 수많은 이별을 겪고, 수많은 상실의 고통을 받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가까워지지 말자.
가출선배는 만나는 모든 미녀랑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지만, 나는 그런 잡식성과 포용력이 없었다.
그리고 약하다.
입으로는 ‘희생에 익숙한 용사’라고 떠들지만, 그것은 ‘희생할 것’들을 많이 만들어두지 않은 덕분이다.
잃을 게 적어서 가능한 것이다.
“탈레아 알브로라.”
“...그렇군.”
이제야 묻는다는 게 굉장히 낯설었지만, 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면서 방을 구경했다.
탈레아는 말했다.
“탈레아는 제 이름이고, 알브로라는 아버지가 이름 없는 노예였던 어머니께 지어준 이름입니다.”
“물려받은 건가?”
“네. 일생을 아버지만 바라보며 사셨던 분이셨어요. 마지막도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신의 힘을 과도하게 쓰셔서 돌아가셨죠.”
“엘브하임은 운이 좋네.”
판타지 차원은 약육강식이다.
강한 수컷이 다수의 암컷을 거느리는 건 당연하고, 그 반대로 강한 암컷이 여왕벌처럼 다수의 수컷을 거느리기도 한다.
그런데 엘브하임은 뭘까?
무지막지하게 약하고 유감스러운 취미를 가진 주제에 결혼은 기가 막히게 잘했다.
아내들이 전부 강하다.
첫째는 신의 힘을 다루고, 둘째는 사악한 정령사였으며, 셋째는 호위 겸 암살자였다.
정말 특이한 놈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름을 쓰게 된 건 정말 최근입니다. 160년밖에 안 됐어요.”
“그래? 얼마 안 됐네.”
깜빡했다. 눈앞의 청순한 척하는 요정이 사실은 고대의 신전에서 살던 오래된 유물이란 것을.
160년을 최근 취급한다.
“새로운 생명이 제 뱃속에 깃들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매일 기도했어요. 무사히 낳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정말로 어떤 신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주셨어요.”
【요정】
두 아이의 신격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신격의 이름으로 보아선 가장 완벽한 ‘요정의 신’쯤 되지 않을까?
탈레아의 뒤편에 요정 여성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누군지 나는 안다.
알브로라.
유감스러운 요정왕의 첫째 아내이자, 탈레아의 모친이다.
“영속(靈束)되어있는 건가?”
“비슷합니다. 저와 아이들을 지켜주고 계세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요정이 영원히 후손을 보살핀다는 개념의 힘이에요. 대가는 저 자신. 두 딸이 엄마가 되면, 저도 아이들을 수호하는 존재가 될 겁니다.”
“흥미롭군.”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한죠에게 얼른 나가라고 손짓했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이 천사의 얼굴은 새빨개졌다. 그리고는 날개 빠지도록 후다닥 방을 나갔다.
“저는 찬바람 맞으면서 주변을 수색하고 있을게요!”
“이상한 상상 하지 마.”
“아, 안 했어요!”
“하지 마.”
그 상상이 맞으니까.
*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때는 내가 이종교배랑 인연이 없는 정령이고, 탈레아는 임신율 극악인 요정 왕족이며, 고작 하룻밤이었기에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과는?
쌍둥이였다.
확률로 계산하기 힘들 정도로 말도 안 되는 기적이 벌어졌다. 조작이라고 해도 믿어질 정도다.
그렇기에 나는 ‘행운의 반지’를 11번째 손가락에 확실하게 끼우고 실수하지 않았다.
“굉장히 불쾌한 반지네요.”
“매우 중요한 반지거든?”
“그래도 좋았어요.”
“......”
나는 배시시 웃는 탈레아의 도움으로 옷을 입고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흥~ 흐응~♪”
아침부터 유감스러운 콧노래가 내 귀를 불편하게 했다.
“좋은 일 있냐?”
“오! 용사님. 물론입니다. 오늘은 제가 태어나서 두 번째로 기쁘고 행복한 날입니다.”
“그런 것 같네.”
주방에 서서 앞치마를 두른 엘브하임의 얼굴에 ‘나는 매우 행복해서 미치겠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실실 쪼개며 말했다.
“첫 번째를 안 물어보십니까?”
“궁금하지 않아.”
“하하! 용맹한 용사님께서 쑥스러워하시긴. 제 딸을 닮지 않은 두 손녀가 태어난 날입니다!”
“어, 그래.”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예전에 제가 용사님께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아니.”
“어젯밤에 길몽(吉夢)을 꾸었습니다. 넓은 마음과 몸으로 하등생물인 요정 종족을 구원하고 인도할 위대한 왕이 태어나는 꿈. 그 꿈에서 깨어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처럼 연어가 당겼지요.”
“입덧을 왜 네가 하냐? 라고 핀잔을 줬던 것 같은데...”
“하하! 좋은 할아버지가 될 징조라고 답해드렸지요. 그리고 저는 훌륭한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그렇게 보이긴 하는군.”
손녀들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연어요리를 하는 할아버지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 기억하십니까?”
“나중에 바라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손녀를 무릎 위에 앉히고 이상한 짓을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상한 짓이 아닙니다. 저는 한 번 내건 공약은 꼭 지킵니다. 무릎은 손녀들이 너무 커서 이젠 무리지만, 옆에 앉혀놓고 지금도 들려주지요. 손녀야. 네가 태어나는 날, 온 세상의 요정들이 너희들의 이름을 속삭였단다. 거짓말도 아닐뿐더러, 이런 이야기는 아이들의 자존감을 키워서 정서발달에 도움이 됩니다.”
