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22회차] 오물오물
러브나로크.
그것의 정체는 성검이었다.
내가 모르는 종류였는데, 남의 힘을 끌어다가 충전해서 한 방에 터트리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모은 힘은 캡틴 판타지의 울부짖음에 먼지처럼 흩어졌고, 힘을 잃은 성검은 꼬챙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모험】
“이, 이런 터무니없는... 커억?!”
“당연한 결과야.”
나는 감자엘의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움켜쥐었다.
우드득.
남의 힘을 끌어다가 충전해서 하는 한 방 공격은 썩 훌륭했지만, 페스티벌 행성에 사는 모든 생명체를 다 합친 몸무게보다 무거운 캡틴 판타지의 상대는 안 됐다.
이름: 캡틴 판타지
별호: 위대한 아기님
남자의 로망을 가득 담은 슈퍼로봇에서 시작된 ‘캡틴 판타지’ 프로젝트는 거대한 덩치가 핵심이었다.
일반 용들은 상관없었지만, 황혼기의 망룡왕 뇌비우스의 폭력적인 체급에 대적하려면 이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응애♪”
슈퍼로봇이 초대형 아기로 바뀌리라고는 당시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인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원초의 목적은 달성했다.
크다. 정말 크다.
캡틴 판타지가 소환되는 것만으로도 등의 날개가 태양 역할을 대신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인간】
성장판이 영원히 열려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GGG등급 아기님.
캡틴 판타지야말로 신격 ‘인간’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녀석에게 힘을 제공해주는 공급원, 항공모함을 움직이는 원자력 발전소인 셈.
“대충 정리가 끝난 듯한데...”
아직 라누벨이랑 결전을 벌인 건 아니지만, 천사들을 처리하면서 행성과 위성을 안 부쉈으니 나름대로 합격이 아닐까.
불나방처럼 타죽은 천사들의 영혼은 판타지아 시스템에 귀속되어 부활이나 윤회할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교보재로서.
“어, 어떻게 이런...”
“역시 안 죽네.”
나는 허공에서 알몸으로 부활한 바나나엘을 보면서 혀를 찼다.
종족특성 ‘두 번째 천사’ 덕분에 죽음을 피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으으윽...”
바나나엘이랑 분홍색 빨대가 연결되어있는 우유엘과 감자엘도 얌전히 죽지 않고 되살아났다.
【도전】
【도전】
저 신격은 피해를 나눠서 받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빨대가 이어져 있던 모두가 되살아난 건 아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양의 피해를 받으면 부활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남은 천사가 둘.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응애.”
“헉!”
“아앗?!”
캡틴 판타지는 지금까지 공격다운 공격도 하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고, 울부짖은 게 전부다.
체급이 너무 차이나서 그것만으로도 대재앙이었지만, 그것까지 배려해줄 아기가 아니었다.
퍽!
캡틴 판타지의 몰랑한 손바닥에 얻어맞은 감자엘은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끝장났다.
그리고 우유엘은?
“응애? 응애!”
“꺄아앗~?!”
그녀를 찰떡으로 오해한 캡틴 판타지가 반갑게 움켜쥐고는 입에 쏙 넣어버렸다.
그리고 오물오물.
뱉거나 삼킬 마음은 없는 듯했다.
“이제 너만 남았군.”
진즉 끝났지만, 두 번째 천사라서 죽지 않는 바나나엘.
그가 말했다.
“오만방자한 배덕자여. 이제 시작일 뿐이다. 라누베르크께서 별빛으로 내게 속삭이셨다. 그분은 돌아오신다고 하셨다. 그분은 파괴한다고 하셨다. 모험! 모험을 거부한 자들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여기에 없다는 소리군.”
그렇다면 볼일 없다.
“저 멀리, 모험으로 가득한 행성에서 모험가들이 찾아오리라. 수많은 판타지아 용사가 모여 군대를 통솔하며 용감하게 맞서 싸우리라. 그러나, 그들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천사는... 모험가들의 노예가 되리라. 모두가 라누베르크의 진리에 무릎을 꿇게 될... 켁켁?!”
“말이 많아.”
죽지도 않는 이 바퀴벌레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나는 멀뚱멀뚱 서 있는 한죠를 발견했다.
그녀가 어리둥절했다.
“저, 저요...?”
“한죠. 이 바나나는 이젠 네 소유야. 이걸 씹어먹든 빨아먹든 네 마음대로 해.”
“먹다니요. 그건 너무... 너무... 하여간 감사히 받겠습니다!”
