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61화 (361/430)

 361화

[23회차] 올케 vs 조카

“안 놔?”

“너는?”

“생각해보고.”

“나도 생각 중.”

“......”

“......”

이대로는 끝이 안 난다고 판단한 우리는 조금씩 팔 힘을 풀었다.

양보는 내가 먼저 했다.

강한수는 내가 자신이란 생각을 못 해도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게 지는 건 절대 굴욕적인 게 아니다.

...아닐 것이다.

슥.

스륵.

마침내, 서로의 목에서 완전히 손을 뗀 우리는 자연스럽게 민중 틈으로 섞여들었다.

거리를 나란히 걸어가던 강한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지나가던 몰랑교 광신도X. 나에게 무슨 용무로 말을 걸었지?”

X, 광신도X인가?

나를 상당히 경계하는군.

“강해 보여서, 큐라레 백작에게 청혼하는 토너먼트를 추천하려고 했지.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본 것 같네.”

“오지랖이다?”

“아니. 용사 강한수. 당신은 유명인이잖아? 참가자 중 지명도 높은 당신을 쓰러트리면 우승 배당금도 많아지지 않겠어?”

“허허... 그렇군. 무슨 꿍꿍이인지 이해했어.”

어이없다는 표정.

하지만 호승심이 들끓고 있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공작Q 영지의 토착민들만 애용하는 골목길 선술집까지 쭉 함께 이동했다.

이곳을 고른 이유는 하나.

카리스를 낳은 검희랑 재회한 기억이 없는 강한수는 모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그녀와 하늘에서 데이트한 후, 바로 돌아가지 않고 하룻밤... 아니, 정오까지 머물렀던 장소.

공작Q의 영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검희가 추천한 맛집이다.

“수제 과일주가 맛있는 집이지.”

“헤에~ 운치 있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이 왕국에서 태어난 나도 여길 알게 된 건 결혼한 이후거든.”

“...그래?”

거짓말하진 않았다.

나를 낳아준 ‘엄마’는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주님이자 검희의 소꿉친구이니까.

...이렇게 말하니 좀 이상하네. 나는 대체 몇 살 연상녀랑 속도위반을 한 거지...?

아무튼, 아무튼...

“오랫동안 우매한 민중에게 몰랑교를 전파하며 살아왔지만, 슬슬 정착하고 싶어서 말이야.”

“용감한걸? 공작 가문의 영애를 첩으로 들일 생각을 하다니.”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 그렇게 되겠지. 그러는 너는?”

“...조금 복잡해.”

그래. 아주 복잡하시겠지.

강한수에게 검희는 ‘자기 부주의로 알몸을 보여놓고 칼부림하는 미친년’일뿐이니까.

하지만 이곳에 왔다는 건, 검희가 동료로선 유용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과일주를 들었다.

“일단, 한 잔?”

“흠. 좋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취기다.

능력치에 의존하며 어정쩡하게 강할 때는 느끼기 힘들었던 오락.

하지만 ‘신’이 된 현재는 그런 제약에서 자유로워졌다.

내가 취하고 싶으면 취한다.

능력치는 장식일 뿐.

▷종족: 로열 휴먼

▷레벨: 2001

▷직업: 사도(총애=능력)

▷스킬: 신앙Z 신념Z 신력Z 교리MAX 체력MAX 선동MAX 날조MAX 전도MAX 만능MAX 영재MAX 위엄MAX 찬가MAX 성호MAX 정령MAX 자연MAX 행운SSS…

▷상태: 취기, 축복

판타지아 시스템의 핵심인 능력치는 가공의 산물이다.

공식으로 쉽게 풀이하면,

【세계】=【자연】+【시간】+【공간】

이렇다고 할 수 있다.

능력치도 ‘세계’의 일부이며, 나는 판타지아 세계의 근간인 ‘자연’을 다루는 신(神)이다.

내가 원한다면 능력치의 모든 스킬을 GGG등급으로 도배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나는 한계돌파의 제물로 ‘자연’을 무한정 퍼부을 수 있으니까.

레벨도 다르지 않다.

“광신도X. 마스터 몰랑을 향한 신앙심이 굉장히 투철한걸?”

“당연하지. 지금의 내가 있게 해준 분이니까.”

“그것참 신기한 우연이군. 나도 마찬가지거든. 종교로 발전할 줄은 몰랐지만.”

“그분을 위해 건배.”

“건배!”

마스터 몰랑이란 공감대 덕분에 경계를 풀고, 금방 분위기에 취한 강한수는 내 장단에 제법 맞춰줬다.