“어, 그래.”
“하하!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오늘도 부지런히 자랑하고 다닐 겁니다. 공약대로 요정의 공무원 면접시험에 넣어서 모두가 셀레니아와 셀비너스를 알도록 했지요.”
“진짜로 했냐…!”
이런 유감스러운 놈을 전적으로 믿고도 멸족하지 않은 요정들이 참으로 대단하다.
아니면 다른 요정들이 너무 무능해서 이런 녀석으로 만족하는 걸까?
뭐든 내 상식 밖이다.
“두 아이는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벌써 자기 엄마보다 큽니다. 정원의 열매를 얘기하는 겁니다. 더욱 놀라운 점이 뭔지 아십니까? 어째선지 유전적으로는 혼혈이 아닌 순종이란 겁니다! 정원에 심어놓은 모종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냥 편하게 말해.”
“조심해야 합니다. 손녀들이랑 손을 잡고 길을 산책하다가 어마어마한 열매에 시선을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그 바람에 손녀들의 이야기를 놓친 적이 있습니다. 삐진 아이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세상의 모든 열매가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다면 이런 광경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1절만 해라.”
식탁에 앉은 나는 피곤한 얼굴로 그리 대답했다.
161년 동안 굳게 닫혀있었던 탈레아의 요새를 용사의 성검으로 공략할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
“할아버지~ 배고파~”
“할아버지! 나두, 나두!”
이목구비는 자기 엄마를 쏙 빼닮았는데, 목 아래로는 인간의 가능성을 가볍게 웃도는 두 소녀가 요란하게 부엌으로 쳐들어왔다.
“어?”
“으응?”
그리고 나랑 시선이 딱 마주쳤다.
일란성 쌍둥이.
구별은 어렵지 않았다.
내 경추를 닮은 소녀가 언니 셀레니스고, 내 요추를 닮은 쪽이 동생 셀비너스다.
반반씩 나눠 가진 셈.
식탁에 앉은 두 아이도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응징】
【자매】
【요정】
그리고 조금씩 힘을 끌어올리며 경계의 수위를 올렸다.
카리스 때처럼 척추를 잡고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지만, 하나가 아닌 둘이었다.
무엇보다도 신력 응징.
뇌비우스마저 승천으로 보내버린 저건 내게도 위협적이다.
패배는 안 하겠지만, 페스티벌 행성을 부수지 말라는 마누라의 요청을 들어주기 힘들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현재 추적 중이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그년의 척추를 잡기 전까지는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너희가 뇌비우스를 잡았다고 들었는데.”
“깜둥이?”
“깜둥이?”
...공포와 힘의 상징이었던 망룡왕 뇌비우스를 저렇게 부르는 요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쁘지 않았다.
정의로운 용사의 딸이라면 저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깜둥이를 왜 사냥했는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선생님을 공격했어요.”
“선생님을 괴롭혔어요.”
두 아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선생님?”
“제 얘기입니- 꺅?!”
바로 옆에서 인기척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내 손이 먼저 반응했다.
보건 선생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놀란 두 아이가 식탁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보건 선생이 다칠 걸 염려해서 성급하게 덤비진 않았다.
선생님이란, 보건 선생을 말하는 거였나?
내 행운의 반지를 준 교사.
교직원이 잘못하면 ‘강한수 학생만의 보건 선생’이 되어주겠다고 했던 보건 선생이다.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
나는 그녀의 목을 쥔 손아귀의 힘을 천천히 풀었다.
“후우... 당연히 눈치채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혀 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두 딸에게 집중했다는 뜻이겠지요?”
“...네가 여기 왜 있냐?”
“예전에 했던 말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교장님이랑 잘 지내시는 강한수 학생님에게는 제 교육이 필요 없기에 그 대신, 자녀분들을 챙겨드리고 있습니다. 셀레니스와 셀비너스의 탯줄도 제가 잘라줬지요.”
“아하!”
도덕 선생 때문에 내가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수학, 역사, 화학, 생물, 체육, 원예, 사회, 수영, 가정, 미술, 음악, 지리, 연기...
사람의 생김새만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든 교사가 엉터리인 건 아니었다.
아니, 도덕 선생 같은 극소수가 전체를 욕먹게 했다.
보건 선생이 말했다.
“셀레니스, 셀비너스. 경계를 풀고 공손히 인사하세요. 여러분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아빠입니다.”
“아빠?”
“아빠...?”
나에 대해서 탈리아와 보건 선생이 자주 얘기했었던 걸까?
두 일란성 딸의 얼굴은 그다지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보건 선생이 재촉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인사!”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두 딸은 꾸벅 숙였던 허리를 펴며 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로 보답해줬다.
“이 아빠도 반가워. 그리고 많이 늦었지만, 정말 고맙다. 건강하게 태어나줘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두 딸은 척추만 반반씩 닮은 게 아니었다.
보건 선생의 한숨이 들렸다.
“저 미소는 도저히 안 고쳐지네...”
왜? 귀엽잖아?
페스티벌 차원에 우뚝 설 정의로운 쌍둥이의 미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