얼굴이 새빨개진 한죠는 밧줄로 바나나엘을 칭칭 묶었다.
“이걸 풀어라! 천사로 태어나서 어찌 나에게 불복한단 말인가! 나는 두 번째 천사 바나나엘이다! 두 번째로 고귀한 존재다!”
“알아요, 바나나엘 님. 제 아버지께서는 두 번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갖춘 당신을 무척 부러워하셨어요.”
“아버지가 누구- 웁웁?!”
말을 못 하도록 바나나엘에게 재갈을 물린 한죠가 미소 지었다.
“바나나엘 님. 우리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밤새도록 해요. 저는 당신을 손에 넣고 아버지를 뛰어넘을 거예요. 제가 올바른 군주를 선택했음을 증명할 겁니다.”
“웁웁!”
이것으로 페스티벌 차원의 천사들은 정리가 끝났다.
바나나엘을 포함한 수뇌부를 몽땅 잃은 천사들은 우왕좌왕할 터. 이 부분은 아무 교생이나 붙잡고 얘기해두면 되지 않을까?
지상의 교생들은 치열한 땅따먹기 중이었다.
축제장에 모인 노점상들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입지 좋고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것처럼.
분명히 교생 중에는 천사들의 도시에 관심을 보이는 탐욕스러운 자가 나올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준비하면 된다.
“모험가 군대라...”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면서 우주의 모험가들에게 ‘FFF급 마왕을 무찔러주세요!’라고 홍보하는 중일 터.
안 봐도 훤하다.
우주는 내게 미지의 영역이다.
얼마나 많은 강자가 라누벨의 귀여운 척에 속아서 나를 토벌하고, 판타지아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찾아올지 알 수 없다.
대비는 필수.
라누벨이 이곳에 없다는 걸 확인한 이상, 페스티벌 차원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나는 추적이 힘들다.
그러니 라누벨이 모험가들을 이끌고 ‘재도전’할 때까지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응애~♪”
“그래. 너만 믿는다.”
무언가 깜빡한 것 같지만, 분명히 사소한 문제일 것이다.
*
용사 페스티벌이 시작되면 졸업생들이 나를 잡는답시고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괘씸한 그들의 척추를 전부 응징해줄 계획이었지만, 라누벨이 모험가들을 이끌고 복수를 준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졸업생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라누벨 일당으로부터 이곳을 지키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 문제는 비겁한 마누라랑 상의해볼 필요가 있었다.
“잘생긴 남편님! 이 쏘시엘이 너무 보고 싶지 않았어?”
“...네가 엄청나게 이 남편님을 보고 싶었던 건 알겠어.”
“이, 이건 내가 아니야! 잘생긴 남편이 너무 그리워서 밤마다 혼자 위로를... 아앗!”
“그랬군.”
“으으...”
바쁘다던 쏘시엘은 내 호출을 받자마자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나는 남편님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마누라의 비겁한 골반을 만지작거리다가 툭 던지듯 질문했다.
“너는 아이 생각 없냐?”
“...많지.”
“그러면 캡틴 판타지처럼 귀여운 아기로 한 번 뽑아봐.”
“아기가 입맛대로 골라지는 스포츠카인 줄 알아?!”
“낳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아는 척은.”
“으읏...”
내가 이번에 말을 꺼낸 이유는 살짝 양심이 찔렸기 때문이다.
검희가 낳은 카리스는 당시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탈리아가 낳은 쌍둥이 딸은 내 계획에 없었던 기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공증인까지 세워둔 마누라는 아이가 없고, 내연녀라고 말하기도 모호한 두 여성에게 받은 아이만 벌써 셋이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는 가출선배처럼 패가망신하지 않기 위해 슬쩍 제안했다.
“어때?”
나는 11번째 손가락의 봉인을 풀 의향이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특별하다.
검희와 탈리아는 내가 ‘신’이 아닐 때 아이를 잉태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뿐만 아니라 비겁한 마누라도 신격을 갖춘 ‘신’이다.
신끼리 낳은 아이는 신일까?
아니더라도 범상치 않은 똘똘한 아이가 나올 것 같다.
“안 돼.”
“아이 갖는 게 무서워?”
“응.”
“...정말로?”
“정말로. 나는 두 번째니까. 내 아이도 두 번째여야 해. 하지만 남편님에게는 아이가 벌써 넷이나 있어. 예전에도 쑥떡과 카리스가 이미 있는 상태였지.”
“......”
