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23회차] 용싸 지크
파앗! 팟! 팟!
용사를 소환하는 대신전의 마법진이 환한 빛에 휩싸이더니 1명의 여성과 2명의 남성을 토해냈다.
여성은 눈빛이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20대 중반 외견의 미녀였는데, 화려한 장식이 잔뜩 달린 검은색 고스로리 복장이었다.
미용실에서 공을 많이 들였을 것처럼 웨이브 진 황금색 머리카락은 그 자체만으로 예술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몸매 또한 체계적인 관리로 가꾼 것 같은 균형미가 돋보였다.
【파멸】
그리고 신(神)이었다.
【몰랑】
동시에 ‘신의 사도’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격이 높은 상급 신을 따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몰랑소프트 대표이사님의 비서 겸 애완동물인 디스토리아입니다. 전략팀 팀장도 겸하고 있지요. 그리고 뒤에 두 친구는 판타지아 교육장의 객관적인 테스트를 위해 데려온 지원자입니다. 학생으로 입학할 예정입니다.”
“당신이 감찰단의 총책임자?”
“그렇습니다. 신격이 난잡한 걸 보니, 당신이 마왕 강한수로군요. 자기소개는 안 하셔도 됩니다. 파악은 대략 끝난 상황입니다. 신임 교장이신 쏘시엘 양도요.”
“좋아. 디스코 양. 본론으로 빨리 넘어가자고.”
“디스토리아입니다.”
“그거나 이거나.”
“...그냥 팀장으로 불러주시길. 그리고 입학할 학생들의 이름은...”
“굳이 알아야 해? 학생A, 학생B면 충분하잖아?”
“...그렇지요.”
팀장은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었고, 학생A와 학생B는 썩은 감자 같은 얼굴이 됐지만, 아주 사소한 문제다.
내가 틀린 말 했나?
쏘시엘이 잽싸게 앞으로 나섰다.
“돌아서면 잊힐 행인 취급했다고 너무 불쾌하게 여기지 마세요. 판타지 마왕님은 능력을 굉장히 중시하니까요. 두 분이 실력을 증명하면 사과하고 제대로 부를 거예요.”
“아, 네.”
“그렇다면야...”
학생A와 학생B가 쏘시엘의 비겁한 가슴을 힐끔거리며 수긍했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아름답다는 저주 아닌 저주의 효과.
본인의 취향은 상관없다.
누구든 쏘시엘을 보면 ‘누구 다음으로 아름답다.’라고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니까.
상황은 그렇게 정리됐다.
물론, 내 마누라의 가슴 관람료는 나중에 복리로 받아낼 것이다.
쏘시엘이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은 바로 입학절차를 진행할게요. 현재 실력을 알 수 없기에 초등교육과정부터 진행합니다.”
번쩍! 번쩍!
학생A와 학생B가 다시 한번 빛에 휩싸이더니, 곧장 판타지아 차원으로 보내졌다.
그 둘은 신성제국에서 몰랑폰을 습득하고, 금방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빠른 적응력을 보여줬다.
특별히 뽑은 인재다웠다.
쏘시엘은 곧바로 디스코 양에게도 시야를 공유해줬다.
그러자 디스코 양이 거절하며 이상한 말을 했다.
“미리 공문을 보냈을 텐데요? 학생을 무작위로 선택해서 본다고. 그 둘은 혹시 모를 부정행위에 대비하기 위해 데려온 것뿐입니다.”
베이커리에게 들은 기억이 난다.
“설마, 한 명만 보고 전체를 판단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닙니다, 마왕 씨. 일단은 교육과정에 상관없이 3명을 살펴볼 예정입니다.”
“그런가.”
3명.
사회부적응자들에게 큰 기대는 안하지만, 그나마 똘똘한 학생들이 걸리길 빌어야 할 것 같다.
“또한, 제가 학생의 동료로 자연스럽게 동행할 수 있도록 조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제 안전은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그 정도는 제가 알아서 합니다.”
“마음대로.”
“무작위라고 해도 뽑기 같은 수단은 조작의 위험성이 있어서 어렵지요. 그래서 확실한 방법을 미리 준비해왔습니다. 우선 첫 번째 무작위 학생입니다. 몰랑폰 커뮤니티에 맨 처음으로 채팅창에 글을 올린 학생을 선택하겠습니다.”
...맨 처음?
몰랑소프트에서 어떻게 몰랑폰2를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지는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당면한 문제는, 디스코 양이 고른 학생이 누구냐는 것이다.
나는 쏘시엘을 돌아봤다.
“누구야?”
“......”
“왜? 표정이 절망으로 가득한데.”
“지크야.”
“......”
나도 마누라랑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누군가의 음모가 틀림없다.
용사 지크.
요정이랑 결혼하기 위해 동족을 배신한 정신병자로, 상종하지 말아야 할 대상 1호다.
라누벨과 감찰단 문제로 정신없어서 챙기지 못한 게 화근이다.
감찰단의 무작위 뽑기를 경계했다면, 가장 먼저 퇴출했어야 할 위험대상 1호다.
