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23회차] 이것이 용사다
“Owuuuu...!”
“Troooo-!”
오우거와 트롤이 간간이 나오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지크는 멈췄다.
하지만 나는 과감하게 용사V를 움직여서 그 무리로 뛰어들었다.
자살할 의도는 당연히 아니다. 저들이 나를 붙잡기 전에 먼저 돌파하고 주위를 살폈다.
천장이 낮고 어둡다.
생각할 수 있는 함정의 종류만 수십 가지에 달했다.
갑자기 강렬한 빛을 쏘아서 눈을 멀게 할 수도 있고, 머리 위쪽의 사각지대에서 독화살을 쏠 수도 있다.
아니면 둘 다이거나.
혹은, 천장이 내려앉으면서 침입자를 압사시키는 방법도 있고, 허리를 숙이도록 유도한 후에 도끼로 척추를 찍는 수법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목이 있을 법한 위치에 가느다라면서도 날카로운 실을 배치하는 것이다.
무심코 달리면 그대로 댕강!
또...
“네가 좀 확인해봐라.”
“CuCu~?!”
나는 지나가던 오크A의 목을 붙잡은 후, 함정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방향을 향해 던졌다.
서걱서걱-
곧장 정육점 돼지고기처럼 썰려버리는 오크A.
수평으로 긁는 칼날이 3개고, 수직으로 시차를 이용해서 4개가 연달아 떨어지는 구조였다.
어떤 함정인지 봤으니, 다음은 간단하다.
“가볼까.”
오크A를 썰어버린 칼날 함정을 향해 달렸다.
제작자가 부지런하다면 칼날이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사소한 변수는 용사님의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 된다.
“Trooo...?
“Gooob!”
몬스터들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뒤에서 떠미는 다른 몬스터 때문에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 함께...
서걱서걱!
썰리기 시작했다.
오우거 같은 강한 몬스터는 함정을 부수기도 했지만, 고블린과 오크 같은 일반적인 몬스터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부터가 내 시간이다.
푹, 푹, 톡, 톡.
함정 속으로 들어온 몬스터들에게 가벼운 잽을 날리면서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시스템의 경험치 분배는 마무리 일격이 가장 크지만, 공적에 따라 나눠진다.
그리고 나눌 사람이 없으면 공적이 가장 높은 사람에게 몰린다.
지금의 나처럼.
“PuPu-?!”
내가 어깨로 툭 밀친 오크는 신경질적으로 목을 돌렸는데, 바로 1초 뒤에 머리가 잘렸다.
“Wummeee~?!”
정강이를 힘껏 걷어찬 미노타우로스는 고개를 숙였다가 뒤통수에 찍히는 도끼를 보지 못했다.
“Gooob...?”
“비켜.”
“Goob-!”
내게 안전지대를 빼앗긴 고블린은 서둘러 되돌아오는 도중에 허리가 잘리며 죽었다.
또...
도발E→도발C
만용F→만용B
탐색B→탐색A
...
스킬은 안 보는 편이 나았다.
숙련도와 등급이 실시간으로 갱신되며 빠르게 쌓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1년쯤 구르면 대부분 스킬이 SS등급 이상이 된다.
1회차 때, 내가 MAX등급 위의 존재를 알았다면 좀 더 효율적인 성장을 해서...
어차피 회귀하며 싹 증발했을 테니 논하는 게 무의미하려나?
“Owuu...”
“Troo...”
죽기 싫었던 몬스터들이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이리 온.”
조금만 더 추억에 잠길 수 있도록 협조해주지 않으련?
엿 같은 추억 말이다.
*
나의 동료인 함정들의 희생으로 던전 내의 절반 이상의 몬스터를 청소할 수 있었다.
전멸시킬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용사를 질시한 몬스터들이 안 좋은 소문을 퍼트려서 힘들어졌다.
녀석들은 나만 보면 무작정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허어! 이 용사님이 뭘 어쨌다고?
참으로 억울했다.
“지크야.”
“...네?”
“너에게 보여주려고 천천히, 너무 어둡지 않은 함정만 골라가면서 진행했다. 따라 할 수 있겠지?”
“아, 아뇨.”
“이쯤은 해줘야 어디 가서 용사라고 소개할 수 있지. 하하! 긴장하지 마. 해보면 쉽다구? 실력도 실수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 손가락 잘리는 정도는 성녀가 아닌 쑥떡도 붙일 수 있어. 모가지랑 허리를 조심하고, 꼬챙이나 가루가 눈에 안 들어가도록 조심해. 아! 2세가 필요하면 사타구니도 조심해라. 거긴 성녀도 부활시키기 애먹는 부위야.”
“......”
