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화
[25회차] 용사 사탄
곧바로 3번째 학생의 감찰이 시작되진 않았다.
용사 사탄의 모험 도중에 끼어들지 않고 처음부터 동행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믿음직스러운걸?
그만큼 자주 회귀하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호오? 잡다한 신력을 싹 정리하셨군요?”
“대청소 좀 했지.”
디스코와 나는 사탄이 회귀할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대기실이라고는 해도, 마왕의 탑 100층을 화려한 응접실 겸 숙소처럼 꾸며놓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디스코는 테라스에 세워진 천체망원경으로 지상을 내려다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불쑥 말했다.
“주역인 용사들이 실망스럽긴 했지만, 이 세계 자체는 무척 마음에 드는군요. 판타지아 원주민들은 세계가 언제 멸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없이 행복하게 살아요.”
“웬 멸망?”
“당신의 상상 이상으로 세계는 쉽게 멸망합니다. 어떤 순진한 여신이 베개를 휘두르면 인과와 이치를 무시하고 소우주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죠. 우리는 이처럼 위태로운 우주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시가 참 웃기네.”
베개를 휘두른다고 소우주가 멸망한다니?
디스코가 말한 그 소우주는 종이상자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 하지만 이 농담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에 두려운 겁니다. 꼭 신이 아니더라도 자연현상에 의해서 세계는 자주 멸망합니다.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거랑 행복이 무슨 상관?”
“내가 위태위태한 절벽 위에 지어진 집에 산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지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판타지아 세계의 원주민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먼~”
나에게 도움 되는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대충 흘러들었다.
디스코에게 감시받기 시작한 나는 젖먹이 아들을 돌보는 쏘시엘의 골반을 만지며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사탄: 70층 통과. 크로마티구스는 능력치를 포기하고 순수한 기량으로 이겨야 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용이 아닌 용인 형태로 싸우도록 자존심을 긁는 겁니다.
⤷제우스: 사탄이 70층을 통과했다고? 초등교육장인가?
⤷알라: 순수한 기량? 저걸 공략이라고 올린 건가? 사탄아. 인증사진부터 올리렴. ^^
⤷루크: 사탄 선배님. 공략 게시판에 상세하게 올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오딘: 저 말을 믿는 흑우 없지?
...그는 여자에게 인기 없는 게 아니라, 전체에서 가장 인기가 없는 것 같았다.
용사 사탄은 70층 보스 빨강을 도발해서 ‘비슷한 체급’으로 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간신히 승리!
71층부터 80층까지 조심하면서 천천히 등반했다.
이러다가 100층까지 올라오는 거 아니야?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사탄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남편님, 팝콘 먹을래?”
“조금만 줘봐.”
“무슨 맛으로 줄까? 몰랑맛, 말랑맛, 물렁맛.”
“당연히 몰랑맛이지!”
몰랑맛이 진리다!
“또? 다른 맛도 좀 먹어봐.”
“됐어.”
나는 몰랑맛 팝콘을 먹으면서 사탄의 80층 도전을 지켜봤다.
80층 보스는 자기 자신.
겉모습만이 아니라 능력과 장비까지 완벽하게 똑같다. 하지만 그 주변은 아니다.
우정의 힘!
용사를 복사한 80층 보스는 다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있다.
타락한 성녀Z
타락한 마법사Z
타락한 전사Z
타락한 암살자Z
타락한 궁수Z
이들은 보스의 직속부하답게 강하기도 했지만, 역할 분담과 연계가 매우 훌륭했다.
궁수Z가 원거리에서 공격하고, 마법사Z는 중거리, 암살자Z는 은밀히 접근해서 기습하는 근거리다. 그리고 이런 파티를 전사Z가 보호하며, 성녀Z가 회복과 부활을 담당한다.
빈틈 없는 완벽한 조합!
반면에 사탄은?
“이런...”
“사탄 씨. 많이 위험한데요?”
용사 사탄의 취향을 반영해서 ‘근육질 청년’으로 변신해있는 위대한 탐험가 쑥떡이 말했다.
사탄은 엄염한 수컷.
그런데도 쑥떡이 음양의 이치를 무시하고 수컷인 이유는, 순전히 사탄이 ‘효율’을 중시한 탓이다.
“쑥떡. 내가 가짜를 쓰러트릴 때까지만 버텨줘.”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오래 안 걸릴 거야.”
“하지만 사탄 씨. 저쪽은 이미 당신이 서두르리란 걸 눈치 챈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각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니까요.”
“......”
“무운을 빕니다.”
*
⤷사탄: 80층 정보를 공유합니다. 80층 보스는 자신의 클론입니다. 그리고 이런 보스를 굉장히 균형 잘 잡힌 6인 파티가 보조합니다.
⤷알라: 거짓말하지 마라. 깨라고 만든 보스 난이도가 아니잖아.
