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화
[24회차] 0.01%
“제대로 해보자고.”
물론, 판타지 경력 20년짜리를 상대로 온 힘을 다할 생각은 없다.
근력은 강한수랑 동일.
스킬은 없음.
신격 [원죄]도 봉인.
불리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에서 내가 활용할 수 있는 강점은 쌓아온 경험뿐이다.
그 양은 실로 방대하다.
특히, 가출선배의 집에 마네킹처럼 장식되어 있던 ‘우주 용사’들을 흡수한 것이 매우 크다.
별의 검사
골드팽(Gold-Fang)
태양의 전사
무신(武神)
육도선인(六道仙人)
신살검 계파조사
천마(天魔)
무림맹주(武林盟主)
우주류 전승자
불레이드(不-Raid)
다크템플러
개똥이
추려보면 이 정도일까?
가출선배의 정복기념품 중에는 이보다 더욱 강한 자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초능력에 의존했다.
초능력 빼면 일반인.
그런 양아치들은 싹 거르고 오직 기교만으로 초인의 경지에 오른 자들만 남겼다.
아! 여자도 빼고.
내가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의 기술은 몸에 맞지 않는다.
여기서 한 번 더 추린다.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끼리 비교해서 더 나은 쪽을 참고하고, 초능력은 아니지만, 유전적인 육체 능력으로 흥한 자들도 걸렀다.
그리고 남은 건?
골드팽(Gold-Fang)
무신(武神)
개똥이
골드팽과 무신은 체계적인 무술을 배운 절대강자들이고, 개똥이는 동물적인 감각만으로 전황을 뒤집는 천재 중의 천재였다.
물론, 초능력이 없는 이 셋은 가출선배가 수집한 ‘우주 용사’ 중에서 중하위권에 해당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셋의 지식과 기술을 적당히 합쳐서 나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생활기록부.
판타지아 대륙에 누적된 원주민들의 ‘경험’ 또한 직간접적으로 나의 경험이 되어준다.
사실, 후자가 더 크다.
이것이 내 무기.
“...철퇴 다음은 무술인가?”
“안 오면 내가 간다?”
“그건 싫은데.”
아까부터 쭉 탐색전을 벌이던 강한수가 먼저 움직였다.
효과적인 기습은 아니었지만, 주도권을 빼앗긴 채 시작하면 안 된다는 판단이리라.
우우웅-!
강한수가 팔을 앞으로 뻗으면서 내지른 보리스의 광선검에서 빛의 칼날이 뿜어져 나온다.
단순한 찌르기.
하지만 200mm 막대기가 ‘빛의 속도’로 2000mm가 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빠르다!
빛의 속도니 당연한가?
광선검이란 첨단문물을 전혀 접하지 못한 자들은 이 일격으로 즉사했을 것이다.
“미친...!”
내 입에서 욕부터 나왔다.
자신의 하렘을 통제하지 못하고 탈주한 가출선배가, 숭고한 마음을 가진 ‘우주 용사’들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압도적인 초능력과 과학기술의 우위.
예를 들어,
개똥이가 혼자서 1000명의 양아치를 쓰러트리는 엄청난 놈이라도, 전투기는 못 당해낸다.
이건 그런 문제다.
파지직-
섭씨 8000도의 광선검을 맨손으로 막는 건 무리다. 판타지 마법으로 만든 ‘불의 검’이 훨씬 귀엽다.
그렇다면...
뿅!
나는 정의로운 철퇴를 가슴 앞으로 소환해서 광선검을 막았다.
하지만 이건 임시방편이다. 강한수가 살짝 손목을 틀면 내 몸이 초고열에 지져질 것이다.
“흡!”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우 짧다.
하지만 강한수에게 없는 무술을 익힌 내게 그거면 충분하다.
광선검에 겁먹지 않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
강한수는 침착하게 내 오른손을 베고자 손목을 까딱했다.
칼날이 빛이라서 매우 가벼운 광선검은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다. 평범한 검으로는 절대 구현할 수 없는 빠른 공수 전환!
이쯤은 예상했다.
오른팔로 강한수의 시선을 빼앗으면서 더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끝이다.”
“글쎄?”
“...끝이야.”
앞으로 내디딘 오른발을 강하게 구르면서 대련장 바닥을 부쉈다.
강한수의 균형을 무너트리는 건 실패했지만,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광선검의 유일한 단점.
