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25회차] 재평가
“신탁의 동료분들이군요. 천군만마(千軍輓馬)를 얻은 기분입니다. 저는 용사 사탄. 마왕 파르마몬을 쓰러트리고 고향을 부흥시키기 위해 싸우는 자입니다.”
“아담.”
“이브예요.”
우리는 길게 소개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트집으로 불이익을 당할지 알 수 없기에 말을 아꼈고, 디스코는 감찰을 보는 자로서 공정성을 위해 간섭을 최소로 했다.
지나치게 짧은 자기소개에 기분이 나빠질 법도 하지만, 용사 사탄은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우리를 환대했다.
“저는 마왕의 탑 80층을 극복하기 위해 중앙대륙을 시작으로 모든 대륙을 순회하며 든든한 동료를 모집할 예정입니다. 얼마나 걸릴지는 저도 솔직히 모릅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시길.”
대략적인 일정 설명을 끝낸 용사 사탄은 성왕국으로 향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성녀A.
성검을 가져와야만 움직이는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사탄은 상인공화국에서 합류한 강한수에게 부탁했다.
“성검 뉴클리온을.”
“...혼돈으로 파괴된 망각의 별에서 탄생한 마지막 검이여. 공허한 사랑과 우정을 베어버릴 꿈과 희망이여. 그 거룩하고도 거룩한 이름을 기억하는 계승자가 이렇게 찬미하노니, 태초부터 내려온 맹약에 따라 그 전설을 입증하라. 성검 뉴클리온.”
원래는 시련을 통과하고 성검을 구해야 하지만, 사탄은 강한수를 고용해서 간단히 해결했다.
성녀A도 당황했다.
“이, 이건 대체...?”
“성녀님. 성검입니다. 약속을 지키시겠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탄 님이 아닌 강한수 님을 따른다는 것을 명심해주세요.”
“알고 있습니다.”
“......”
사탄의 태연한 대답에 불편해진 성녀A는 눈살을 살포시 찌푸렸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성검의 용사를 따를 뿐.
“제법이네.”
“과찬이십니다, 선배님.”
“경력 20년짜리 용사에게 선배는 무슨.”
“아닙니다. 먼저 입학한 게 훈장은 아니지요. 저보다 빨리 마왕을 쓰러트리신 분이란 게 중요하지요. 하물며 고작 20년 만에 졸업하셨으니, 더욱 당신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한수 선배님.”
“거참...”
혀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잘 굴러가는 사탄의 아부에 넘어간 강한수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같은 나로서 부끄럽군!
그런 식으로 강한수를 통제하는 데 성공한 사탄의 다음 행보는 정석처럼 효율적이었다.
성녀A가 파티에 합류하면 토마토 성기사단장은 기본 옵션이다.
단번에 유력한 2명 확보.
보통은 안 되지만, 성녀A를 먼저 고용하여 시련의 수준을 대폭 낮춘 용사 사탄은 무난하게 성검1을 획득했다.
병아리가 닭을 낳는다고 할까!
제법이다.
“지크와 얄라딘 학생의 몰랑폰 커뮤니티를 훔쳐보면서 짐작하긴 했지만, 용사 사탄은 정말 유능하군요. 여자들에게 이토록 인기 없을 줄은 미처 몰랐지만.”
“세상일이 다 그런 거지.”
“하지만 정말 예상 밖이었습니다. 고향별에 있는 아내를 잊지 않고 정조(貞操)를 지킬 줄은...”
“용사라면 당연한 거야.”
나도 이 부분에선 자유롭다고 할 수 없지만, 납치되기 전에 미래를 약속한 여자가 있었다면 나도 지금까지 동정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 발언에 관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많아 보이지만,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지요.”
“지금까지의 평가는?”
“용사 사탄만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현재까지 S학점입니다. 모든 학생이 그의 절반만 됐어도 교육 문제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하네.”
