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24회차] 마왕 파르마몬
RPG 게임에서 캐릭터가 999레벨을 찍으면, 플레이어들은 1레벨 지역의 조잡한 함정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함정에 당해도 피해가 미미하니까.
그것들을 회피할 시간과 노력이 아깝기에 맨몸으로 맞으면서 돌파해버린다.
그편이 어딘가 멋지기도 하고.
“이건 좀 아니지...”
얼추 10년 동안 인내해온 내 정신력에 균열이 생겼다.
이러려고 10년 동안 참아온 게 아닌데.
“서, 선배... 사, 살려... 꼬르륵...”
온몸에 화살이 꽂힌 지크가 팔을 뻗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 죽음이 너무 어이없다는 걸 아는 듯했다.
“뀨뀨...”
꼬리가 4개까지 성장한 무지개 여우가 구슬프게 울었다.
마왕의 탑: 1층
지크가 당한 층이다.
강력한 적에게 당하고 위층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몰랑폰에 뿌려진 공략집에서 아예 언급조차 안 된 1층이었기에 방심한 지크.
그는 사방에서 쏘아지는 화살 공격을 무시했다.
날아오는 화살이 빠르거나 독이 묻어있던 건 아니었다.
정말로 딱 1층 수준.
그랬기에 지크는 맨몸으로 화살을 전부 맞아주는 패기를 부렸다.
이게 그 결과.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중간부터 경고도 없이 화살들에 ‘능력치 무시’ 효과가 추가됐다.
그리고 지크는 이 사실을 모른 채 맨몸으로 다 맞아줬다.
“뭐라 할 말이 없군요...”
감찰단 대표인 디스코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나와 함께 10년 동안 인내해오면서 오늘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지크는...
“부활은?”
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성녀E에게 질문했다.
지크의 괄약근 회복을 위해 가장 노력했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 화살들에는 탑에 입장할 자격이 안 되는 자들을 걸러내는 필사(必死)의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용사님이 거기에 걸릴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미친.”
용사 지크가 죽고 10초가 덧없이 흘렀다.
그를 부활시켜서 모험을 재개할 유예시간이 지났다는 의미.
▷용사님. 모험은 즐거우셨나요?
▷진정한 용사의 길은 실로 험난합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당신을 응원해준 수많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배우며 함께 성장한 당신은 아쉽게도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했어요. 진심으로 유감을 표합니다.
▷지금부터 성적을 알아볼까요?
나도 궁금하던 참이다.
지크의 이번 성적표가 어떻게 나왔을지 말이다.
▷성적표를 꼼꼼히 확인해주세요!
▷이름: 지크
▷전투력: MAX
▷업적: B+
▷평판: C
▷인성: D-
▷기록: 1층
전투력만은 중등교육과정에 들어가야 할 수준이라고 했으니, MAX등급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나머지는 그럭저럭 평균.
이런 불균형이 내 초창기 성적표랑 비슷해서 대단히 불편했다.
▷불합격했습니다.
▷사유: 마왕이랑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입니다. 방심과 실수도 실력임을 명심하세요.
이젠 ‘재시험을 시작합니다.’라는 메시지가 뜨면서 회귀한다.
하지만 파르마엘에서 쏘시엘로 교장이 바뀌면서 이러한 방침에도 변화가 생겼다.
▷학업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설명: 포기하면 고향별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여기서 쌓은 모든 능력과 인연을 상실하게 됩니다. 자퇴 이후의 복학은 매우 어려우니 신중하게 선택해주세요.
학생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내 1회차 때, 이런 놀라운 기회가 주어졌다면 망설임 없이 학업을 포기했을 것이다.
이건 허풍이 아니다.
이때 나는 이미 위대한 존재 ‘마스터 몰랑’에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판타지 능력치를 잃어도 아쉬울 게 없었다.
하지만 지크는 그러지 못했다.
포기하지 못했다.
▷교직원 일동이 당신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전문교사가 파견됩니다.
▷보건 교사가 파견됩니다.
쿠구구구...
용사가 죽으면서 필요 없어진 교실은 허무하게 붕괴했다.
*
나중에 기록을 살펴보니, 지크 말고도 1층에서 죽은 머저리 용사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몰랑폰에 ‘능력치 무시’를 공개하지 않았다.
너무나 수치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도 나처럼 당해봐라.’ 같은 시커먼 심보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내 정신도 용사V에서 귀환했다.