물속처럼 매질의 방해를 받으면 빛의 칼날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다.
그게 잠깐일지라도.
팡!
치직-
하지만 강한수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광선검이 한순간 막히면서 당황할 법도 한데, 침착하게 내 공격을 받아칠 의도로 발차기를 시도했다.
노리는 부위는 내 옆구리. 최종적으로는 내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에 피해를 줘서 허리디스크를 일으키려는 게 틀림없다.
오만한 자식!
그게 너의 패배요인이다!
지금, 이 한 방으로 확실하게 끝내주리라.
“타핫!”
“헛-?!”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능력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자부심으로 자신만만했던 기교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퍼억-
제대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후속타도 가하고 싶지만, 흙먼지를 싹 태워버린 광선검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우우웅-
우리 사이를 막듯 휘둘러진다.
나는 무리하지 않고 아직 흙먼지가 피어나는 뒤편으로 쭉 물러났다.
강한수는 쫓아오지 않았다.
“진짜 성가시네.”
광선검은 상대하기가 너무 까다로웠다.
파괴되지 않는 정의로운 철퇴로 막으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건 막을 수가 없다.
손전등의 빛을 막대기로 막지 못하는 이치다.
지금 필요한 건 방패.
하지만 이런 식으로 수단을 늘리면 나의 승리가 확실하다.
나는 신(神)이고, 강한수는 인간이니까.
애초에 싸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기에 나는 ‘인간’으로서 강한수를 이기려는 것이다.
정정당당하게.
강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묵직하군.”
마스터 몰랑의 가르침을 소화해낸 녀석은 간단히 쓰러지지 않았다.
...위험한데.
정정당당을 따지는 건 좋지만, 너무 불리하게 제한을 둔 걸까?
“평범한 무기로 싸워라.”
“이건 과학이다.”
“허!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그렇다면 나도 소개대로 ‘지나가던 광신도’로서 상대해주겠다.
종교의 힘을 깨달아라!
뿅!
정의로운 철퇴를 회수하고, 정의로운 법의(法衣)로 바꿨다.
맨손으로 쓰러트려주지!
“...일해라.”
강한수는 바로 공격해오지 않고 다음 패를 과감히 꺼내들었다.
땅, 불, 바람, 물, 마음.
수많은 정령이 그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진짜 마음에 안 드네.”
내가 전투태세를 바꾸자마자 간도 안 보고 곧장 정령을 꺼냈다.
두드드드...
땅의 정령들이 대지를 흔들면서 내 균형을 깼다.
물컹...
이어서 물의 정령들이 대지를 축축하게 적혀서 진흙으로 바꿨다. 그리고 내 발을 붙잡는다.
휘이잉~
그리고 바람의 정령들이 공기저항을 지워서 강한수의 돌진을 더욱 빠르게 가속했다.
화르륵!
불의 정령들이 내 주위의 공기를 뜨겁게 달궜다.
호흡하는 산소가 줄어들고 아지랑이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거기다가,
“강한수! 강한수!”
“와아! 강한수 이겨라!”
“강한수! 강한수!”
“응애교 만세! 영원하라~!”
“와아아아!”
마음의 정령들이 관중들을 선동해서 그를 응원하게 했다.
신실한 몰랑교도들마저도 정령의 힘에 현혹되어 비겁자 강한수와 몰랑교를 찬양했다.
진짜 짜증나는구먼!
“몰랑하리라.”
정령들이 나에게 덤비는 시나리오는 1회차 때부터 한 번도 겪지 못한 배신이었지만, 이 정도로 내 정의감을 막을 순 없다.
철퍽~?!
물커엉~?!
대지의 정령과 물의 정령이 합작한 진흙탕을 힘껏 걷어찼다.
시야와 호흡을 방해하는 불의 정령은 무시! 아까부터 내 눈에 흙먼지를 뿌리는 바람의 정령도 무시! 관중들을 선동하는 마음의 정령도 무시! 내 속옷을 축축하게 적시기 시작한 물의 정령도 무시! 땅의 정령도...
이 새끼들아! 적당히 해라!
“우정의 힘이다.”
“빌어먹을!”
정령들이 방해하는 틈에 지척까지 도달한 강한수의 광선검이 법의로 가리지 않은 내 얼굴을 노렸다.
