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46화 (346/430)

 346화

[22회차] 귀여운 척!

“213년 전, 정의로운 용사 강한수와 잡것들은 마왕 페도나르의 성으로 진격했어. 검희, 검왕, 현자, 용병왕, 요정왕. 성녀들을 잃고 무수히 많은 동료를 희생하며 마침내 최후의 결전이 코앞까지 다가온 거였지! 대악마D가 수많은 악마 졸개를 이끌고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어. 그러자 검왕 알렉스가 개소리했지. 너희는 먼저 앞으로 가라! 이것들을 쓰러트린 후에 따라가겠다!”

“죽었나요?”

“죽을 것 같아요.”

...단번에 맞추니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미가 없군.

“맞아. 오만하고 독선적인 검왕 알렉스는 인류연합군과 함께 뒤에 남아서 대악마D를 막다가 죽었어. 나는 볼일을 보러 갔다가 우연히 죽어가는 검왕 알렉스를 발견하고 그의 임종을 지켜줬지. 그는 정의로운 용사님의 가슴 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며,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리는 데 혁혁한 도움을 줬지!”

“와아!”

“대단해!”

나는 호수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두 딸을 좌우에 끼고, 내 1회차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뒤의 2회차부터 지금까지 200년은 단순한 수확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인격 형성은 1회차의 10년 동안 완성됐으며, 말년에 마스터 몰랑을 뵈면서 절정을 맞이했다.

그리고 현재.

나는 요정답지 않게 생긴 두 딸의 아버지가 되어있었다.

검희 밑에서 엄격한 기사로 성장한 아들 카리스는 애교가 없었는데, 탈리아의 두 쌍둥이 딸은 그런 면에서 확실히 달랐다.

“...강함이 전부는 아니지.”

“아빠?”

“뭐가요?”

“하하! 다음에는 강함이 전부는 아니란 교훈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강한 수컷만 보면 발정하던 인어공주 아쿠아의 최후를... 더 얘기하면 재미없으니 생략하마.”

젊은 망룡왕 뇌비우스를 쓰러트리긴 했지만, 두 딸은 그렇게 강한 편이 아니다.

자그마치 160살.

태어난 시기로 따지면 오빠라고 할 수 있는 카리스보다 나이가 10배 가까이 많다.

그런데 순수한 전투력은 큰 차이가 없었다. 셀레니스와 셀비너스가 훨씬 강한 이유는 순전히 ‘신격’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 척추를 닮은 아들 카리스가 회귀의 굴레를 벗어나면, 100년 안에 여동생들을 추월할... 무리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신격 ‘응징’은 답이 안 보인다.

도대체 어떤 순진한 신이 어린 쌍둥이 자매에게 핵미사일 빨간색 단추를 준 거야? 그 순진함에 척추가 떨리는군!

“셀레니스, 셀비너스.”

“네.”

“네에.”

“강한 힘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지. 대신에 강한 힘에는 공포가 따른다. 이 넓은 우주의 어딘가에 나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을 거라고. 그자가 나의 소중한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다는 공포가 자리하지. 모르고 날뛴다면? 그 또한 행복이겠지. 적어도 빼앗기기 전까진 행복할 테니.”

“어려워요.”

“머리가 아파요.”

“하하! 너희는 몰라도 돼.”

나는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앞으로도 강해질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강해지지 않아도 될 세계를 선물해주는 것.

은퇴하여 기둥서방이 된 내게 주어진 마지막 숙제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식사하세요~”

탈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딸은 거의 자동반사처럼 그쪽으로 뛰어갔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라누벨은?”

“이 주변에는 없는 게 확실합니다. 다른 위협도요.”

한죠가 지상에 착지하며 답했다.

나는 두 딸의 머리를 쓰다듬던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차분히 생각했다.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또 어딘가에서 귀여운 척하며 선량한 용사와 원주민들을 속이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1차원적으로 접근한 것 같았다.

그녀는 판타지아 차원의 굴레를 벗어나서 탈주했다.

페스티벌 차원이라고 못 벗어나란 법은 없다.

이미 우주로 튄 게 아닐까?

“지상에는 교생들이 쫙 깔린 상태라서 돌아다닐 수 없겠지.”