“허어! 아직도 표정이 안 좋네. 너는 용사야. 손가락 10번만 잘려보면 50번 잘린 숙련도가 쌓여. 그렇게 되면 몸이 질겨져서 대부분 함정을 무시할 수 있게 돼. 지크. 너도 나처럼 용사야. 할 수 있어.”
“이, 이건 제가 상상하던 용사가 아닌데요...”
지크는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한숨을 쉰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트롤 창자를 주웠다.
운이 좋군.
트롤은 시체가 자연으로 회귀하면서 피와 심장을 자주 남긴다. 힘줄, 가죽, 뼈는 드물다.
그리고 창자는 뇌와 함께 가장 안 나오기로 유명하다.
“자, 받아.”
“...주시는 건가요? 트롤 힘줄이 고급 활줄의 재료인 건 아는데, 창자는 어디에 쓰는지...”
“구명조끼로 쓰여. 바람을 넣어서 몸에 두르는 거야.”
“아하!”
“던전에서는 장화로 써.”
“...예?”
“옷이 소모품인 건 알지? 몰라도 아는 척해. 신발과 바지의 상태가 영 좋지 않으면 과감히 버리고 트롤 창자를 다리에 끼우는 거야. 이게 탄력성이 좋아서 웬만한 가죽옷보다 훨씬 좋아.”
“저는 좀...”
지크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
한숨을 쉰 나는 몬스터들이 남긴 부산물 중에 괜찮은 게 있는지 눈대중으로 슥 훑었다.
오! 다행히 있군.
“지크. 이건 어때?”
“신기하네요. 어떤 몬스터의 뼈인지 모르겠어요. 마치, 인간의 두개골처럼 생겼어요.”
“인간의 뼈가 맞아?”
“여기에 왜...?”
“이름을 붙이자면, 대형 몬스터에게 먹힌 모험가의 두개골.”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지크는 모험가의 두개골을 바닥에 내려놓고 기도하듯 합장했다.
나는 그걸 주워서 지크의 손에 다시 쥐여주며 말했다.
“어때?”
“어떠냐고 물으시면... 불편한데요. 고인을 모독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해지지 않아?”
“예?”
“나는 절대 이렇게 되지 말자는 각오가 생기면서 들끓던 피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 텐데.”
“그건 소름 아닌가요...?”
“생각하기 나름이지.”
“......”
내가 지크에게 열심히 강의하는 동안, 부지런히 몬스터 부산물을 수확한 쑥떡이 도착했다.
녀석이 말했다.
“굉장해요. 지크 님이 여태까지 모은 전리품보다 23배나 많아요. 보편적인 시세로 가치를 환산하면 439배의 수익이에요.”
“그래? 성검 없는 동안 쓸 무기를 임대할 비용은 나오겠군. 아이템 수거하느라 수고했다, 쑥떡.”
“헤헤...”
“하지만 벌써 계산하기에는 일러. 던전의 보스가 남았으니까. 보스를 처리할 영광은 지크에게 넘기지. 잘 해봐. 현직 용사님.”
내가 전부 처리하면 주객전도가 되버린다.
마지막 보스는 용사 지크가 처리해야 체면도 서고 모양새가 나온다.
그래야 디스코가...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그 상처. 당신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였군요. 평범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제 눈은 속일 수 없어요.”
“옛날에 죽은 몸이지.”
나는 부정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둔 설정으로 간단히 무마했다.
함정을 피하다가 조금 세게 긁힌 모양이다.
자잘한 상처는 금방 회복돼서 기계 몸이 노출되지 않는데, 아주 잠깐 드러난 걸 놓치지 않고 본 모양이다.
아무리 신이라지만, 관찰력이 매우 뛰어난걸?
아! 아니군.
디스코는 몰랑소프트 직원이다.
그곳은 우주 굴지의 안드로이드 제작사. 안드로이드 전문가들로 바글바글한 게 당연하다.
“정말 놀랍군요. 싸구려 구동계와 스켈레톤으로 그만한 움직임을 보여주다니. 감탄했습니다.”
“비아냥은 적당히 하십시오.”
“칭찬인데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실력은 좋지만, 성격이 나쁜 인공인격이로군요.”
디스코가 투덜댔다.
정체를 들킨 것 같진 않았다.
용사V를 바라보는 그녀의 강렬한 시선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내 기분 탓일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지크. 들었다시피 나는 로봇이라서 강해지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너는 달라. 내 가르침만 완벽하게 소화하면 무한한 가능성이 열릴 거다. 연애는 말할 것도 없고.”
“선배님...”
“가라! 가서 던전의 보스에게 용사의 각오를 보여줘라.”
“넵!”
“...그런데 바로 안 가고 뭐 하냐?”
