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24회차] 최초의 죄인
지금으로부터 대충 10년 전, 페스티벌 차원에서 디스코가 내 신격을 처음 보았을 때, 이런 말을 했었다.
잡다하다고.
당시에는 여러 신격을 보유한 나를 질투해서 한 발언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격이 다양하다는 것은 ‘나는 완벽하지 않아요.’라고 자백하는 꼴인 탓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문제를 A만으로 해결하지 못해서 B와 C를 대동했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 시점에 A라는 수단은 완벽하지 못하다는 뜻이 된다.
신은 완벽해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완벽하지 않다고 인정한다니?
신격을 떨어트리는 행위다.
자신을 부정하는 짓이다.
【척추】
【척수】
“잘 가라.”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과 지구의 과학지식을 결합한 신격이었다.
목디스크가 자주 발생하는 경추(頸椎) 6번과 7번 사이.
그리고 허리디스크의 단골인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
이곳을 공략하는 전략은 매우 유용했고,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이 날개를 달아줬다.
그러나 이젠 내려놓으리라.
【인간】
“너도.”
이것은 내가 판타지아 세계에서 습득한 순수한 힘이다.
인간의 종족특성을 극대화해서 탄생한 신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애초에 ‘인간의 종족특성’이란 설정은 판타지아 시스템에서 파생된 능력치일 뿐이다.
능력치가 없는 보통의 인간들은 가능성이 무한하지 않다.
즉, 신격 ‘인간’은 내가 자기최면으로 만들어낸 허구의 힘이다.
그렇다면 뭐가 남는가?
“나.”
강한수란 용사만 남는다.
그는 마왕 페도나르의 사위가 되고 가업을 전부 물려받았다.
【암흑】
그 힘은 미약하지 않다.
쏘시엘에게 넘긴 신격 ‘백광’이랑 합쳐지면 시공간을 지배하면서 평행세계도 창조할 수 있으니까.
나는 간과했다.
장인어른의 ‘인간적인 모습’과 ‘유감스러운 과거’ 탓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를 잊었다.
마왕 페도나르.
손짓만으로 태양계를 공간째 뭉개버릴 수 있는 신(神)이다.
“사춘기가 심하게 와서 대들긴 했지만, 나도 아빠가 가출용사에게 정말로 패배할 줄은 몰랐어.”
“그게 사춘기...?”
부부싸움 한 번이면 소우주가 멸망하겠군!
“그래서 남편. 아까운 신격을 어디까지 버릴 셈이야?”
“내가 완벽해질 때까지.”
이것은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퍼즐 게임이다.
그림이 완벽해질 때까지 조각을 바꾸면서 맞춰보는 작업. 하지만 한 번 버린 조각은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에 신중해야 한다.
“불안한데...”
“...무언가 부족해.”
“저기, 남편? 시작부터 불길한 복선을 깔지 말아줘. 오늘은 디스토리아 때문에 나도 힘들단 말이야.”
“그림에 맞출 퍼즐이 없어.”
“벌써 망했다고?!”
“그건 아니야. 그러니 진정해. 내가 골반을 쓰다듬어줄 테니까.”
“그런다고 진정될 리... 으응... 마법 같아...”
나는 비겁한 마누라의 부드러운 피부 감촉과 온기를 느끼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무엇을 또 놓쳤는가?
...찾았다.
“쏘시엘. 어째서 최초의 천사 파르마엘이 네 고모가 된 거지?”
“아빠가 처음부터 그렇게 부르라고 했으니까.”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
“어... 아니.”
나만 멍청한 건 아니었군.
지금까지 호칭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는데, 이번 변화를 통해서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름은 중요하다.
장인어른이 딸에게 ‘이 신(神)이 네 고모란다.’라고 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고모(姑母).
부친의 누이.
혈연관계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마왕’과 ‘최초의 천사’는 친남매인가?
그건 아니다. 둘 다 자연에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잠깐! 자연이라고...? 아!”
페도나르와 파르마엘은 ‘같은 부모’를 두고 있었다.
자연.
너무나 초현실적인 개념이라서 무의식적으로 부정해온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라면...
“히히히!”
최초의 정령을 빼놓을 수 없다.
“네 도움이 필요해.”
“야만용사가 고귀한 정령에게 도움을 요청할 날이 올 줄 알았다!”
“얼른 말해.”
