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23회차] 연애의 정석
“너는 대체 뭐야?!”
“생명의 은인. 내가 아니었다면 너는 이미 죽었을 거다.”
“살려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켁켁?!”
“그렇다면 죽어라.”
“사, 살려-!”
내가 들킬 것 같아서 웬만하면 척추를 안 잡으려고 했는데, 이 후배는 말로 해선 안 됐다.
하지만 기계 몸의 한계가 금방 드러났다.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를 잡은 까닭에 제압은 확실하게 됐지만, 중등교육장에 어울리는 능력치를 보유한 지크의 육체는 굉장히 튼튼했다.
그렇다면,
풍덩!
건방진 지크 후배를 데리고 호수로 들어갔다. 그리고 머리를 수면 위로 뺐다, 넣었다 반복했다.
고상하게 표현하면 물고문.
내가 조종하는 이 몸뚱이는 호흡하는 시늉을 할 뿐, 정말로 하는 건 아니니까.
“물맛이 어때?”
“자, 잘못했- 푸하! 죄송합니- 보글보글...”
“더 먹어. 선배의 사랑이다.”
“어억...!”
물로 허기진 배를 가득 채운 지크 용사의 눈빛이 총명해졌다.
정의로운 선배님 말씀을 경청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지크 후배.”
“네! 선배님!”
“나는 정말 귀찮고 싫지만, 여러모로 부족한 후배가 동행을 간절히 원하니 어쩔 수 없구먼.”
“예? 그건 무슨 개소... 네! 그렇습니다, 선배님! 이 후배가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 앞으로 잘해라.”
“네...”
나의 용사V는 자연스럽게 용사 지크의 파티 합류에 성공했다.
이젠 다음 단계다.
“지크. 네 동료가 실종된 너를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여기서 야영할 거다.”
“아, 네.”
“준비하도록.”
“네... 네?”
“수세식 변기가 없는 야영은 끔찍하지만, 혼자서 생활하는 방법도 키워야 하는 법이다.”
“굳이... 잡일 잘하는 동료 하나 영입하면 해결됩니다만.”
“허어!”
내 가르침에 시작부터 반론을 제기하는 지크를 보면서 한탄이 절로 나왔다.
반항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끔찍한 사고방식이 나를 개탄스럽게 했다.
귀찮은 잡일을 대신해줄 동료를 구하겠다고?
판타지 원주민들이랑 아주 똑같은 사고방식이다.
용사에게 몽땅 시켜놓고 자신들은 뒤편에서 결과물만 꿀꺽하겠다는 고약한 심보!
내 정의감이 불끈 타올랐다.
“지크. 용사 경력이 어떻게 되지?”
“200년입니다. 기간만 따지면 선배님보다 더 많을 겁니다.”
양심 없는 새끼! 195년이면서 반올림하다니!
일단은 참자.
“네가 나보다 많다고? 시건방진 녀석, 잘 듣도록. 나는 2000년이다. 이 땅에 수세식 변기와 몰랑교가 생기기 전부터 살았다.”
“......”
“증거를 내놓으라는 얼굴이네? 너는 증거 있냐? 하지만 좋다. 나중에 시간 될 때 보여주마.”
“그런데 경력은 갑자기 왜 묻는 겁니까?”
“얄팍한 경력으로 이 훌륭한 선배님의 가르침에 딴죽 걸지 말라는 뜻이다.”
“완전히 꼰대...”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신경을 건드리면 임신할 때까지 오크랑 교배시킬 줄 알아.”
“......”
일그러진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했던 지크의 표정이 그럭저럭 쓸만하게 바뀌었다.
저것이 배우려는 자의 자세.
이제야 좀 가르칠 기분이 조금은 나는군.
“야영 준비해. 마른 땅을 구하되, 물가에서 너무 가깝지 않은 곳으로 해야 한다. 밤새 비가 내리면 범람해서 야영지가 물에 잠길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물가에서 너무 멀어지면 식수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므로 수면보다 높은 고지대이면서도 가까운 장소를 골라야 해. 보통은 먼저 왔다가 떠난 상단이나 용병, 사냥꾼들이 입지조건 좋은 장소를 다져놓기에 고민할 필요가 없지. 하지만 이곳처럼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를 탐험할 때는 스스로 이것저것 따져봐야 한다. (중략) 나무를 사랑하는 척하는 요정들이 나무 아래에 야영하자고 제안하는데, 그럴 때는 대갈통을 힘껏 후려쳐줘라. 암살당하기 딱 좋은 입지조건이니까. 사방이 탁 트인 장소가 최고다. 여전히 해줄 말이 많지만, 그건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지. 혹시,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줬는데도 질문 있냐?”
