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23회차] 연애 박사
“당신은 누구신가요?”
예상대로 디스코가 예리한 시선으로 용사V의 정체를 물었다.
여기서 말을 잘해야 한다. 들키면 부정행위로 불이익을 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나가던 전직 용사입니다. 호수에 빠진 현직 용사를 발견하고 구출했습니다.”
“...전직 용사셨군요.”
하지만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는 디스코.
쑥떡이 눈치껏 지원했다.
“디스토리아 님. 이분은 옛날에 제가 안내했던 용사님이세요.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은퇴하지 않으셨으면 분명히 마왕 파르마몬을 쓰러트리셨을 거예요.”
“그렇군요.”
그제야 디스코가 의심을 버리고 지크를 바라봤다.
교배에 목마른 이 어린 늑대를 어찌해야 좋을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시선이다.
뭘 몰라?
철저하게 개종시켜야지.
“용사 지크가 저리 간절히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 디스... 디스...”
“디스토리아입니다.”
“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진짜 위험했다.
무심결에 감찰단 양을 ‘디스코’라고 부를 뻔했기 때문이다.
디스토리아, 디스토리아, 디스토리아, 디스토리아...
이름이 너무 길다.
애칭으로 짧게 부르자고 제안해야겠다.
“디아. 어떻습니까?”
“디아?”
“한 번 지어본 애칭입니다.”
“...저를 애칭으로 불러도 되는 존재는 이 우주에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본인이 싫다고 하니, 앞으로 이 여자는 이름을 아예 부르지 말자.
내가 동행한다는 선언에 지크는 기뻐하고 있었다.
“오오!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배님이면 충분해.”
“네, 선배님!”
내 합류는 완벽했다.
남은 숙제는, 단시간에 지크를 괜찮은 사나이로 개조하는 것이다.
지크의 상태로 봐서는 요행과 노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간신히 쓸만한 수준이 되겠지만, 여기까지 와서 힘들다고 물러설 순 없었다.
우선, 심리검사부터다.
“지크. 너에게 연애를 가르쳐주기에 앞서서 물어볼 사항이 있다.”
“네!”
“첫 번째 질문. 공주나 공녀로 의심되는 화려한 복장의 가녀린 미녀가 오지의 숲속에 홀로 쓰러져 있다. 어떻게 할 거냐?”
“위험에 처한 게 틀림없으니 곧장 달려가서 구해줘야 합니다.”
“틀렸어! 정상적인 공주와 공녀는 수행원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지 않아. 정신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문제가 있는 여자라고 봐야 해. 이런 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정상적인 연애를 할 수 없다. 호구처럼 이용만 당한다.”
“그, 그래도 예쁘면... 흠흠!”
정상적인 판단은 둘째 치고, 사리분별력이 매우 떨어지는 후배다.
나는 쑥떡이 만들어준 SSS등급 야영지를 둘러보면 말했다.
“두 번째 질문. 남자 탈의실에서 알몸의 여자를 발견했다. 비명을 지른 여자가 칼을 뽑고 덤벼든다. 어떻게 할 테냐?”
“예쁩니까?”
“...그래. 최고다.”
“막다른 골목에 몰릴 때까지 도망치면서 그녀의 알몸을 제 대뇌에 3D 입체영상으로 저장합니다. 그리고 밤에 천천히 재생합니다.”
“틀렸어! 남자들의 성지로 침입한 변태 여자를 혼쭐내줘야지! 실수는 자기가 해놓고 발광하는 여자는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야. 사정 볼 것 없이 탈의실에서 쫓아내고, 상종하지 마. 우리가 만나야 할 대상은 정상적인 여성이다.”
“살다 보면 실수도...”
“실수하면 사과부터 해야지.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집히면 안 돼.”
“그래도 예쁘면 용서가... 흠흠!”
중증이로다.
연애하려면 일단 평범한 여자를 만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첫 단추부터 이상하게 꼬이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사고방식이 글렀다.
예쁘면 뭐든 허용하겠다!
...이런 식이니, 음양의 조화와 균형에 따른 밀고 당기는 연애가 될 리 없었다.
“안 예쁘면?”