솔직하게 궁금했다.

지구에서 죽은 나는 판타지아 북대륙에서 태어났고, 강한수는 평범한 용사처럼 다시 소환됐다.

물론, 100% 평범한 건 아니다.

“네 이야기를 해봐.”

“나? 흐음.”

“싫으면 말고.”

“...강력한 악마를 무찌르고 고향별로 돌아간 나는 마왕으로 오해받아서 죽었어.”

“저런.”

“믿어주는 거냐?”

“그분을 믿는 몰랑한 신자의 이야기를 안 믿을 이유가 없지.”

“눈물 나게 고맙군. 건배.”

“이게 내 일이니까. 건배.”

짠! 짠!

우리는 다시 한번 ‘마스터 몰랑을 위해!’라고 외치며 과일주를 한껏 들이켠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참 지랄 맞게도 영혼이 손상됐어.”

“잘만 살아있는데?”

“그렇긴 한데, 다시는 숨이 탁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고향별에 돌아갈 수 없어.”

“안 됐군.”

강한수의 설명은 생략이 무척 많았다.

지구에서 죽은 졸업생들은 자동으로 다시 판타지아로 납치되어 재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가출선배가 ‘판타지아에서 탈출한 마왕 페도나르’를 살해할 의도로 준비한 안배에 걸려버렸다.

그것은 남들이 겪는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다.

원래 같으면 소멸.

하지만 나는 ‘나를 사위로 점찍은 마왕 페도나르’가 걸어둔 안배 덕분에 영혼이 소멸하지 않고 판타지아에서 환생할 수 있었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다.

장인어른 대신 죽고, 장인어른 덕분에 되살아난 셈이니까.

“쓸데없는 말을 많이 했네.”

“앞으로의 계획은?”

“후배들이 마왕을 쓰러트릴 수 있게 도와주는 거. 나는 동료를 잘못 만나서 무지하게 고생했었거든.”

“굉장한 오지랖이군.”

“하하! 20년 동안 배운 게 그것뿐이거든.”

“......”

이렇게 보니 진짜 미쳤었네.

과거의 나.

고작, 판타지 경력 20년으로, 최소 200년이 넘는 용사들을 간단히 휘어잡고 있었다.

강한수가 말했다.

“...모험하다가 괜찮은 여자를 만나면 결혼해야지. 내 나이도 벌써 마흔을 바라보거든.”

“결혼...?”

“내 계획이 이상해?”

“그... 아니.”

많이 이상하다.

환생과 소환으로 갈리면서 우리의 사고방식이 달라졌다는 건 이해하지만, 결혼은 너무 뜻밖이었다.

쏘시아?

비열한 장인어른의 함정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안 했을 것이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왜?

“히프리아라고...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해주던 여자를 고향별에 도착하자마자 잃었어.”

“......”

“주종관계이긴 했지만, 내게 너무나 과분한 최고의 여자였지. 그렇다고 다른 남자에게 넘겨줄 순 없잖아? 그녀가 내 아이를 낳으면, 무서운 어머니께 손자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해주고 싶었어. 하아... 꼴사납군.”

“괜히 미안하네.”

짠! 짠!

나는 강한수랑 술잔을 맞대며 생각했다.

환생한 내 곁에는 성녀H가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했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날 때까지 모체를 지켜줬다.

하지만 강한수는 아니다.

성녀H가 자신 탓에 소멸했다고 착각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게 몰랑교 사도의 힘인가? 신기하네. 방금 만난 사람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내 얘기를 이토록 많이 하다니.”

“몰랑계시록 2장 5절. 모험가 라누벨이 말랑하도록 강요했다. 그래도 그분은 몰랑하셨다.”

“거참! 체계적인 교리도 나왔고.”

“짝을 잃은 그대에게 몰랑의 축복이 있길. 몰랑.”

“뭐... 나쁘지 않아. 진지하게 들어줘서 고마워. 몰랑.”

짠! 짠!

우리는 몰랑으로 하나가 되었다!

또 한참을 말없이 술잔을 들이키는데, 이번에는 강한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너는 어때?”

“뭐가?”

“결혼했다면서.”

“아아, 했지. 출장을 마치고 집에 와보니, 아내가 처음 보는 젖먹이를 안고 있어서 깜짝 놀랐지.”

“그런데 검희도 노리시겠다?”

“...몰랑.”

“몰랑이면 다 되는 줄 아냐! 이 광신도 녀석아!”

뻔뻔하게 들리는 거 안다.

명백한 오해였지만, 굳이 변명해서 상황을 지금보다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받아쳤다.