“내가 아이를 낳으면... 양자이긴 해도 첫째인 쑥떡 빼고 다 죽어. 그리고 쑥떡이 죽으면 내 아이도 첫 번째가 돼서 죽고. 그게 운명이야.”
“허!”
뭐든지 두 번째라는 것이 이토록 끔찍한 저주일 줄은 몰랐다.
“자, 잠깐만. 슬픔에 빠진 아내를 위로해주는 방법이 손가락밖에 생각나는 게 없어? 좀 더 평범한 것도- 아읏?! 많잖아...!”
“진정한 용사는 주위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법.”
“내가 신경 쓰여! 남편은 철면피겠지만, 교장인 내게 결재받으려고 대기 중인 교사와 교생들이 다 보고 있단 말이야!”
“싫으면 밀치시든가.”
“...비겁하잖아.”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리는 쏘시엘의 몸이 얌전해졌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아내다.
도시의 공원 벤치에 앉은 나는, 옆에서 교사들에게 서류결재를 해주는 쏘시엘에게 말했다.
“라누벨이 모험가들을 이끌고 침공해올 거래.”
“정말로 페스티벌 차원에서 벗어났는지 확인해봐야겠네.”
“아... 그렇군.”
바나나엘은 라누벨이 차원을 탈주했다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일 뿐.
나간다고 해놓고 페스티벌 차원 어딘가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쏘시엘이 말했다.
“하지만 라누벨이 정말로 여기에 없다면 남편이 굳이 축제의 사냥감이 될 필요는 없어.”
“그러면?”
“남편을 대신할 존재를 우리는 이미 확보했어. 파르마엘, 바나나엘. 그리고 수많은 천사가 페스티벌에 참가한 용사들의 앞길을 가로막겠지. 그들의 감독으로 한죠를 임명하고, 그녀의 빈자리는 크로마티구스 장군이 맡을 거야.”
“......”
“빨강이 장군.”
“아하!”
“나중에 보리스 왕자를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조건으로 그녀의 충성을 받아냈어.”
“아앗... 나의 보리스가...”
슈퍼로봇 ‘캡틴 판타지’의 명맥을 이을 인공지능으로 채용할 예정이었는데, 마누라에게 빼앗겼다.
“그만 좀 괴롭혀.”
“녀석에게 살해당할 뻔했어!”
“그건 아는데...”
“섭섭하다! 잘생긴 남편님을 죽이려고 한 남자의 편을 들다니! 네가 그러고도 첫 번째 마누라냐!”
“미,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첫 번째 아내답지 못한 행동이네. 다른 남자의 편을 들다니! 내가 잠깐 미쳤었나 봐. 용서해줘요, 우주에서 가장 잘생긴 남편님!”
“...내가 잘생겨서 참는다. 다시는 이러지 마.”
“응응. 다시는 안 그럴게.”
교사와 교생들이 우리를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왜? 신기하냐?
이것이 기둥서방이란 것이다.
나는 어깨에 머리를 기댄 쏘시엘의 골반을 쓰다듬으며 질문했다.
“판타지아는?”
“끝났어. 남편님이 조금 전에 네임드 천사들을 추가로 학살하는 바람에 그들을 새롭게 배치해야 하지만, 그런 자잘한 조정은 페이커-리 교감이 알아서 할 거야.”
“베이커리가 교감이라니...”
“유능한 남자야. 남편님의 발끝에도 못 미치지만!”
“그렇군.”
남의 아들을 인질로 삼는 그딴 양아치가 정의로운 MAX급 남편님께 비빌 수 있을 리 없지!
“그런데 정의로운 남편님. 천사들이랑 싸울 때, 세 번째 천사를 보지 못했어? 이름은 우유엘인데, 사망자 명단에 없다고 문의가 들어왔어. 매우 똑똑한 여자야. 내 발끝에도 못 미치긴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후환이 될 거야.”
“이상하네. 분명히 잡았어.”
“정말?”
“무능한 베이커리에게 다시 꼼꼼히 살펴보라고 해. 유능한 내가 후환을 남겨둘 리 없잖아?”
“응.”
나는 쏘시엘이랑 페스티벌 행성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마무리 작업.
그렇게 며칠에 걸쳐서 세세한 조정을 마친 우리는 축제가 시작되는 대신전으로 향했다.
감찰단을 맞이하기 위해.
여기는 외부인사가 판타지아 교육장으로 들어오는 정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응애야.”
“응애?”
“뭘 온종일 오물거리고 있냐? 또 불량식품은 아니겠지?”
“응애.”
“아니면 다행이고.”
몰랑소프트 감찰단이 마침내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