비겁한 마누라가 포상을 팍팍 뿌려서 ‘교생 페스티벌’처럼 만든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라누벨을 찾기 위해.

현재, 도시가 아닌 모든 지역은 교생들이 삽을 들고 ‘극한의 환경’을 꾸미는 중이다.

즉, 숨을 장소가 없다.

숨는다면?

“천사들이 사는 천상 외에는 라누벨이 갈 곳이 없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여전히 페스티벌 차원에 있다면. 한죠. 너는 지금부터 내가 갈 때까지 하늘을 들쑤시고 다니도록.”

“마왕님은 뭘 하시게요?”

“밥 먹어야지.”

“......”

“불만이면 너도 괜찮은 수탉을 잡아서 결혼하든가.”

“으으... 가는 김에 겸사겸사 찾아보죠. 기대는 안 되지만.”

펄럭-!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펼친 한죠가 하늘 높이 날아갔다.

“자... 그러면.”

나는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이어서 보냈다.

*

나는 새벽에 조용히 빠져나왔다.

탈리아는 내가 더 오랫동안 함께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모든 걸 잃을 수 있다.

판타지아 차원이 몰랑소프트에 넘어가는 순간, 차원을 구성하는 나와 쏘시엘은 영원히 속박되어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스르륵...

란제리 차림 위에 담요로 부끄러운 속살을 가린 그림자A가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용사님. 엘브하임 님께서 잠시만 대화하길 원하십니다.”

“어디지?”

“호숫가입니다.”

“그래.”

통로는 필요 없다.

나는 자연스럽게 공간을 접으면서 벽 너머로 이동.

호숫가를 산책하듯 걷고 있는 엘브하임 옆까지 단번에 도착했다.

“오! 정말 빠르시군요. 암살자셨으면 저 같은 요정은 언제 죽었는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하하!”

“잘도 웃음이 나오는군.”

“언제나 제 죽음을 떠올리며 약자답게 살아가서 그런 걸까요? 제 명운이 질긴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란?”

“용사님께서 제 딸을 보기 위해 페스티벌 차원으로 오시진 않았을 겁니다.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뭐, 그렇지.”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페도나르에 이어 두 번째 장인어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 아이들은 전부 ‘미혼녀’의 뱃속에서 태어났다.

검희 카이사, 탈리아.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검희는 여전히 ‘처녀’로 알려져 있고, 탈리아는 ‘용사님과 하룻밤 정분’이란 로맨스로 덮여 있다.

정실은 쏘시엘이 유일하다.

스륵.. 꾹.

어느새 다가온 그림자A랑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 엘브하임이 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페스티벌 차원은 최초의 천사 파르마엘의 고향입니다. 판타지아 행성으로 이주해온 마왕 페도나르랑 조금 다르지요. 파르마엘은 아주 먼 옛날부터 자신의 동족과 추종자를 늘려왔습니다. 천사들에게 시켜서 직업 모험가를 장려해온 거지요. 하지만 모험가가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요정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좀 더 들어보기로 했다.

상대는 유감스러운 취미에도 불구하고 모든 요정에게 존경받는 3대 요정왕 엘브하임이니까.

허튼소리는 안 할 것이다.

“페스티벌 행성에 더는 탐험할 곳이 없다고 판단한 파르마엘은 인간이 살기 적합한 다른 차원의 행성으로 눈을 돌립니다.”

“판타지아.”

“네. 맞습니다. 파르마엘은 그곳의 수호신이었던 페도나르랑 친분을 쌓아서 허락을 맡은 후, 수많은 모험가를 이주민으로 속여서 판타지아 차원으로 보냅니다.”

“파국의 시작이지.”

그 모험가들이 행성의 정령이었던 장모님 ‘판타지아’를 살해하면서 페도나르와 파르마엘의 사이가 극도로 틀어진다.

그 뒤는 잘 안다.

파르마엘은 그동안 육성한 모험가 중 가장 뛰어난 전사를 ‘용사’로 부르며 ‘마왕’ 페도나르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 위업을 달성한 가출선배가 ‘최초의 용사’로 불리게 됐다.

“아시는군요?”