“보스 공략이 있는지 몰랑폰을 검색해보는 중입니다.”
“그렇구나.”
이러면 너무 쉬울 것 같지만, 언젠가 공략 없는 보스를 상대할 날이 지크에게 올 것이다.
푹찍-!
그날이 오려면 먼 것 같았다.
토벌한 인증사진도 없는 엉터리 공략집을 읽고 보스에게 도전한 용사 지크.
신의 경지에 오른 스킬 ‘정력’의 효과 덕분에 쓰러지진 않았다.
하지만 용의 손바닥 밑에 깔리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Boooon!”
뼈로 이루어진 용의 단단한 손이 지크를 놔주지 않았다.
▷종족: 본 드래곤
▷레벨: 999+
▷직업: 사왕(무덤→망자↑)
▷스킬: 망령Z 용골Z 강골MAX 저주MAX 사술MAX…
▷상태: 망자, 격분, 공허
스킬 등급은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 용이 약한 건 절대 아니다.
4차 교육과정 초등교육장에서 초월영역 스킬을 2개나 보유한 존재는 마왕뿐이었으니까.
저 뼈다귀 용도 원래는 더 강해야 하는데, 쏘시엘이 전반적으로 하향해서 수준을 초심자에 맞춘 것이다.
그래도 초월영역만 2개.
4차 교육과정 때보다 10배쯤 강해진 건 틀림없다.
“아주 팽팽한 접전이군.”
“저게 어딜 봐서요?!”
디스코가 내 전황 분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거의 하루 동안 보스와 용사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있으니, 팽팽하다고 볼 수 있지요.”
“스킬 덕분에 안 죽는 것뿐이죠!”
“그러다가 이기는 겁니다.”
만화와 소설 등에서 굉장히 흔하게 나오는 전개다.
주인공이 질 것처럼 얻어맞으며 독자들을 조마조마하게 하다가 통쾌하게 역전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그걸 기대하긴 힘들지만, 지크는 가능할 것 같다.
왜냐하면,
▷종류: 스킬
▷명칭: 정력
▷등급: ZZZ
▶G: ?
▶ZZZ: 여성 앞에서 멋진 척한다.
▶ZZ: 여성 앞에서 동정인 척한다.
▶Z: 여성 앞에서 강한 척한다.
▷SSS: 절대 끊기지 않는다.
▷SS: 절대 지치지 않는다.
▷S: 절대 마르지 않는다.
▷A: 남성의 질투를 부추긴다.
▷B: 여성의 미각을 자극한다.
▷C: 여성의 촉각을 자극한다.
▷D: 여성의 후각을 자극한다.
▷E: 여성의 시각을 자극한다.
▷F: 남성의 정력이 강화된다.
초월영역부터는 여성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강화된다.
단순한 시늉이 아니다.
실제로 지크는 몇 시간째 안 쓰러지고 ‘강한 척’하고 있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졌지만, 죽지 않고 오뚜기처럼 계속 일어났다.
저건 멋진 척인가?
뼈다귀 용이 전투력이 높았다면 달랐겠지만, 지크를 마무리할 힘은 없어서 지금 같은 상황에 빠졌다.
그래도 언젠가 끝날 것이다.
맷집B→맷집SS
근력S→근력SSS
재생D→재생A
...
용사의 경험치 500% 직업특성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뇌가 없는 멍청한 용이라서 다행이다. 있었다면 이상함을 느끼고 우리들을 먼저 공격했을 테니까.
하지만 놈은 죽지 않는 지크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우리는 안중에 없었다.
그 덕분에 ‘여성 앞’인 지크가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쑥떡아. 지크가 이길 때까지 여기서 야영하며 기다리자.”
“네, 아버지... 같은 오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나는 지크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던 모양이다.
금방 성장해서 뼈다귀 용을 쓰러트릴 줄 알았던 지크는 무려 20일의 혈투 끝에 눈물겨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수고했다. 나는 후배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
“선배님! 이제 저도 연애할 수 있는 겁니까?!”
조금은 사내답게 변한 지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질문했다.
뇌까지 정력으로 가득 찼나?
진짜 어이가 없다.
“보스가 골다공증으로 자멸하지 않았으면 절대 못 이겼어.”
“......”
“너는 지크야. 명심해. 과소평가해도 부족한 지크. 여자 손만 잡아도 강해지는 주인공이 아니야.”
“선배님! 평가가 너무 야박한 거 아닙니까!? 저를 완전히 갓난아기 취급하시네요!”
“세상의 모든 갓난아기에게 당장 사과해. 어떻게 20일 동안... 음? 갓난아기?”
“또 왜요?”
“...아니. 사소한 무언가를 깜빡한 것 같아서.”
언젠가 기억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