이래서 사람은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희망이 안 보이는군.
디스코 양은 용사 지크가 있는 남대륙에 소환됐다. 하지만 이대로는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없기에 약간의 조정은 불가피했다.
“지크 용사님.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남대륙의 응애교 성녀 일리나입니다.”
“왕가슴 요정 성녀라니...!”
“...그리고 이쪽은 제 친구 디스토리아예요. 아기님께 신탁을 받은 저는, 용사님께서 시련을 통과한 증표로 거인의 성검 몰랑코인을 가져오셔야 합류할 수 있어요. 그때까지는 제 친구가 도와줄 겁니다.”
“이 용사 지크가 반드시 가져오겠습니다!”
“아, 네. 무운을 빌어요...”
기존의 남대륙 성녀였던 성녀B는 거인왕 페닉스의 씨를 잉태하는 바람에 육아휴직 했다.
그래서 새롭게 그 빈자리를 채운 성녀가 도적E다.
엘브하임과 그림자A의 딸.
신분으로 따지면 기존의 성녀보다 훨씬 고귀한 혈통이다. 성녀로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뽕으로 무고한 수컷들만 안 낚으면 인성도 합격일 텐데...
“안녕하세요, 지크 용사님. 저는 디스토리아입니다. 그...”
애칭은 디스코고, 서대륙 흡혈귀제국에서 곱게 자랐습니다.
“애칭은 디스코예요. 서대륙 흡혈귀제국에서 곱게 자랐... 아앗! 참견하지 말아줄래요...!”
“죄, 죄송합니다. 디스코 님이 워낙 미인이시라 저도 모르게 쳐다봤어요...”
“아앗! 용사님께 한 말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그렇게 주눅 들지 않으셔도 됩니다!”
“앞으로는 주의할게요. 그러니 혐오스러운 벌레 보듯 하지만 말아주세요. 부탁합니다.”
“아앗...”
첫 만남은 대단히 순조로웠다.
지크는 발정하지 않고 평범한 용사처럼 행동했고, 디스코는 성추행당하지 않고 무난하게 합류했다.
가장 큰 위기는 넘긴 셈!
그리고 지크는 몰랑폰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다룰 줄 알았다.
⤷지크: 졸업을 앞둔 선배님들. 거인의 성검 몰랑코인 획득법을 가르쳐주세요. 이 후배가 채팅창에 머리 박고 부탁합니다! (__)
⤷제우스: 또 초딩 지크냐? 이 선배님이 가르쳐주지. 거인제국으로 가서 응애교에 가입해. 어떻게 가입하느냐고? 그쯤은 스스로 알아봐.
⤷오딘: 제우스 말을 듣지 마. 응애교에 가입할 필요 없어. 거인제국에서 실수라도 아기님 욕만 하지 않으면 돼. 그리고 어떻게든 거인왕을 만나서 시련을 받아.
⤷사탄: 전부 개소리다. 황제는 아기님 욕하는 걸 좋아한다. 찬양하면 어려운 시련을 잔뜩 줘. 제우스와 오딘의 말을 듣지 마.
⤷알라: 지크 후배. 사탄의 말만 무시하면 돼. 검희가 유부녀라고 근거 없는 헛소리하는 놈이니까. 선배란 녀석이 후배를 가지고 장난이나 치고. 부끄러운 줄 알아라.
⤷루크: 공유 부탁합니다.
지크는 커뮤니티를 활용해서 빠른 속도로 정보를 수집했다.
예전 같으면 여기저기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전설과 소문 등을 수집했겠지만, 이젠 다른 용사들이랑 정보를 공유할 수 있기에 그럴 필요가 거의 없었다.
특히, 지크는 특유의 간신배 같은 싹싹한 태도 덕분에 고등교육과정 선배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디스코도 똑같이 느낀 듯했다.
“지크 용사님.”
“헉!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몰랑폰만 들여다보느라 신경을 전혀 못 썼네요. 제가 또 무슨 실수를 했나요?”
“...아니요. 저를 너무 어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는 정말 헛말이었습니다.”
“디스코 님은 정말 친절하시네요. 저는 괜찮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는 건 익숙하니까요.”
“하아... 오해는 천천히 풀도록 하지요. 여쭤볼 게 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몰랑폰을 자주 활용하시는 듯한데, 도움이 많이 되나요?”
“없으면 불편해서 모험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위대한 탐험가 쑥떡이 친절하게 도와주긴 하지만, 자꾸 도움만 받으니 부담스러워서...”
“채팅창의 선배들에게 도움받는 건 부담스럽지 않고요?”
“그, 그건... 불편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몰랑폰만은 참아주세요. 저는 이제 몰랑폰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어요...”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마음껏 쓰세요! 지크 용사님! 저는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아...”
용사 지크의 동료 구성원은 대단히 편중되어 있었다.
요정 마법사, 요정 궁수, 요정 도적, 요정 사제, 요정 검사...
여기에 추가로 전원 여성이란 옵션이 붙어있지만, 멀리서 보면 수컷인지 암컷인지 구분이 안 된다.
