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64화 (364/430)

 364화

[24화] 인기 없는 남자

“항복.”

“...진심이냐?”

“그래.”

“허...”

듣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를 펼친 이후부터 맹공을 펼치던 강한수가 뜬금없이 항복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는가?

그렇진 않았다.

▷직업: 용자(전원=1레벨)

모두가 공평하게 1레벨로 떨어지는 직업 ‘용자’의 효과로 능력치가 쓸모없게 된 탓이다.

이때부터 정말 치열한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강한수의 광선검도 위력이 감소하고,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는 골다공증의 위험이 있어서 마음대로 날뛰지 못했다.

믿을 거라고는 성검 뉴클리온과 정령들뿐.

나도 이때부터는 정의로운 법의와 무술만 믿고 싸웠다.

그런데 왜?

“내 허리는 소중하니까.”

“......”

“나는 20년 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살아왔지. 그리고 소중한 걸 잃은 후에야 깨달았어. 아직 있을 때 잘해야 한다고.”

“...그런가.”

잃어버린 것.

성녀H를 말하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나는 이미 검희의 약혼자거든. 이 싸움에서 지더라도 나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없어. 자존심이야 좀 상하지만.”

“그렇군.”

더는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깔끔하게 패배를 선언한 녀석을 붙잡고 뭘 어쩌겠는가?

너무나 변해버린 나.

어쩌면 ‘지금의 나’가 됐을지도 모를 모습이다.

나는 몸을 돌렸다.

*

토너먼트 우승자로서 검희에게 도전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전에 이미 약혼을 선언해버렸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검희를 이겨도 무의미하다.

나는 위약금으로 막대한 양의 술값을 챙겼다.

그리고 선술집을 찾았다.

“한 병 더.”

“......”

“......”

안에 손님이 나밖에 없는 건 아니었지만, 매우 조용했다.

내 기분이 매우 안 좋다는 걸 눈치껏 아는 듯했다.

끼이익-

딸랑~♪

출입문의 종소리가 울렸다.

“잘생긴 남편님. 뒤늦게 술맛을 알게 된 모양이네.”

“...애까지 데려왔네.”

“입구에서 들어갈지 망설이다가 예상 밖으로 조용해서.”

“그런가...”

쏘시엘이 낳은 아들 씨드엘은 온종일 먹고 자기만 했다.

대소변을 볼 때는 가끔 울기도 했지만, 기저귀와 엉덩이가 0.5초면 깨끗해지기 때문에 잠깐이다.

지금도 자고 있다.

“강한수와 검희의 결혼 때문에 고민이지?”

“......”

“내 얘기를 잠깐만 할게. 남편님이 갑자기 식물인간으로 변해서 엄청나게 놀랐어. 당시에는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씨드엘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앞날이 캄캄하더라고.”

“......”

“씨드엘은 지구에서 태어났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무서웠거든.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실종, 의지하던 남편님도 혼수상태. 그래서 무작정 지구의 어머님을 찾아갔어.”

“...미안.”

당시에는 충동적인 결단이었다.

수없이 시뮬레이션해본 나는 머릿속으로는 ‘성공’을 확신했지만, 부작용을 염두에 뒀다.

예를 들자면?

완벽한 신이 되면서 ‘총배설강’이나 ‘고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는 아내의 말을 무시했다.

쪼르르.

쏘시엘이 빈 잔에 과일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그때 생각했어. 나는 1년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검희는 어떨까, 라고. 그녀는 15년 동안 아들 크리스를 혼자서 키웠어. 심지어 모두에게 비밀로 한 채. 용사가 회귀하지 않고 버티면 20년, 30년, 50년... 끊임없이 계속되지. 그리고 용사가 죽으면 처음부터 다시.”

“...검희를 판타지아에서 빼자는 얘기야?”

“그건 불가능해. 진짜 그녀는 아빠에게 살해됐으니까. 남편이 아는 검희는 생활기록부를 토대로 만들어진 존재야. 그래서 판타지아 차원 밖에서는 살 수 없어.”

“그렇군.”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쏘시엘은 영원히 고통받는 검희에게 ‘남편’을 붙여주자는 것이다.

과거의 나, 강한수를.

“따로 빼는 건?”

독립된 판타지아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하면 어떨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영혼은 컴퓨터게임 캐릭터가 아니야. 생활기록부란 방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그녀는 모든 판타지아 세계에 존재해. 남편의 말대로 하려면 검희가 태어나자마자 죽도록 운명을 설정해야 해. 독립시키고 싶은 단 한 명 빼고.”

“미친...”

“애 앞에서 욕하지 마.”

“......”