“없습니다!”
“그러면 얼른 시작해. 나는 후배가 땅을 잘 고르는지 지켜보겠다.”
“네!”
나는 지크의 장점을 발견했다.
일단 가르쳐주면 열심히 하려는 시늉은 했다.
하지만 판타지 세계에서 195년 동안 생활하며 후천적으로 생긴 고질병은 고치질 못했다.
일명, 요정편력이란 것이다.
“실례합니다, 아름다운 요정 숙녀분. 당신이 밟고 있는 나뭇가지를 줍고 싶은데요.”
“아! 실례했습니다.”
“지금 밟으신 돌멩이도 치워야 합니다. 숙녀분이 머물렀던 이 향기로운 자리를 야영지로 골랐습니다.”
“그, 그런가요.”
당황한 요정 암컷은 뒷걸음치면서 꺼림칙한 지크의 마수로부터 도망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눈치 없는 지크는 어떻게든 계속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북부에서요. 엘브하임 폐하를 치료할 약재를 구하기 위해 오지를 탐험하는 중입니다.”
“엘브하임... 요정 숙녀분들에게 인기가 정말 많은 분이죠. 저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요정 왕족으로 태어났다는 것밖에 없는데.”
“당신, 한 번만 더 폐하를 모욕하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단지 사실을... 하여간 죄송합니다! 그러니 저랑 좀 더 대화를...”
“다가오지 마세요. 하! 진짜 기가 막혀!”
요정 암컷이 휙 떠났다.
그러자 지크는 수치심으로 새빨개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기가 아름답고 고귀한 요정이면 다야? 나를 무슨 여자에 굶주린 변태로 아네. 위기와 노예시장에서 구출한 요정들이랑 나도... 망할! 먼치킨 새끼가 또 떠올랐어! 젠장! 젠장! 나도 평범한 연애로 근사한 요정을 사귀고 말 테다!”
다시금 인증사진을 떠올린 지크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딱 봐도 도망치려는 것 같다.
내가 지시한 야영지는 알 바 아니고, 얼른 인증사진부터 찍어서 올려야 한다는 거겠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나는, 완전히 도망치지 않고 이 근방을 떠돌며 약초를 찾고 있는 요정 암컷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지.
당근과 채찍 전략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부스럭.
“실례합니다, 요정 아가씨.”
“당신도 그 인간 수컷처럼 저에게 볼일이 있으신가요?”
“엘브하임 폐하의 친구입니다. 보증은 정령이 해줄 겁니다. 똑똑한 요정이라면 아시겠지만, 정령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
“그, 그쯤은 저도 알아요! 제가 얼마나 똑똑한... 잠깐! 엘브하임 폐하의 친구분이라고요?”
“못 믿겠으면 이 순수한 정령에게 물어보십시오. 너, 이 녀석. 게으른 최초의 정령보다 예쁜 총배설강을 가졌구나.”
활짝!
내 솔직한 칭찬에 기분 좋아진 정령A가 해맑게 웃었다.
그러자 다른 정령들도 칭찬해달라는 듯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해하진 마라.
용사V의 몸뚱이는 정령들이 온종일 엉겨 붙어서 킁킁거리게 하는 마성의 페로몬이 없다.
그러나 나는 얼추 200년 동안 성추행당하며 녀석들을 다루는 방법을 조금 깨우쳤다.
이 정도는 누워서 경험치 먹기나 다름없다.
“와아... 정령친화력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제 믿습니까?”
“네. 순수한 정령들의 사랑을 받는 분의 말씀은 믿을 수 있죠.”
이제 시작이다.
한심한 F급 용사 지크는 못 하지만, 진정한 용사라면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정령들이 제게 속삭이는군요. 당신이 저에게 친구 이상의 짙은 호감을 품고 있다고.”
“예? 그럴 리가...”
“그러면 순수한 정령이 거짓말했다는 겁니까? 자! 보십시오. 솔직하지 못한 당신의 태도 때문에 정령들이 불편해하지 않습니까?”
“그, 그렇네요.”
“다시 말씀해보십시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다, 당신을 좋아해요. 어멋!”
포옥.
바람의 정령이 답답하게 머뭇거리는 요정의 등을 떠밀었다.
로맨스 소설 표지의 남주인공처럼 실속 없게 생긴 용사V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긴 요정.
“괜찮습니까?”
“아, 네. 괜찮... 아?”
후끈후끈.
불의 정령이 공기를 뜨겁게 달궈서 그녀의 체온을 급상승시켰다.