“당연히 알 바 아니죠. 구해주고 용서해줘서 뭐합니까?”
뒤편에서 가만히 듣는 디스코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무작위로 뽑은 용사를 관찰하기로 했지만, 지크의 사고방식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수습이 필요했다.
“지크.”
“네, 선배님.”
“진지하게 들어라. 나는 맞춤형 교육을 할 목적으로 너에게 2가지 질문을 했던 거다.”
“오오!”
“...그런데 너의 성적은 매우 좋지 못했다. 아! 벌써 낙심할 필요는 없어. 해결책은 있으니까.”
“있습니까?!”
“강해지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강해지면 된다.”
“...예?”
“수풀에 쓰러진 미녀의 과거가 어떠했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설득하고, 남자 탈의실에서 칼부림하는 미친년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면 힘이 필요하다. 압도적인 힘!”
“그, 그건 연애가 아닌 것 같은데요...?”
어쭈?
허접한 지크 주제에 제법 예리한 반박을 했다.
강해지면 뭐든지 쉬워진다.
설득도 쉽고, 정복도 쉽고, 돈벌이도 쉽고, 여행도 쉽고...
당연히 연애도 쉬워진다.
“지크야. 어리석은 지크야.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너는 내 질문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이상론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선배님. 이건 상식 아닌가요? 미녀를 도와주고, 미녀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건...”
“그래서 네가 여태 똑바른 연애를 못 한 거야.”
“아...”
“여자는 외면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척추와 골반이 예쁜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얼굴은 그 다음이다.
그러자 지크가 반론을 펼쳤다.
“선배님은 그래서 내면이 아름다운 분이랑 결혼하셨습니까?”
“당연하지.”
내 마누라의 골반을 만져보면 비겁하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미인이십니까?”
“아까부터 당연한 질문만 하는군. 내면이 아름다운 여자는 외면도 아름다운 법이다.”
“단정하시나요...”
“내가 직접 경험해보고 하는 말이다. 너처럼 남에게 주워들은 이론으로 주절주절 떠들지 않는다. 네가 연애를 알아? 해봤어?”
“큭!”
“지크, 너는 포기할 줄 모르는 타입이야. 그런데 이게 참 재미있어. 약하면 그냥 변태고, 강하면 풍류를 아는 영웅이야.”
“아하!”
“그래서 너는 강해져야 한다. 변태가 아닌 영웅으로 불리기 위해.”
계획은 있다.
내가 연애도 잘 알지만, 빨리 강해지는 방법은 더욱 잘 아니까.
마누라가 사랑하는 판타지아 교육장을 지키기 위해 한껏 공개하기로 하겠다.
“지크, 이 선배만 믿고 따라와라. 그러면 강해질 수 있다.”
폐기물 같은 삶은 청산하고 몰랑한 용사가 되도록 도와주마.
*
지크에게 적합한 던전의 위치는 몰랑폰에서도 알 수 있지만, 빠르게 강해지려면 그만큼 고강도 난이도의 던전을 깨야 한다.
5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면서 내 지식의 상당 부분이 쓸모없게 됐지만, 애초에 시류를 견디지 못하는 던전은 저급해서 갈 곳이 못 된다.
내가 추천하는 던전은...
“흠. 던전 이름이 떠오르지 않지만, 내가 소싯적에 이용했던 던전이다. 함정이 없는 길을 찾기 힘들 만큼 빼곡하고, 주요 적들은 이 아래로 흐르는 순도 높은 용맥에서 흘러나오는 기를 먹으며 강화된 몬스터다. 대충 10배 강하다고 보면 된다.”
“...몰랑폰에 누군가 던전 정보를 올려놨네요.”
“뭐라고 하던?”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할 난공불락의 던전이라네요. 자기가 회귀 5번 해보고 내린 결론이래요.”
“멍청한 놈이군.”
던전은 용사의 무덤이 아니다. 경험치와 아이템을 무상으로 지원받는 멋진 곳이다.
“들어갑니까?”
“당연하지.”
남대륙 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이 던전의 난이도는 최상급.
하지만 초등교육장에 맞춰서 하향되어 있기에 지금까지 실력을 감춰온 지크에게 적합하다.