“그림자A가 말 안 해줬나?”

“듣긴 했습니다. 마왕의 딸이랑 결혼하셨다지요? 순서로 따지면 제 딸이 먼저일 텐데요.”

“이건 사기야.”

임신율이 극악이라서 1000년에 한 번 임신하면 다행이라는 요정 왕족이 단 하룻밤에 성공하다니!

말이 안 된다.

“세상일이란 게 원래 다 그렇습니다.”

“그건 됐고. 그래서? 나에게 200년 가까이 수집한 정보들을 알려주고 싶었던 건가?”

“정확합니다. 하지만 이미 아시는 정보를 알려드리려고 용사님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는 건 아닙니다.”

“그래?”

종결자 섹스피어도 말이 잘 통했지만, 3대 요정왕 엘브하임도 만만치 않았다.

유감스러운 취미 얘기할 때 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지요. 행성에 정착한 페도나르와 파르마엘의 목표는 같았습니다. 세계정복. 세상의 모든 걸 갖고 싶다. 순수한 어린애 같은 발상에서 시작됐지요. 그런데 둘은 세계정복의 준비 단계에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페도나르는 동족을 늘리고 군대를 키웠습니다. 반면에 파르마엘은 동족을 늘리고 모험가를 키웠습니다. 모험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과연...”

세계정복을 하고 싶다면 군대를 양성했어야 한다.

그런데 뜬금없이 모험가?

어떤 미사여구로 포장하더라도 이들은 무덤과 유적을 파헤치는 좀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정복한 국가의 백성들을 안정시킬 역량이 없다.

무법자들이 법치국가를 운영한다고 하면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지구의 역사만 돌아봐도 알 수 있다.

즉, 무언가가 있다.

“그 당시에는 순수한 어린애 같았던 파르마엘에게 누군가가 모험가란 헛바람을 불어넣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험가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렇지요. 모험가는 끊임없이 모험하는 자들. 모험을 동경하고 찬양하는 누군가가 최초의 천사 파르마엘에게...”

“라누벨!”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라누벨’이었다.

그녀는 주둥이로 항상 ‘모험’을 노래하다시피 했다. 무슨 일이든 항상 모험으로 귀결됐다.

우정도 모험, 사랑도 모험, 성장도 모험, 복수도 모험, 사냥도 모험, 인연도 모험, 수입도 모험...

정복도 모험이라고 할 년이다.

엘브하임이 이어서 말했다.

“제 풀네임은 엘브하임 칸 라누베르크입니다. 엘브하임은 2대 요정왕이었던 어머니께 받은 이름이고, 칸은 남대륙의 요정 족장에게 대대로 붙는 칭호. 그리고 라누베르크는 저를 양자로 들인 신성제국 황가로부터 받은 성입니다.”

“신성제국. 파르마엘의 손자 리헬도 그 나라의 피가 섞여 있었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저는 거의 200년 동안 인간과 천사 여성들의 가슴을 훔쳐보는 척하면서 페스티벌 행성에 흩어져 있는 고대의 정보를 수집해왔습니다.”

“모두가 깜빡 속았겠군!”

훔쳐보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훔쳐보고 있었으니 눈치채는 원주민이 없었을 것이다.

“라누벨은 고대어로 진리. 라누베르크는 고대어로 ‘진리를 전파하는 자’를 뜻합니다. 라누베르크 황가에 대대로 내려진 건국신화에도 신께서 진리를 전파하고자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문헌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퍼즐처럼 이어붙이면 이런 의미가 됩니다. 천사들에게 모험이란 진리를 전파한 신(神)이 있었다.”

“잠깐! 그 얘기는...?”

오! 맙소사!

나는 그림자A의 가슴을 은근슬쩍 만지작거리는 엘브하임의 얼굴을 쳐다보며 감탄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상상을?

그의 놀라운 추리력에 소름마저 돋았다.

“저는 그때부터 고고학자 라누벨을 이렇게 부릅니다.”

“귀여운 척하는 신.”

“...예?”

“아니야?”

당황해하는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오답인 모양이다.

엘브하임이 정답을 공개했다.

“모험의 신이라고.”

우주에서 가장 민폐 끼칠 것 같은 신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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