“페도나르와 파르마엘은 자연과 대우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자연과 소우주의 아이. 먼저 눈이 맞은 첩의 자식인 셈이지. 히히!”
“그런데 이모라고?”
“이모 맞다! 쏘시엘의 친모 판타지아는 소우주와 행성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정령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정리하자.”
우주의 법칙이 부계사회인지 모계사회인지를 떠나서, 셋의 공통된 부모는 ‘자연’이다.
이 족보를 요약하면,
첫째: 최초의 정령
둘째: 최초의 천사
셋째: 최초의 악마
자연이 이들 사이에 다른 자식을 더 낳았을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 계산할 필요는 없으니 무시하자.
자연은 1남 2녀를 낳았고, 이 자연계 남매의 힘은 온전히 내게 집중된 상태다.
“...쏘시엘. 나를 믿냐?”
“조금?”
“그거면 충분해.”
나는 비겁한 마누라에게 줬던 신격까지 해체해서 조각으로 바꿨다.
첫째: 【자연】
둘째: 【백광】=【시간】+【자연】
셋째: 【암흑】=【공간】+【자연】
아주 깔끔하게 분리됐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특징은 당연히 ‘자연’이다.
이것을 통해서, 셋에게 ‘최초’라는 칭호를 심은 주체가 자연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뭘 어쩌려고?”
“...쏘시엘.”
“왜?”
“사랑한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
나는 11번째 손가락에 끼워둔 행운의 반지를 과감히 뺐다.
그리고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하, 하지 마! 아읏?!”
“마누라. 우주에서 가장 예쁜 딸로 부탁할게.”
“미쳤어?! 다른 아이들이 죽어!”
“아니. 이젠 아니야.”
내가 모든 저주를 끌어안고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자연에 종속되는 한이 있더라도.
첫째: -
둘째:【시간】
셋째:【공간】
넷째:【자연】+【자연】+【자연】
첫째인 최초의 정령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자연의 힘’을 착취당하고 약해진 상태였다.
둘째인 최초의 천사는 정의로운 MAX급 용사님에게 토벌되어 ‘자연의 힘’을 빼앗겼다.
셋째인 최초의 악마는 딸이 너무나 사랑하는 MAX급 사위에게 ‘자연의 힘’을 물려줬다.
나 혼자서 전부 품진 못한다.
그래서 개편했다.
아내: 【창세】=【시간】+【공간】
남편:【자연】+【자연】+【자연】
비겁한 부부가 다 먹는 구조로!
나는 판타지아 시스템을 하나의 신격으로 분리해냈다.
【창세(創世)】
그리고 쏘시엘에게 건냈다.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신(世界神)이 된 셈!
단,
“저기, 비겁한 남편? 느낌이 이상해.”
“엉덩이? 아니면 신격?”
“둘 다! 하지만 지금은 신격을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녀는 남편님이 ‘원료’를 안 주면 아무것도 못 만드는 깡통 신(神)이기 때문이다.
즉,
남편님께 사랑받으면 세계급 신이고, 미움받으면 국물도 없다.
이해했지?
“아주 잘 이해했어! 자본사회의 노예계급이잖아!”
“싫으면 반납하든가.”
“그건 더 싫어!”
투덜대는 비겁한 마누라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순간이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는 듯이 거칠게 몰아쳤다.
내 공성추가 G급이 아니었다면 진즉 파괴됐을 것이다.
“...너 말이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하지만 사랑해! 그 마음은 진짜야! 앞으로도 사랑하게 해줘! 영원히! 사랑해!”
“나도 말 좀... 늦었나...”
예상했던 대로 ‘자연’이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탐욕스러운 존재를.
그 순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이 나를 옥죄면서 숨이 탁 막혔다.
티끌이나 다름없는 내 존재가 덧없이 삼켜진다...
“...남편? 자는 거야?”
“......”
“설마, 복상사? 농담이지? 장난치는 거지? 그렇지? 남편!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이러지 마~!”
“......”
나를 어떻게든 깨우기 위해 흔드는 쏘시엘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엉엉! 일어나... 일...”
하지만 그것도 점차 희미해졌다.
*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연이란 거대한 의지는 탐욕스러운 나를 흡수하길 원했지만, 내가 흡수되길 원치 않는 신(神)들이 많았던 까닭이다.
판타지아 교육장.