“겁먹을 거 없어. 예전에 내가 아침마다 준비운동 대용으로 들락날락했던 던전이다. 심지어 너는 혼자가 아니야. 쑥떡도 있다.”
“저는 왜 빼는 거죠?”
“저도요.”
디스코와 요정 암컷이 항의했다.
“사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당신들이 지크 대신 앞장서서 던전을 뚫을 겁니까?”
“......”
“......”
“아니면 지크 용사님의 의견을 존중해주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나쁜 동료가 숟가락만 얹어놓고 자기주장을 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아주 잘 알지!
던전은 내가 깨고, 동료들은 민폐만 끼쳤음에도 큰소리 친다.
라누벨은 고의로 던전의 함정을 밟아댔지만, 다른 동료들은 그냥 도움이 안 됐다.
전투 도중에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내기할까?’라는 도박 문화를 조장하는 녀석들은 정말 손모가지를 잘라주고 싶다.
이 던전을 깨면 지크는 분명히 괜찮은 사나이에 한걸음 다가가게 될 것이다.
“갑니다...!”
복잡한 개미굴처럼 생긴 지하세계로 용사 지크가 돌격했다.
우리는 방해가 안 되도록 몇 박자 늦게 후발대로 출발했다. 그리고 느긋하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말랑말랑!
말랑!
말라앙!
가장 먼저 말랑말랑한 슬라임들이 지크에게 덤벼왔다.
하지만 몰랑하지 않은 슬라임은 195년 동안 똥만 싸진 않았던 지크의 상대가 못 됐다.
몰랑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텐데...
다음 상대는 고블린이었다.
“Gooob-!”
“Gob! Gob!”
“Goob!”
여기까지도 지크는 그럭저럭 손쉽게 넘어왔다.
고블린은 원래 약한 종족이라서 얍삽한 전술을 자주 쓴다. 그런데 여기 고블린들은 용맥의 영향으로 강해지는 바람에 자신들의 장기를 버리고 전면전을 선택했다.
“이 정도쯤이야!”
덕분에 용사 지크의 자신감도 쭉쭉 상승했다.
그러나,
“BuBu!”
“QuQu...!”
“TuTu!”
강화된 오크에서부터 살짝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종족: 드래고닉 오크
▷레벨: 912
▷직업: 투사(위기→투기↑)
▷스킬: 광기SSS 연계SS 투기SS 패기SS 맷집S…
▷상태: 연계, 용맥
오크답지 않게 높은 능력치를 보유하긴 했지만, 중학생 능력치로 초등교육장에서 노는 지크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크를 힘들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다.
용맥(龍脈).
드래곤 베인(Dragon Vein).
동양과 서양, 판타지를 막론하고 용을 참 좋아하는데, 지구에서는 단순히 ‘땅의 기운’이란 것이 뭉친 곳을 용맥이라고 하는 반면, 판타지 세계에서는 정말로 용이랑 연관된 장소를 뜻한다.
용이 살해된 장소.
그 용의 피에 맺힌 원한이 대지를 타락시키고, 그곳에 사는 몬스터와 동식물을 미치게 한다.
그리고 용뼈로 만든다.
“허억! 허억! 혼자서 더는 무리입니다.”
“주위에 널린 함정을 이용해.”
“선배님. 함정 탓에 싸우기 더 어려운데 이용하라니요.”
“함정을 동료라고 생각해라. 저것들은 너의 뒤통수를 치지 않아. 모두에게 공평하지.”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탓에 살기 위해 터득한 기교다.
“그게 무슨...?”
“아둔한 후배 때문에 이 선배가 고생하게 생겼군. 눈 크게 뜨고 똑똑히 잘 봐둬라.”
“예? 예.”
용사V의 전반적인 능력치는 내 1회차 때보다 쓰레기다. 신력도 당연히 쓸 수 없다.
반면에 던전 ‘오염된 용맥D’는 4차에서 5차 교육과정으로 넘어오며 더욱 강화됐다.
하지만 내 발걸음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용사라는 것이다.”
내 의지가 용사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더 필요한가?
차고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