“강한수, 네가 왜 흥분하는데?”

“뭐?”

“검희가 누구랑 결혼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용사라서.”

“흠. 부정할 수 없군. 용사가 중매를 서기도 하니까. 하지만 내가 검희를 불행하게 할 거란 보장 있어?”

“......”

“네 마음을 말해봐. 검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술이나 먹어.”

“하하! 멋진 답이야.”

우리는 선술집에서 실컷 마시고 헤어졌다.

높은 능력치 탓에 취하지 않는 강한수는 과일주스 마시는 밋밋한 기분이었겠지만, 나는 아니었기에 마음껏 알코올을 즐겼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야?

취기가 잔뜩 오른 나는 도중에 잠들었고, 술값을 전부 계산한 강한수는 떠나고 없었다.

*

“남편님. 내가 계산했어.”

“뭐? 이 양아치 자식이 그냥 떠났다고? 큭-!”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숙취로 고생하는 건 알겠는데, 조용히 해줘. 간신히 재웠단 말이야.”

“새근새근.”

내 젖먹이 아들이 쏘시엘의 품에서 침을 흘리며 자고 있었다.

“온종일 안고 있네.”

“내 아이니까.”

“그래도 온종일은 좀...”

“남편님은 내 마음을 몰라. 내가 얼마나 아이가 갖고 싶었는지 상상도 못 할 거야.”

“...200년 만에 느껴보는 숙취. 그리고 마누라의 잔소리. 평범한 가정은 이런 기분일까?”

“갑자기 감성적이네.”

나는 머리를 문지르며 침대에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이곳은 내가 잠든 선술집 2층.

술기운에 잠들고 강한수가 떠나자마자 여기로 옮겨진 듯했다.

나는 리모컨으로 조작하듯 손짓으로 창문을 열며 말했다.

“쭉 함께했던 여자를 잃은 강한수가 20년 만에 모험을 멈추고 정착을 결심하는 걸 보면서,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어. 나도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야만 멈출까?”

“이상한 질문인걸. 남편은 고모가 히프리아의 육체를 차지했을 때도 안 멈췄잖아.”

“...네가 옆에 있었던 덕분이 아닐까?”

“가, 갑자기 훅 들어오지 마! 심장에 무리가 오잖아!”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쏘시엘이 새빨개진 얼굴을 휙 돌렸다.

“조카야. 귀엽다!”

“이모!”

“쉿! 귀여운 씨드엘이 깨면 어쩌려고. 조용히 해라.”

언제나 내 머리 위에서 떨어지지 않던 최초의 정령.

그랬던 그녀가 현재는 쏘시엘의 어깨에 앉아서 젖먹이 종손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웬일이래?”

“나는 조카가 조카를 낳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지켜봤다. 그때 결심했다. 이 귀여운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지켜주자고.”

“잠깐! 말이 좀 이상한데?”

조카가 조카를 낳는다고 한 것 같은데?

“이상하지 않다. 동생 페도나르의 딸 쏘시엘도 내 조카. 동생 파르마몬의 아들 씨드엘도 내 조카.”

“족보가 참...”

내가 ‘자연계 신(神)’이 되면서 어이없게 꼬여버린 것 같다.

마약정령의 논리대로라면, 나는 친형의 딸이랑 결혼한 놈이 된다.

쏘시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의 말은 무시해. 그런 식으로 따지면 벗어날 수 있는 신이 별로 없어. 자연의 재산을 물려받은 양자(養子)쯤으로 생각하면...”

“올케야! 섭섭하다!”

“이모...”

“앞으로는 형님이라고 불러라!”

“어머! 그러세요? 앞으로는 씨드엘의 뺨에 뽀뽀하기 금지예요.”

“비겁하다! 귀여운 조카를 인질로 잡다니...!”

...둘의 호칭이 정리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숙취로 어질어질했지만, 내가 생명체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쁘지 않다.

“남편님. 어디 가?”

“토너먼트 신청하러.”

“정말로 참가하려고? 디스토리아에게 들킬 텐데.”

“걱정하지 마. 어제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

나를 여전히 ‘잡다한 신격을 소유한 신’으로 아는 탓이다.

그리고 들키면 또 어떤가?

내가 내 여자를 지키기 위해 총각들이랑 싸우겠다는데.

이건 도의적인 문제다.

“...잘생긴 남편님.”

“왜?”

“귀여운 아들 앞에서 거짓말할 거야? 솔직하게 말해.”

“...술값 떼먹고 튄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줘야지.”

미뤄둔 대답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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