몰랑소프트를 포함해서 수많은 신이 후원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사라지면 판타지아 교육장도 사라지고, 투자자들도 덩달아 손해를 보게 되어있다.
그렇기에 나는 존재한다.
완벽한 신으로서!
【원죄】
의미심장한 신격이다.
고향별 지구에서 원죄(原罪)란, 어느 종교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신(神)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은 ‘최초의 죄’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다방면으로 흡사했다.
1) 선과 악을 나누는 용사
2) 신격: 인간
3) 자연의 힘을 폭식한 죄
4) 합쳐진 창세의 힘
5) 자연에서 추방
6) 고달픈 유부남의 삶!
그리고 나는 위대한 자연의 의지를 거스른 ‘최초의 죄인’이었다.
참으로 인간답지 않은가?
“에취!”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탓에 이물질로 막혀있던 기도가 재채기 한 방에 뻥 뚫렸다.
얼마나 잤길래?
게슴츠레 눈을 뜬 나는 먼저 주위를 둘러봤다.
“그대로네.”
피라미드 같은 초대형 무덤 속에 보관해뒀을 줄 알았는데, 평소처럼 마왕의 옥좌에 앉아있었다.
며칠 안 잔 걸까?
“지구의 시간으로 666일. 내가 만든 공간에서 182만 년쯤 잤어.”
“쪽쪽.”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쏘시엘이 기척도 없이 등장했다.
182년도 아니라 182만 년...?
기가 막혔다.
“남편님을 100만 배 가속한 공간에 격리해놨다고?”
“빨리 깨우고 싶어서.”
“너...”
“보고 싶었어.”
“......”
“애가 울지도 몰라서 감정을 조절하는 중인데,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네. 훌쩍!”
“...이리 와.”
나는 다소곳이 무릎 위에 앉은 쏘시엘의 품에 안긴 조그마한 생명을 물끄러미 보았다.
솔직히 실감이 안 됐다.
피곤해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 비겁한 마누라가 낳은 ‘5번째 아이’가 생겼으니까.
“쪽쪽?”
【척추】
딸이 아닌 아들이긴 했지만, 척추가 GGG등급으로 매우 건강해 보여서 만족하기로 했다.
...너무 건강해서 걱정되는군.
“수고했어.”
“잘생긴 남편. 다른 말을 하고 싶은 얼굴인걸?”
“잘못 본 거야.”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지금은 가정의 평화를 위협하는 몰랑소프트부터 해결해야 한다.
외모는 분명히 내가 알던 예전 그대로인데, 묘하게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쏘시엘이 말했다.
“아이의 이름은 아직 짓지 않았어. 도련님은 ‘페도나르 2세’라고 짓기를 바라는 눈치지만.”
“이 자식...!”
내 손에 잡히면 죽는다!
“남편이 시스템 족쇄까지 전부 가져가면서 나는 자유로워졌어. 그래서 지구에 사시는 어머님과 아버님께 자주 얼굴도장 찍으러 가. 우주마를 타면 순식간이거든.”
“Seeeeex~”
섹시한 가오리가 우리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상당히 거슬렸는데, 젖을 실컷 먹고 트림한 아들이 그런 가오리를 보며 빵긋빵긋 웃었다.
이 녀석도 카리스처럼 나랑 성격이 안 맞을 것 같다.
“디스코는 좀 어때?”
“모험에 만족하고 있어.”
“다행이군.”
“하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야. 그녀는 학생이 아닌 용사V를 극찬하고 있거든. 중등교육장 S학급 학생 10명이 강한수 1명을 못 이기고 질질 끌려다니는 중이야.”
“...심각한데?”
“학생과 동료 없이 강한수 혼자서 마왕의 탑 80층까지 올라와. 평균 6년 동안 성장한 힘만으로.”
“정말 심각한데?!”
지크가 1층에서 탈락하는 걸 보면서 탑의 난이도를 고평가했었다.
그런데 내 상상 이상으로 낮았던 모양이다.
“교사들도 당황하고 있어. 나도 디스토리아가 남편을 자꾸 팔라고 해서 짜증 나는 중이고.”
“그렇군.”
낙관할 상황이 아니었다.
“남편은 좀 어때? 아빠, 고모, 이모의 힘을 독식하고 소멸할 뻔했잖아. 나는 과부가 될 뻔했고!”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최고야.”
【원죄】
나에게 죄가 있다면, 과분한 힘을 삼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