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23회차] 용사 V
“망할 자식! 내가 더 근사한 인증사진을 찍어서 코를 납작하게 해주마!”
능력치에 자신 있는 용사 지크의 패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는 중간에 마주치는 원주민들의 도움 요청을 무시하고 거인제국까지 일직선으로 질주했다.
이대로 거인왕이 기거하는 황궁까지 달려갈 기세였다.
그럴 수밖에!
⤷오딘: 초딩 지크가 늦네. 정말로 인증사진 찍으러 간 건가? 근성 하나는 알아줘야 해.
⤷제우스: 귀여운 지크의 인증사진 보고 졸업할 수 있으려나? 사진 올리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알람이나 켜둬야지.
⤷사탄: 인증은 힘들다고 봄. 지크의 실력으로는 거인왕을 절대 못 이김. 검희도 불리해지면 이상한 힘을 써서 불사신이 됨.
⤷알라: 사탄의 인성 보소. 도전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라네. 먼치킨이란 녀석에게 탈탈 털린 지크가 불쌍하지도 않냐?
몰랑폰 커뮤니티 채팅창은 ‘지크가 인증사진을 올릴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시끌시끌했다.
몰랑폰을 내던지고 그냥 가는 바람에 채팅창은 볼 수 없지만, 지크도 예상할 터.
그러니 저렇게 황소처럼 밤낮없이 달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근성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헉헉, 헉헉...”
남대륙 북부에 속하는 요정제국에서 남부 끝자락에 있는 거인제국 수도까지는 거리가 굉장히 멀다.
지구 반 바퀴쯤 할까?
탈진한 지크는 숨을 헐떡이면서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미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광경이었다.
“지크 용사님! 갑자기 서두르시는 이유가 뭔가요?”
진짜 실력을 들킬 걸 염려해서 천천히 따라온 디스코는 땀 한 방울 안 흘린 얼굴로 질문했다.
그녀랑 시선이 마주친 지크는 ‘아차!’ 하는 얼굴로 답했다.
“성검을 빨리 얻고자 하는 의욕이 앞서서 그만...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니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함께 모험한다고는 했지만, 감찰이 주목적인 디스코는 철저하게 관전자의 입장을 고집할 듯했다.
지크가 버려둔 동료들은 쑥떡이 챙기고 있었다.
천공선 오르가타를 활용하면 단번에 이동할 수 있지만, 그러면 용사들의 이동이 너무 쉬워지기에 ‘수리 중’이란 설정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당연히 내 작품은 아니고, 모험의 세세한 조정을 맡은 비겁한 교장이 짠 것이다.
“많이 온 것 같은데... 음?! 아, 젠장...”
몰랑폰의 기능 중 하나인 몰랑맵을 켜기 위해 습관처럼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지크.
뒤늦게 몰랑폰을 버리고 온 것을 떠올리고는 낭패감 깃든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경력 195년은 똥구멍과 공성추로 먹은 게 틀림없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서대륙의 어떤 공장에서, 용사가 어디에 숨든 찾아내서 습격하도록 프로그램된 안드로이드가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악한 로봇 비앙카!
도덕 선생의 이름을 계승한 만큼 인성은 기대하기 힘들다.
수세식 변기에 앉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먹고 자는 시간에도 수시로 습격한다.
그리고 표적은 용사만이 아니다.
어느새 따라잡은 쑥떡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지크 용사님. 저를 제외한 모든 동료가 비앙카의 습격에 하나둘 희생되어 몰살당했어요.”
“하필이면...”
“여기, 몰랑폰과 그녀들의 유품입니다.”
“큭!”
능력을 무시하고 종족과 외모만으로 동료들을 모집한 결과였다.
“사실상 전멸이군요.”
쭉 괜찮다고 말하던 디스코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무작위로 지크가 걸렸을 때부터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이건 내가 봐도 좀 심한 것 같았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야만용사. 그래도 돌아다니면 안 된다. 신격 때문에 저 여자에게 바로 들킬 거다.”
내 머리 위에 누워있던 최초의 정령이 한심한 소리를 했다.
“당연히 안 들키도록 조심하지. 내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섹스피어에게 주문해둔 로봇이 있어.”
“로봇...?!”
“비앙카S+. 원격조종이 가능한 남성 버전이야. 일명, 용사V. 용사의 성장을 돕기 위해 깨어난 고대의 용사란 설정이야.”
*
몰랑소프트 감찰단이 오기 직전에 업그레이드된 내 몰랑폰3+에 설치된 기능 중에는 가상증강현실이란 게 있다.