“위선일지도 몰라. 판타지아 대륙 어딘가에는 용사가 회귀할 때마다 고블린들에게 끔찍한 굴욕을 당하며 죽는 여자도 있어. 그들이랑 비교하면 검희는 행복한 편이지. 하지만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야. 질투심 많은 비겁한 여자일 뿐. 그래도 검희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주위에서 듣는다.”

“괜찮아. 기억을 지우면 돼.”

판타지아의 조물주다운 대답이다.

쏘시엘의 관점에서 검희는 판타지아 세계를 구성하는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제 필요한 건, 나의 결단뿐.

하지만 이미 답은 나왔다.

“마음대로 해.”

“고마워.”

그때, 비겁한 마누라의 어깨에 앉아있던 철부지 ‘누님’이 말했다.

“조카야. 추하다.”

“제가 왜요?”

“검희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남편에게서 떼어냈다. 씨드야. 너는 절대로 추한 엄마를 닮으면 안 돼.”

“아니거든요!”

“히히히! 축배를 들자, 조카야. 경쟁자를 숙청하고 일인자의 자리를 공고히 한 기념으로.”

“말이 이상하잖아요! 조카를 악녀로 몰지 마세요!”

“건배다! 히히히!”

“이모...!”

“응애애애앵~!”

“아앗?!”

빽 소리를 지르는 엄마 때문에 놀라서 잠에서 깬 젖먹이 아들이 울기 시작했다.

사색이 된 쏘시엘과 누님은 아기 달래기에 바빴다.

쪼르륵.

나는 빈 잔에 과일주를 한가득 따랐다. 그리고 우주의 별빛을 향해 잔을 들며 기도했다.

“건배.”

나를 사랑해준 카이사 큐라레의 행복을 바라며.

*

기둥서방의 꿈을 이룬 강한수가 얄라딘의 파티에서 이탈했다.

사실, 여기만이 아니라 여러 평행세계에서 몇 년 전부터 벌어지는 일이었다.

“검희는 못 얻었지만, 앞으로 내 세상이다!”

“얄라딘 씨. 우리끼리 될까요? 셋만 남았는데...”

“맞아요. 강한수 씨가 짠 모험계획이 벅차긴 했어도 틀린 적은 없었잖아요.”

모험을 주도하던 강한수의 이탈로 기뻐하는 얄라딘이랑 달리, 두 여성 용사는 불안해했다.

나도 좀 걱정됐다.

지크처럼 탑 1층에서 허무하게 탈락하는 건 아니겠지?

“저는 찬성요.”

“얄라딘 님이 잘하시겠죠.”

“맞습니다. 서두를 것 없지요.”

“저도 동의합니다.”

“우리끼리로 충분해요.”

강한수가 부지런히 모아준 동료들이 한마디씩 했다.

성녀A, 현자, 토마토, 실비아...

그들은 우수했던 고용주의 이탈을 노골적으로 기뻐하면서, 한심한 용사 얄라딘을 지지했다.

내 1회차가 떠오르는군.

하지만 그들의 희망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제군들. 다시 한번 지껄여보지 않겠는가?”

“설마...?”

“가, 강한수 씨?!”

“어째서!”

“여긴 왜...”

고급스러운 여행자 복장을 한 강한수를 본 용사와 동료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가 데려온 새로운 동료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카이사 큐라레 백작입니다. 편하게 검희라고 불러주세요. 요즘 같은 어수선한 시기에 신혼여행은 사치 같아서, 한동안 여러분이랑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밤에 좀 시끄럽더라도 양해 부탁드려요.”

“혹시...?”

“그, 그건...”

“맙소사...”

“양심 무엇...?”

강력한 부부가 파티에 합류했다.

그리고 용사의 모험은 이때부터 신혼여행 패키지로 전락했다.

그것은 목숨이 100개로도 부족한 특급열차였다.

강한수와 검희의 데이트코스는 언제나 격렬했다. 낮에는 전장에서, 밤에는 침낭에서.

무려 3년 동안이나.

“후배 제군들. 무운을 빌어.”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보이는 족족 악(惡)을 멸절시킨 강한수와 검희는 ‘마왕의 탑’ 앞에서 신혼여행을 마치고 파티에 이별을 통보했다.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북쪽으로 떠났다.

그리고 남은 용사의 파티는?

“드디어 해방인가...”

“숨 막히는 하루하루였어...”

“불면증이 사라지길...”

서로 얼싸안으며 감격했다.

그들은 마왕의 탑 주변에 세워진 마을에서 정비한 후, 주민들을 도우며 1년만 쉬고 도전하기로 했다.