⤷제우스: 소설 쓰는 실력이 나날이 발전하네.
⤷오딘: 옛다, 관심!
⤷이시스: 선배님. 그래서 80층 보스는 쓰러트리셨나요?
“용사님. 실례지만, 제 설명을 듣고 계신가요?”
“네. 마왕 파르마몬이 완전히 부활하기 전에 막아달라는 것이지요.”
“조그마한 마법 도구를 만지작거리고 계셔서 걱정했는데, 경청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신성제국의 제1 황녀... 용사님?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신 거 맞지요?”
“듣고 있습니다.”
80층 돌파에 실패한 용사 사탄은 회귀하여 판타지아 중앙대륙의 신성제국에서 재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움직였다.
황녀에게 양해를 구한 후, 신성제국 수도를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업보D→업보C
비겁한 마누라가 4차 교육과정 때부터 도입했던 흉악한 스킬.
회귀해도 사라지지 않고 달라붙는 스킬이 평판, 친밀도, 설득력, 명성 등에서 전반적으로 악영향을 끼친 탓이다.
“용사님. 멈추세요.”
“...약간 더 신경을 쓰게되겠군. 황녀님. 저는 제국을 떠나려던 게 아니었습니다. 제국의 미래를 알기에 미리 대책을 마련하려던 겁니다.”
“미래를 안다고요...?”
“예. 믿기지 않으실 테니, 곧 찾아올 제국의 미래를 조금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아앗.”
용사 사탄은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점을 활용했다.
다른 용사들은 바보라서 이 좋은 방법을 쓰지 못한 걸까?
그렇지 않다.
▷종족: 인피니티 휴먼
▷레벨: 9999+
▷직업: 용사(경험치 500%)
▷스킬: 조화G 신성ZZZ
마기ZZZ 정령ZZ
날조ZZ 체력ZZ 면역Z
민첩Z 선동Z 회복Z
감정Z 평판Z 호감Z
영감Z 행운Z
지혜MAX…
▷상태: 성물, 축복
스킬의 숫자는 적었지만, 절대 약하다고 할 수 없었다.
용사 사탄은 G등급 신의 영역에 도달한 스킬 ‘조화’를 바탕으로 ZZZ등급 신성과 마기를 조화롭게 운영하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스킬 ‘혼돈’으로 비슷한 효과를 냈지만, 안전성이란 측면에선 사탄의 ‘조화’가 훨씬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선동과 날조 스킬까지!
균형이 잘 잡혀있군.
“사탄 학생에게 자연스럽게 합류할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그거라면 내 마누라가 알아서 잘 해줄 거야.”
“좋아요. 믿고 기다려보죠.”
“...너무 믿진 마.”
용사 사탄은 여러 보조계열 스킬을 활용해서 ‘업보’를 상쇄하고, 더 나아가서 황녀와 신성제국을 설득했다.
그러고는 유유히 수도를 빠져나와서 자율행동을 시작했다.
물론, 대책 없이 무턱대고 돌아다니는 건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외친다.
“위대한 탐험가 쑥떡! 지고한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어하는 존재여! 나의 모험을 도와준다면, 나 또한 그대가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지나칠 수 없는 솔깃한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쑥떡. 이렇게 빨리 모습을 보였다는 건, 승낙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네. 하지만 조금 당혹스럽네요. 저는 아직 사탄 님에 대해서 아는 게 매우 적은데, 당신은 저를 잘 알고 있으니...”
“저는 쑥떡과 함께 싸우다가 마왕의 탑 80층에서 패배했습니다.”
“80층! 아깝게 되셨군요.”
나의 양아들 쑥떡이 능청스럽게 말을 받았다.
회귀할 때마다 쑥떡의 기억은 사라지지만, 녀석은 몰랑폰을 통해서 용사들의 최신정보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연히 이 사실은 비밀.
쑥떡을 ‘용사의 도우미’쯤으로 생각하는 용사들은 모른다.
“저는 수많은 동료를 모아서 마왕의 탑에 도전했습니다. 그들을 희생시키며 80층까지 올라가는 건 좋았지만, 사망자를 최소로 줄여야만 80층을 뚫을 수 있음을 지난 회차에서 알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사탄 용사님은 자신만이 아니라 동료들도 더욱 성장시켜서 도전하실 생각이군요?”
“정확합니다.”
사탄은 쑥떡을 상대로 술술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의 능숙한 계획 구상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래! 이게 용사지!
지크와 얄라딘 때문에 상처 받은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다.
“정말 우수한 용사네요. 이미 80층까지 올라간 전적도 있고.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그가 판타지아 교육장 전체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기록 중인 거로 아는데요. 맞나요?”
“아마도? 나는 기둥서방이라서 잘 모르니, 마누라에게 물어봐.”