입에서 한탄부터 나왔다.
“10년의 노력이 아주 허무하게 증발했군...”
이곳은 마왕의 탑 100층.
나는 옥좌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혼자는 아니었다.
“쉿! 곧 디스토리아가 올 거야.”
당연하다는 듯이 내 무릎 위에 앉아서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비겁한 마누라가 말했다.
그녀는 내가 용사V로 활동하는 사실을 아는 듯했다.
누가 더 알지?
“......”
쏘시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척추를 만져온 세월이 몇 년이던가? 이젠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다.
그녀만 안다는 뜻이다.
번쩍!
정면의 공터에 빛의 알갱이가 뭉치더니 디스코가 출현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함께 관전하고 계셨다면 이미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좋은 평가를 내리기 어렵군요.”
“학생 운이 안 좋았네요.”
판타지아 교육장의 교장 쏘시엘이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그렇다. 운이 안 좋았다.
하필이면 지크라니?
그러나 이런 내부사정을 일일이 이해해줄 만큼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디스코가 냉철하게 말했다.
“저는 무작위로 골랐고, 여기에서 도출된 사실 결과로 점수를 매길 수밖에 없습니다.”
“압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어요? 바로 다음 학생을 보실 건가요? 아니면 좀 쉬었다가?”
“한 가지 질문만 하고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요.”
“질문하세요.”
디스코가 오른손을 가볍게 휘젓자마자 시스템을 무시하고 어떤 홀로그램이 출현했다.
거기에는 한 인물의 사진이 여러 차례 찍혀 있었다.
내가 조종했던 용사V.
설마, 들킨 건가?
“지크 학생보다 압도적으로 유능했던 고대의 용사. 그 안드로이드에게 흥미가 있습니다. 몰랑소프트의 주력상품이 안드로이드니까요.”
“계속 말씀하세요.”
나는 얌전히 입 다물고 둘의 대화를 경청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말실수로 정체를 들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 듯하지만, 그는 완벽합니다. 기계 몸에 주어진 능력의 한계를 기교로 초월하고 판단력도 뛰어납니다. 흠. 말로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렵군요. 여자의 직감이랄까요? 그의 정신을 복사한 안드로이드를 대량생산하면 불티나게 팔릴 것 같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방금까지 여유로움을 가장하던 쏘시엘이 처음으로 동요했다.
몰랑했던 비겁한 엉덩이가 긴장으로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디스코가 추가로 말했다.
“그의 진짜 얼굴이 궁금하군요. 그만한 존재라면 양산형 꽃미남처럼 생긴 희멀건 얼굴은 절대 아닐 텐데.”
“무, 무척 잘생겼죠.”
나는 식은땀을 흘리는 마누라의 골반을 부드럽게 마사지해줬다.
야! 마누라! 정신 차려! 여기서 들키면 진짜 큰일 난다구!
“쏘시엘 교장님. 감찰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그를 매입하고 싶습니다. 가격은 섭섭하지 않게...”
“안 돼~~~!”
“......”
“소,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그는 학생들의 교보재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요.”
“과연... 이해했습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옛날에 쏘시아가 비겁한 가슴으로 성검을 튕겨냈을 때도 이처럼 놀라진 않았었다.
마누라야. 긴장 풀어.
내 새끼손가락조차 안 들어갈 정도로 엉덩이가 완전히 돌덩이다.
“디스코 양. 질문 끝났으면 다음 학생으로 넘어가는 게 어때?”
보다 못한 내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디스코는 여전히 내가 아닌 마누라만 빤히 쳐다봤다.
“바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그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군요. 쏘시엘 교장님. 가능할까요?”
“...하루만 시간을 주시면.”
“좋습니다. 쉴 장소를 마련해주시겠어요?”
“페이커-리. 부탁합니다.”
쏘시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베이커리가 출현했다.
이젠 베이커리 교감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가 내게 눈인사하고는 디스코에게 말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디스토리아 팀장님. 판타지아 세계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기대되는군요.”
뿅! 뿅!
베이커리와 디스코가 빛과 함께 사라졌다.
1초, 2초, 3초.
“푸하-!”
쏘시엘이 참았던 숨을 토하며 내 가슴에 등을 기댔다.
“괜찮냐?”
“전혀! 전혀 안 괜찮아! 남편을 팔라고 말하는 여자 탓에 머리가 한순간에 백지가 돼버렸어!”