하지만 내 삶이 이미 판타지라서 불필요한 기능이었다. 잘생긴 남편이 부탁하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예쁜 마누라가 골반과 척추를 흔들면서 춤을 춘다.
현실이 더 판타지인데 굳이?
대신, 여기에 탑재된 부수적인 기능에 눈길이 갔다.
“남의 인생을 살기.”
지금부터 후배를 돕는 친절한 용사V를 만들어야 한다.
[마스터. 종족을 선택해주세요.]
[인간] [요정] [난쟁이] [악마]
[천사] [인어] [거인] [흡혈귀]
무난하게 인간을 선택했다.
뭘 선택하든 용사인 지크의 눈에는 안드로이드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판타지아 대륙에서 가장 많이 사는 인류종이 인간이기에 거기에 맞춘 선택이다.
[마스터. 성별을 선택해주세요]
[남성] [중성] [여성] [무성]
[양성] [총배설강] [촉수]
...내가 지구에서 해본 수많은 게임의 커스터마이징 캐릭터 성별은 2가지밖에 없었는데.
종결자 섹스피어는 다양한 취향을 존중해주는 모양이다.
나는 이번에도 무난하게 ‘남성’을 선택했다.
[마스터. 직업을 선택해주세요.]
[농부] [어부] [노예] [용사]
[기사] [귀족] [왕족] [상인]
[용병] [전사] [장인] [백수]
[사제] [도적] [산적] [해적]
직업은 굉장히 중요하다.
나이부터 외모, 능력치까지 그 직업에 어울리게 임의로 선택되기 때문이다.
나는 예정대로 ‘용사’를 선택했다.
[마스터. 이대로 하시겠습니까?]
[예] [수정] [대기] [취소]
[공정에 들어갑니다.]
판타지아 서대륙 상공에 있는 초대형 비행선 몰랑포스에서 안드로이드 1기가 패스트푸드처럼 즉석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짜잔!
순식간에 용사V가 탄생했다.
푸시시시...
“흠. 나쁘지 않군.”
▷종족: 하프 휴먼
▷레벨: 845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사랑S 우정S 희망S 용기S
통역A…
▷상태: 양호
굉장히 잘 만들어졌다.
특히, 안드로이드란 것을 감추기 위해 ‘절반’은 생체로 만든 종결자 섹스피어의 센스가 돋보인다.
절반은 인간, 절반은 기계.
종족을 애매하게 해서 ‘하프’ 판정을 유도한 것이다.
복장도 훌륭했다.
코스프레처럼 깨끗하고 빳빳한 옷이 아니라, 오랫동안 입었던 갑옷처럼 해진 상처들이 가득했다.
용사의 필수품인 성검이 빠지긴 했지만, 설정은 은퇴한 용사이기 때문에 상관없다.
애초에 나는 성검을 애용하는 용사도 아니었고.
“몸이랑 얼굴은 별로네.”
쏘시엘이 몰랑폰으로 즐겨 보는 지구의 로맨스 웹툰 남주인공처럼 오각형 다리미 같은 얼굴.
몸도 실속 없이 팔다리만 길다. 툭 치면 척추가 부러지리라.
하지만 잘생긴 나를 닮지 않았다는 점에선 합격이었다. 누구도 용사V가 나라는 사실을 모르리라.
“자! 슬슬 가볼까.”
이 몸으로 남대륙까지 가려면 한세월이지만, 섹스피어는 마무리까지 확실하게 챙겼다.
[마스터.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몰랑포스에 탑재된 소형 천공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용사V는 그것을 타고 곧장 남대륙으로, 용사 지크를 앞질러서 빠르게 이동했다.
아! 잊지 말아야지.
⤷먼치킨: 인증한다던 지크는 죽었나? 안 보이네. 그냥 인정해. 같잖은 실력으로 노예를 사서 여자친구라고 소개하는 한심한 자식아.
⤷지크: 기다려! 찍어서 금방 올릴 테니까!
지크가 포기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전력으로 황궁까지 달렸다.
그동안 나의 용사V는 자연스럽게 지크랑 마주칠 준비를 했다. 평소 같으면 대충 했겠지만, 이번에는 감찰단이 있기에 세심하게 짰다.
그녀의 모험은 이번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으로 최소 2번은 더 여행하게 되는데, 형평성이 어긋난 설정이 보이면 바로 지적할 것이다.
그건 곤란하다.
“떠돌이 용사가 제격이지.”
깊은 숲에서 지크랑 우연히 마주치는 것으로 하자.
하지만 이걸 지크가 공략집에 마주친 시간과 장소를 올리면 곤란하므로 약간의 준비가 필요하다.