“됐어요. 일단은 그의 파티에 합류부터 해보죠”
우연을 가장해서 만나는 방법을 쓸 줄 알았는데, 쏘시엘은 우리에게 다른 수단을 제시했다.
신탁.
전반적으로 허술해서 파고들 빈틈이 많았던 다른 용사들이랑 달리, 그에게 의심 안 받고 접근할 방법이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거의 ‘협조’를 요청하는 모양새로 사탄에게 신탁을 내렸다.
“처음 겪는 전개인데...”
“신기한 일은 아닙니다. 이전 회차를 기억하는 여신님께서 당신의 성적을 높게 평가한 겁니다. 신탁의 내용을 떠올려보세요.”
“당신의 회귀를 아는 유별난 동료들을 맞이하게 되리라...”
“여신님께서 만남의 장소와 시간까지 알려주시진 않았지만, 적당한 때가 되면 그쪽에서 먼저 찾아온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 추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용사 사탄은 별 의심 없이 쑥떡의 설명을 수긍했다.
80층의 주제는 동료.
동료가 부족해서 실패했다고 판단한 여신이 우수한 동료들을 파견하는 편법을 쓴 것이다.
...라고 사탄은 수긍했다.
“우수하군.”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감찰하며 상처받은 제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이네요.”
“동의.”
디스코랑 의견이 일치한 점은 마음에 안 들지만,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애써 부정하진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사탄 학생이 우리의 존재를 수긍한 듯하니, 염탐은 그만두고 빠르게 합류하도록 하지요.”
“편할대로.”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어딘가에 좀 가만히 있어주면 좋겠는데, 사탄은 우리랑 숨바꼭질하듯 쉴 틈 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신성제국 수도의 마탑에서 공간이동 마법진을 활용, 중앙대륙 동부의 상인공화국 항구D까지 빠른 속도로 이용했다.
이러는 이유는?
한 동료를 고용하기 위함이었다.
남대륙으로 떠나는 배를 타기 위해 선착장에서 대기 중인 한 남자.
용사 사탄은 다짜고짜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강한수 씨.”
“...나를 알아?”
“압니다. 당신의 미래까지도. 이런 저랑 거래하시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바람을 이루어드리겠습니다. 제가 거짓말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척추를 베셔도 좋습니다.”
“후배님께서 재미난 제안을 하시네. 좋아. 일단은 들어볼까?”
보통은 강한수가 여행 도중에 우연히 마주친 ‘후배’를 찾아가서 모험을 도와준다.
물론, 정말로 우연인 건 아니다.
나랑 함께 모험하고 싶은 쑥떡이 만남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은 그 반대.
그가 먼저 강한수를 찾아내어 합류를 권하는 방식을 취했다.
“강한수 씨.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하하! 틀렸어. 내 바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야.”
“당신이 고향에 돌아가려는 이유는 그곳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제법이네.”
“이전의 당신은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혹시라도 회귀해서 또 자신을 만나게 된다면 좀 더 빨리 꿈을 이루게 해달라고.”
“너, 이름이 뭐지?”
“사탄입니다. 낙후된 고향의 부흥을 꿈꾸는 인간이지요.”
“...좋아. 믿어보지. 내가 고향을 잊을 만큼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게 해줄지를. 아! 혹시, 그 여자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아직은 비밀입니다. 미리 알게 되면 미래가 틀어집니다.”
“하! 짜증나는 용사일세!”
“제가 원래 좀 그렇습니다.”
...큰일인걸.
이러다가 강한수와 검희의 신혼여행을 손가락 빨면서 구경하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디스코가 그런 내게 말했다.
“아담. 또 그를 놓치기 전에 우리도 얼른 합류하도록 할까요?”
“아담?”
“가명입니다. 파르마몬이라고 소개할 순 없잖아요? 저는 이브. 당신이랑 이란성쌍둥이란 설정입니다. 이의 있나요?”
“...아니. 마음대로 해.”
아담과 이브.
원죄를 짓는 최초의 커플이다.
내 신격 ‘원죄’랑 너무 들어맞아서 우연으로 치부하기 힘들었지만, 말을 걸어서 괜한 부스럼을 만들기 싫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지금, 이름이 중요한가?
강한수와 검희가 얼레리꼴레리 하는 광경을 보며 생활하게 생겼다.
...힘든 싸움이 예상되는걸.
“아담. 머뭇거리지 말고 얼른 따라오세요. 용사의 정석을 보게 될 것 같아서 벌써 기대되네요.”
“불길한 소리는 작작 해라.”
막연하게 잘 될 거란 헛된 기대를 품으면, 배신 당하는 게 이 업계의 상식이니까.
그나저나...
용사 사탄이 여자들에게 인기 없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흥미롭네요.”
“전혀.”
누추한 남매로 입을 맞춘 우리는 현직 용사님께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