더위 먹은 그녀는 현기증으로 꼼짝달싹 못 했다.
“열이 좀 있으신 듯한데...”
“이건- 아앗?!”
주르륵...
내게 칭찬받고 싶은 물의 정령들이 키득거리며 가세했다.
녀석들은 요정의 허벅지 사이를 감싼 얄팍한 흰색 천 쪼가리를 촉촉하게 적셨다.
생리현상으로 착각한 그녀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혼자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당연... 윽!”
땅의 정령이 히쭉히쭉 웃었다.
요정의 신발 바닥에 껌처럼 달라붙은 흙들이 발걸음을 떼기 어렵게 방해했다.
그 탓에 그녀는 혼자 힘으로 몇 걸음 못 가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와드릴까요?”
“...네. 부탁드려요.”
용사V가 내미는 단단한 손을 붙잡은 요정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흔들린 마음의 빈틈.
그곳으로 비집고 들어간 마음의 정령이 신나게 날뛰기 시작했다.
페로몬과 호르몬이 그녀의 몸속에서 끊임없이 분비됐다.
“가시죠.”
“자, 잠시만요! 그... 옷을 갈아입을 곳이 필요해요...”
요정 암컷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간절히 부탁했다.
이번에는 본인의 착각이 아닌 진짜였다.
“그 정도야 쉽지요.”
지크가 벌써 도망치지 않았다면 야영지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
“이건 말도 안 돼... 꿈이 틀림없어... 너무 부조리하잖아...”
몰랑계시록 5장 8절.
몰랑을 믿지 않던 어리석은 이단자가 몰랑한 기적을 목도하고 몰랑한 얼굴이 되었더라.
지금, 지크의 표정이 딱 그랬다.
“후배야. 어린 용사야. 두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지 말고 보아라. 진실을 믿어라. 이것이 잔혹한 현실이란 것이다. 모두가 너 같았다면 인류가 번식했을 리 없잖으냐?”
“큭-!”
예비용 속옷을 분명히 챙겨왔다고 주장하던 요정 암컷은 두 다리를 바짝 오므린 채 용사V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나마 입고 있던 천 쪼가리도 잃어버렸다.
정말 칠칠치 못한 아가씨군.
킥킥!
히히히!
순수한 정령들은 우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즐거워하고 있다.
너무나 순수하군.
“야영지 꼴이 참... 지크, 너는 말이다. 대체 200년 동안 뭐 했냐? 어떻게 모험의 기초인 야영지 하나 똑바로 못 만드냐? 뭘 하면서 지냈는지 대답해봐.”
“실비아랑...”
“그 요정공주도 노예시장에서 샀겠지?”
“......”
지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요정 암컷이 그의 숨통을 끊었다.
“당신 같은 쓰레기들 때문에 노예시장이 안 망하고, 수많은 요정이 고통받는 거예요.”
“오해입니다! 저는 그녀들을 구해줄 의도로...!”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다들 당신처럼 대답하죠. 비참한 노예의 삶에서 구출해줬다고.”
“그들과 저는 다릅니다!”
“제 눈에는 똑같아요. 순수한 정령들에게 물어보세요.”
절레절레.
도리도리.
대충 듣고 있던 재판관 전원이 지크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지크의 표정이 빠르게 썩어갔다.
후배가 돌무덤처럼 만들어놓은 야영지를 둘러보던 나는 여기에 마침표를 찍었다.
“너처럼 현실감각 떨어지는 용사는 처음... 여러 번 봤군. 너 외에도 몇 명 더 있다. 그러니 접싯물에 코 박고 자살하긴 아직 이르다.”
“큭!”
“하지만 야영지 하나 똑바로 못 만드는 녀석이 연애는 무슨. 꿈도 희망도 없구먼.”
털썩!
급기야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용사 지크가 머리를 박으며 오열했다.
“선배님. 이 후배가 이렇게 부탁합니다. 연애의 정석을 제게 가르쳐주십시오.”
때맞춰서 디스코와 쑥떡이 우리를 발견하고 합류했다.
눈살을 찌푸린 쑥떡은 요정 암컷을 슬쩍 옆으로 밀어냈다.
“꺅?!”
...슬쩍 맞나?
여성형 쑥떡이 그녀에게서 빼앗은 내 품에 안기며 인사했다.
“아버지... 같은 오빠!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알겠으니 좀 떨어져. 징그럽다.”
“헤헤...”
그때, 지크가 다시금 오열하며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선생님! 연애가 너무 하고 싶어요...!”
그래. 이 연애 박사님이 스파르타식으로 도와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