하! 아주 날로 먹으려 하네!
휘익.
나는 상체를 뒤로 젖히면서 오른발을 힘껏 쳐올렸다.
피지직...
당연한 얘기지만, 정의로운 법의로 감싸인 내 다리는 광선검에 베이지 않았다.
“역시...”
이것도 예상했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린 강한수가 광선검의 소환을 과감히 해제했다.
섬세한 무기니까.
일반 검이랑 달리, 빛의 칼날이 뿜어져 나오는 손잡이 부분이 충격으로 고장 나면 수리할 수 없다.
서대륙의 섹스피어에게 가져가면 고칠 순 있지만, 이번 대전은 물론이고 그때까지 쓸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진 육탄전.
퍽! 퍽! 퍽! 퍽...!
무술과 경험의 우위를 가진 내가 압도적으로 이길 것 같지만, 비열한 정령들이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질리지도 않고 방해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정령들이 줄긴커녕 늘어났다.
점점 빡세진다.
“비겁하다! 정령들을 노예로 부리다니!”
“노예가 아니라 직원이다만?”
“뻔뻔한 자식!”
“너야말로 진짜 궁금한데, 정말로 휴먼입니까, 휴먼?”
“종족 보면 모르냐?”
내가 밀리는 것처럼 보여도 야금야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강한수의 공격은 내 정의로운 법의를 뚫지 못하는 반면, 나는 조금씩이라도 유효한 타격을 먹이고 있는 덕분이다.
퍼엉!
정령들이 우리 사이에 폭발을 일으키면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강한수가 외쳤다.
“혼돈으로 파괴된 망각의 별에서 탄생한 마지막 검이여. 공허한 사랑과 우정을 베어버릴 꿈과 희망이여. 그 거룩하고도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는 계승자가 이렇게 찬미하노니, 태초부터 내려온 맹약에 따라 그 전설을 입증하라! 성검 뉴클리온!”
콰르르- 번쩍!
내가 지구에서 요정 용사로부터 빼앗은 ‘마왕을 벨 수 있는 성검’이 출현했다.
비겁한 마누라는 이것까지 구현해놓은 건가?
“......”
이쯤되니 나도 슬슬 현기증이 몰려왔다.
아무리 내가 신격을 봉인해두고 있다지만, 이딴 녀석을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이기란 거지?
성검 뉴클리온.
견적을 내보니, 저거라면 정의로운 법의도 확실하게 찢겨나간다.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뭐가 있을까?
“없군.”
애초에 완벽함이란 그런 것이다.
불순물을 제거한 99.99%의 완벽함을 추구해서 ‘신’이 됐다.
그런데 이 완벽한 요소를 봉인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0.01%만 남게 된다.
지금의 나는 그 미세한 찌꺼기만으로 싸우는 중이다. 그러니 제대로 힘이 날 리 없지.
“항복? 술값은?”
“...기다려.”
무술의 달인이라도 맨손으로 성검 뉴클리온을 상대하는 건 만용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
나는 직업을 활성화했다.
▷직업: 사도(총애=능력)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나는 처음부터 쭉 ‘몰랑교’의 이단심문관이라고 소개했지만, 실제로 따르는 종교는 ‘응애교’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힘을 ‘자연스럽게’ 끌어다가 쓰기 편하기 때문이다.
내(신)가 나(인간)를 무한정 총애하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니 이건 합법이다.
팟!
움직임이 수십 배로 빨라졌다.
정령들의 훼방을 가볍게 날려버리고 주먹에 힘을 실었다.
파앙-!
“큭! 드디어 그 사기적인 직업을 활성화하셨군.”
성검 뉴클리온으로 내 주먹을 막으며 주르륵 뒤로 밀려난 강한수가 두 눈에 힘을 줬다.
그것은 절망이 아닌 호승심.
이런 나를 이길 셈인가?
“항복해.”
“농담이 심한걸.”
“그렇다면...”
나는 재차 빠르게 돌진했다.
저 비열한 강한수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리라!
펄럭-!
“정의를 보여주지.”
“은퇴했다며?”
“...그러면 사랑의 수호날개라고 해둘까.”
“뭐냐, 그 유치한 작명 센스는.”
성검 뉴클리온보다 위협적인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까지 나왔다.
“탓!”
“하압!”
나와 강한수는 재차 격돌했다.
그리고 승패가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