쑥떡도 예외는 아니다.
지크의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 요정 여성으로 변신한 상태다.
“거인제국은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나와요. 오늘은 반나절 가면 나오는 여관에서 머물 거예요. 대충 닷새 뒤에 국경이 나오는데, 그때까지는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요정제국은 도시와 마을을 벗어나면 치안이 좋지 않은 편이니까요.”
길잡이 역할은 기본이고, 파티의 여행자금부터 보조물자까지 거의 혼자서 챙기고 있었다.
지크가 동료들을 입맛대로 고를 수 있었던 것도 다 쑥떡 덕분이다.
디스코는 그 부분도 지적했다.
“쑥떡 양에게 너무 의존하는 것 같은데요.”
“아! 역할분담입니다. 전투는 저와 나머지 동료들이 하니까요.”
“...이해했습니다.”
디스코는 신격에 민감한 ‘신’이기에 쑥떡이 내 사도란 사실을 이미 눈치챈 듯했다.
사실, 변신을 풀고 왼팔로 툭 치면 용사의 파티는 전멸이다.
“Goooob!”
“Gooob!”
“Gob, Gob!”
“용사님! 고블린 무리에요!”
“고블린에게 포위됐어요!”
“녀석들이 어느 틈에...!”
그들은 몬스터 중 최약체로 통하는 고블린들을 상대로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능력이 아닌 외모와 종족 순으로 뽑은 동료들답게 버티는 게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쑥떡이 뒤에서 끊임없이 상처와 체력을 회복해주지 않았으면 진즉 끝장났을 것이다.
그나마 용사 지크가 5인분 이상으로 분투해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다.
조금 거들은 디스코가 질문했다.
“지크 용사님. 힘을 숨기고 계시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스킬을 전부 비활성화하고 싸우시더군요.”
“헉! 그 사실을 어떻게... 헙!”
“추궁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유가 궁금할 뿐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습니다.”
그런 거 없다.
지크의 생활기록부를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종류: 생활기록부
▷이름: 지크
▷성향: 선(善)
▷속성: 소심
▷경력: 195년
▷기록: 1
▷총평: 입학할 당시만 해도 기대주로 꼽혔던 학생이다. 하지만 어떤 잘생긴 학생을 만나면서 사상이 삐뚤어진 게 애석하다. 평범한 무리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자신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이중성을 가졌다. 위기에 빠진 요정 여성을 구해주는 방식으로만 동료를 모으고 있다. 전투력은 중등교육과정에 입학해도 될 수준이지만, 드러낼 생각을 안 한다. 하지만 그의 몰랑폰 활용능력은 교사와 교생들도 인정하고 있다.
용사 지크는 약자들에게 떠받들어지며 살고 싶은 중2병일 뿐이다.
내가 가서 그 대갈통을 후려쳐주면서 ‘후배! 정신 차려!’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형평성 때문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몰랑폰을 활용하는 것이다.
⤷먼치킨: 지크는 약자들만 상대하는 겁쟁이다. 주위의 여자들은 전부 노예나 약자고, 평범한 연애로 사귄 여자는 한 명도 없다. 부정할 수 있으면 인증사진 올리든가. ^^
⤷지크: 누구신데 본 적도 없는 저를 멋대로 판단하시나요? 정말 불편하네요. 먼치킨 씨. 그쪽이야말로 인증사진을 올려주시죠.
⤷레몬: 둘 다 올려라. 초딩들 수준은 기대 안 하지만.
⤷아론: 여기서 싸울 시간에 사냥이나 해. 1900년 경력 선배가 해주는 말이다.
몰랑폰의 공개채팅방은 채팅창에 연속으로 일정량 이상의 글을 올릴 수 없도록 해놨기에 지금까지 말싸움이 없었다.
말을 할 수 있어야 싸우지!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가 인증사진을 올렸다.
⤷먼치킨: 몰랑한 거인왕.JPG
⤷먼치킨: 수줍은 검희.JPG
거인왕 페닉스가 캡틴 판타지의 몰랑한 엉덩이에 참교육 받은 직후에 찍은 기념사진이다.
두 번째 사진은 검희가 내게 입맞춤하는 모습이다. 내 얼굴이 안 나오는 사진 중에선 이게 가장 나았다.
그리고 지크는?
⤷지크: 저는 유치해서 사진을 안 찍어놨어요. 하지만 금방 인증사진을 찍어서 올리겠습니다.
“으아아아! 이 새끼는 뭐야?!”
죄 없는 몰랑폰을 땅바닥에 내던지며 고함을 내지른 지크.
감춰온 힘을 전부 끄집어낸 중2병 용사는 거인제국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요, 용사님?! 갑자기 왜...?”
당황한 디스코는 서둘러 용사를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능력이 떨어지는 요정 여성들은 낙오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떠난 뒷자리.
“...아버지이신가요?”
바닥에 떨어진 지크의 몰랑폰을 주운 쑥떡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이듯 질문했다.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건전한 커뮤니케이션을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