나는 거대한 호수를 낀 울창한 숲 한복판에 용사V를 세워둔 후, 마왕의 육체를 조심히 움직였다.
만날 대상은 거인왕이다.
그러나 직접 만나는 건 아니다. 거인제국에서 은밀히 활동하는 악마에게 지시하는 형식이다.
‘거인왕 페닉스시여. 마왕 파르마몬 님의 메시지입니다.’
‘뭐냐?’
‘혹시라도 용사가 덤비면 죽이지 말고 기절시킨 후, 북서쪽 호수로 던지라는 내용입니다.’
‘이상한 주문을 하는군. 알겠다고 전해라.’
‘예. 폐하.’
그렇게 사전작업도 마무리.
동료들까지 버려가며 신속하게 거인제국 수도에 도착한 지크는, 여관에 짐도 풀지 않고 곧장 거인왕을 만나고자 황궁으로 돌격했다.
그리고 멋지게 외쳤다.
“거, 인, 왕-!”
“...정말로 용사가 왔는가.”
“그렇다! 전설의 용사 지크가 거인의 성검 몰랑코인을 받으러 왔다! 아기님의 영광과 세계평화를 위해!”
“죽고 싶을 만큼 가혹한 시련을 통과하라.”
“거절한다!”
“...그런가.”
힘으로 가져가겠다는 의미.
중학생 능력치로 초등교육장에 틀어박힌 용사다운 자신감이었다.
반면, 교실 수만큼 영혼과 능력이 분할된 거인왕 페닉스는 매우 약해진 상태였다.
▷종족: 자이언트 엘프 로드
▷레벨: 999+
▷직업: 황제(세금=경험치↑)
▷스킬: 대형G 괴력Z 영생MAX
재생SSS 체력SS…
▷상태: 권태, 여유, 변신
스킬 ‘대형’이 신의 영역에 도달하긴 했지만, 저것을 위해 나머지 스킬들을 희생하는 바람에 불균형한 능력치가 돼버렸다.
그래서 지크가 저리 자신만만한 것이리라.
▷종족: 엘프니즘 휴먼
▷레벨: 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정력ZZZ 회피ZZ 검술Z
우정Z 체력Z…
▷상태: 패기, 피로, 고양
나쁘진 않았다.
판타지 195년 동안 가장 높이 올린 초월영역 스킬이 ‘정력’이란 게 어이없긴 하지만, 선택은 본인의 몫이니 묻지 않겠다.
“덤벼라!”
“거참...”
어이없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린 거인왕은 싸워주기도 귀찮은지 바로 ‘작은 척’을 해제했다.
쿠구구구...
안 그래도 용사 지크보다 능력치에서 우위에 있던 거인왕의 몸집이 거대해졌다.
종족 보정 덕에 일반적인 거인의 전투력은 같은 능력치를 지닌 인간의 5배로 계산한다.
그런데 거인왕은 일반적인 거인의 덩치를 압도적으로 상회했다.
전투력이 인간의 몇 배인지 감이 안 온다.
황궁 밖에 세워진 ‘아기님 동상’의 몰랑한 허벅지 크기가 된 거인왕 페닉스는 개미처럼 작은 용사 지크를 움켜쥐었다.
우드득.
“으아아아악?!”
그래도 죽지 않는다.
스킬 정력의 ‘여성 앞에선 쓰러지지 않는다.’라는 효과 덕분이다.
하지만 싸움은 끝났다. 아니, 애초에 싸움이라고 말하기도 미안했다.
“꺼져라.”
부웅!
거인왕 페닉스는 내 주문대로 용사 지크를 북서쪽 호수로 던졌다.
그리고,
풍덩-!
호수에 빠진 지크는 바로 깨어나지 못하고 물밑으로 잠겼다.
드디어 때가 됐다.
번뜩!
정의로운 떠돌이 용사V가 나설 차례!
나는 용사V를 조종해서 한심한 후배 지크가 익사하지 않도록 서둘러 구출했다.
...숨을 안 쉬네.
나는 지나가던 오크A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야! 이리 좀 와봐.”
“KuKu?!”
튼실한 오크에게 인공호흡을 받은 용사 지크가 눈을 떴다.
“콜록콜록! 가, 감사합니다. 저를 구해주신 숙녀분- 헉! 오크?!”
나는 수줍음으로 얼굴이 파랗게 질린 오크A를 놔두며 인사했다.
“안녕. 후배님. 오크랑 인공호흡은 처음이지?”
“우에에에엑!”
왜 그래? 오크 기분 나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