1년이 2년이 되고, 2년이 3년이 되고, 3년이 5년이 되고...

원인은 간단했다.

“그녀가 입덧을 시작했어.”

“나, 아기가 생긴 것 같아.”

“공주랑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미안. 지금은 힘들어.”

마왕을 쓰러트린 후에 가정을 꾸리자는 약속을 용사 얄라딘이 가장 먼저 깨버린 탓이다.

그 뒤부터 동료들이 줄줄이 이탈하면서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영원히 미룰 순 없었다.

▷경고: 용사님! 서둘러주세요! 마왕 파르마몬의 힘이 완전히 회복되기 직전이에요! 이대로 머뭇거리다가는 아름다운 판타지아 세계의 꿈과 희망이 영영 사라지고 말아요!

용사가 안 죽어도 세계가 붕괴하는 시스템 규칙이 추가된 탓이다.

몬스터를 처치하거나 업적을 세우면 이 기간이 조금씩 연장되기에 정확한 날짜 제한은 없다.

그러나 이처럼 초읽기에 들어가면 당장 탑을 오르기 시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타락D→타락C

회귀할 때마다 영구적으로 오르는 스킬 ‘업보’처럼 부정적인 효과의 스킬 등급이 야금야금 상승한다.

타락은 오래 끌수록 강화되며, 등급이 높아지면 친구와 애인에게 배신당하고 만다.

“슬슬 가볼까.”

몇 년간 실컷 논 용사 얄라딘이 결혼한 공주들의 엉덩이를 내려놓고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묵묵히 기다려온 디스코와 쑥떡은 별 기대 안 하는 눈치.

딱 그만큼의 성적이 나왔다.

▷용사님. 모험은 즐거우셨나요?

▷진정한 용사의 길은 실로 험난합니다. 하지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은 당신을 응원해준 수많은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배우며 함께 성장한 당신은 아쉽게도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했어요. 진심으로 유감을 표합니다.

▷지금부터 성적을 알아볼까요?

볼 것도 없다.

동료들에게 버림받은 얄라딘 본인도 반쯤 포기한 상태였으니까.

10층 보스 앞까지 뚫은 건 순전히 쑥떡 덕분이고, 11층은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이건 그 결과,

▷성적표를 꼼꼼히 확인해주세요!

▷이름: 얄라딘

▷전투력: A-

▷업적: C+

▷평판: D

▷인성: B

▷기록: 10층

이건 용서가 되지 않았다.

1층에서 탈락한 지크보다는 성적이 나았지만, 노력이란 측면에선 한참 못 미쳤다.

얄라딘은 뻔뻔하게 ‘재시험’을 선택했는데, 그냥은 못 보내주겠다.

“마누라야!”

내가 대신 판결을 내릴게!

얄라딘, 너 같은 용사에게 용작두는 사치다.

업보C→업보SSS

개작두를 열어라~!

앞으로 너는 똥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

이걸로 2명째.

하지만 감찰의 중간결과는 너무나 암울해서 희망이 보이질 않았다.

이대로 실패하는 걸까?

나는 비겁한 마누라와 젖먹이 아들만이라도 지구로 탈출시키고 혼자 끌어안을 각오를 다졌다.

디스코가 웃으며 말했다.

“벌써 결과가 보이는 듯하네요. 그리고 저는 많이 봐왔습니다. 힘들어지면 물불 안 가리고 추하게 발버둥 치는 자들을.”

부정은 안 하겠다.

나는 마누라와 젖먹이만이라도 어떻게든 탈출시킬 생각을 벌써 하고 있으니까.

그걸 위한 ‘신격’의 정리였다.

준비는 끝났다.

“그래서?”

“마왕님께 선택지를 드리죠. 제 옆에서 허튼짓하지 않고 얌전히 동행하신다면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네, 맞아요. 감시입니다. 물론, 거절하셔도 불이익은 없어요. 선택은 당신의 자유.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붙잡아두겠다는 속셈이 뻔히 보였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나는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이제, 내 관심사는 무작위로 뽑힐 다음 학생으로 넘어갔다.

디스코가 말했다.

“본능에 충실한 학생만 연속으로 걸려서 저도 괴롭네요. 이번에는 교내에서 가장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학생을 고르겠어요.”

“허어...!”

지크와 얄라딘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여자에게 인기 없는 한심한 용사도 가망 없긴 마찬가지.

이건 무작위라고 할 수 없다!

정의로운 마왕님은 비열한 디스코에게 따지-

“사탄이란 분이군요.”

“가즈아-!”

남자의 인기와 능력은 연관성이 전혀 없다.

무작위 뽑기에 이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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