“내 매력이 우주에서도 통하는 모양이군.”
나란 남자는...
쏘시엘. 복 받은 줄 알아라.
“으으... 불공평해. 내 친구들은 남편에게 여왕님처럼 떠받들어지며 편하게 살고 있는데.”
“얼씨구?”
가정의 평화를 위해 10년 동안 지크를 상대해온 남편님 앞에서 이 무슨 망언이란 말인가?
정령아. 한마디 해줘라.
“조카야! 너무너무 못됐다!”
“아, 아니. 이모. 저도 가끔은 투정을 부릴 수...”
“추하다!”
“...네. 죄송해요, 남편님.”
하지만 여전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쏘시엘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는 마누라의 엉덩이가 몰랑해진 걸 확인한 후에 말했다.
“어쩌려고 그런 약속을 한 거야?”
“용사V의 외모?”
“그래.”
“솔직하게 보여주면 돼. 이왕 이렇게 된 거, 생활기록부를 토대로 복사한 남편님을 교보재로 넣자.”
“내가 다른 여자랑 마음껏 연애해도 괜찮다고 해석해도 되지?”
“아니.”
“맞잖아?”
“믿기 힘들지만, 남편님은 10년 동안 여자랑 한 번도 안 잤어. 골반은커녕 척추조차 안 만졌지. 빙룡왕을 길들일 때 빼고.”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나는 공과 사가 확실한 용사다. 안 들키려고 노력한 부분도 있고.
쏘시엘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아.”
“너무 믿는데...”
“용사V의 외모는 판타지아에서 환생하기 이전을 쓸 거야. 이름도 그대로 강한수.”
“그러면 나는?”
“마왕 파르마몬.”
“......”
부모님이 주신 멋진 이름을 마누라가 함부로 바꾸...
“파르마몬. 판타지아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의 이름이지.”
“크흠! 그렇다면야...”
강한수 때도 잘생기긴 했지만, 판타지아 세계에서 가장 귀여운 황제였던 후생만은 못했다.
마왕 파르마몬.
앞으로는 이걸로 쭉 밀자... 음?
“나, 남편?!”
“......”
우득, 우드득.
정말 갑작스럽게 내 피부에 도자기처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균열은 멈추지 않고 영혼까지 이어졌다.
급기야 신격까지.
【암흑】
【척추】
【인간】
디스코가 툭 던지듯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 듯하지만, 그는 완벽합니다.’
그랬다.
나는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완벽함을 상징하는 ‘신의 힘’을 감췄음에도 그녀가 완벽하다고 말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디스코는 신(神)이다.
완벽하다는 표현을 함부로 쓸 위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용사V를 향해 완벽하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어째서였을까?
“...이름.”
지금까지 내게 ‘강한수’란 이름은 매우 중요했다.
고향별 지구와 나를 이어주고, 내가 ‘인간의 자식’임을 증명해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용사V로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지구인 강한수’란 이름을 쓰지 않았다.
감춰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이름만을 시사하는 게 아니다.
행동, 언어, 판단, 사상...
나는 철저하게 판타지아 원주민처럼 움직였다. 이건 연기할 필요도 없이 숨 쉬듯 간단한 일이었다.
지구: 18년.
판타지아: 211년.
살아온 세월이 다르다.
상식적으로, 이젠 지구인처럼 행동하기가 더 어색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이 당연한 어색함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라고.
어울리지 않는 지구인 행세를 억지로 해온 것이었다.
...우습군.
“하, 하하, 하하하...!”
“남편...”
“진짜 미치도록 웃기잖아! 완벽한 MAX급 용사는 개뿔!”
아니었다.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걸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칭!
지크나 다른 용사들처럼 이름을 판타지 식으로 바꾸는 거랑 다르다. 이건 내가 여태까지 쌓아온 업에서 비롯된 호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렵다.
하지만 나는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나의 격에 어울리는 지고한 월계관을 쓰겠다.
내 이름을 말하리라.
“파르마몬.”
나는 모든 마(魔)를 정복한 FFF급 용사였던 신(神)이다.
“...저기, 남편?”
“왜?”
“아까부터 혼자서 뭐라고 구시렁거리는 거야?”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이다.
아까부터 남편님의 무릎 위에 앉아서 뭘 하는 건데?
아무튼,
“엉큼한 마누라. 내가 굉장한 선물을 줄게.”
“선물? 뭔데?”
“보면 알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