“굉장히 모욕적인 발언이네요. 몰랑소프트는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기업사냥꾼이 아닙니다. 판타지아 교육장이 정상적으로 운영된다고 판단되면 이전보다 간섭량을 줄이고 더욱 투자할 의향이 있습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용사 사탄은 굴비를 엮듯이 성녀A를 시작으로 토마토 성기사, 인어공주 아쿠아를 간단히 고용했다.
그리고 가출선배의 후예인 용자A, 용자B가 추가로 합류했다.
이 방식은 북대륙으로 넘어간 후에도 계속됐다.
“나는 모험할 마음이...”
“서대륙의 현자 섹스피어가 더 우수하다는 뜻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용사 사탄!”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실력이 안 돼서 용사의 모험에 끼지 못했다고...”
“간다! 가면 되잖아!”
“북대륙의 현자다운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아... 이런.”
용사 사탄이 자존심을 살살 긁자마자 바로 넘어온 현자.
그는 디스코의 허벅지를 볼 때마다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긴 했지만, 마법만은 확실했다.
현자 다음은?
“물러나세요, 용사님. 저에게 다가오시면 다치실 거예요.”
“설산에 갇히신 얼음공주님. 힘의 폭주를 제어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방법이 있을 리... 헛! 설마, 그 지팡이는-?!”
“맞습니다. 현자의 지팡이. 공주님께서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빌려주실 겁니다.”
“아아...!”
설산M의 꼭대기에 사는 얼음공주가 사탄의 파티에 합류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Yaoooo-!”
얼음공주의 힘을 폭주시키던 원흉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고양이처럼 생긴 거인.
내 1회차와 2회차 때까지만 해도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현재는 수많은 용사가 정보를 공유하면서 공략법까지 싹 공개된 상태다.
분명 그럴진대...
“여러분. 지금부터 타락한 고대의 야수왕을 제압하겠습니다. 토벌이 아닌 포획입니다!”
“Yaooo!”
“얼음공주님은 전투에 합류하지 말고 정신을 집중해주십시오. 저 야수왕을 당신의 영혼 안에 역으로 가두는 겁니다. 죽음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녀님도 우리는 신경 쓰지 마시고 공주님만 봐주십시오. 그녀는 지금부터 7번 죽을 겁니다. 당황하지 말고 신속하게 부활시켜주세요.”
“Yaooo~?!”
체급에서 압도적인 고양이 거인을 생포하는 건 대단히 힘들었다.
하지만 사탄을 중심으로 뭉친 비열한 우정의 힘 앞에 끝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슈우우웅-!
제압된 녀석의 ‘혼돈의 힘’은 얼음공주의 영혼 안에 갇히면서, 힘만 착취당하는 배터리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얼음공주는 정말 뜬금없이 100배 강해지는 공짜 호사를 누리게 됐다.
사탄을 바라보는 얼음공주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용사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감사드려야 좋을지...”
“힘을 빌려주십시오.”
“물론이에요. 원하신다면 이 몸을 당신께 드리...”
“힘만 빌려주시면 됩니다.”
“네? 네.”
강화된 얼음공주의 유혹을 단칼에 뿌리친 사탄의 다음 목적지는 성검3가 봉인된 연못이었다.
성검3랑 온종일 수다를 떠는 민물인어가 말했다.
“용사님. 환영합니다. 저는 성검 몰랑로드를 수호하는 자. 연못 밖으로 절 끌어낸다면 당신께 성검을 내드리겠습니다. 노파심에 미리 충고하자면, 야만적인 폭력으로는 절대 성검을 얻지 못합니다.”
“압니다.”
“그러면 노래로 저를 감탄시키...”
“얼음공주님. 이 연못을 차갑게 얼려주십시오.”
“호호! 제법 머리를 굴리셨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연못은 평범한 물웅덩이가 아닙니... 어? 어라라?!”
“수호자여. 이 연못이 평범하지 않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건 제 동료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수왕의 힘을 계승했거든요.”
“그런 터무니없는...!”
사르르-
민물인어는 연못이 완전히 얼어버리기 전에 항복했다. 그리고 성검3를 사탄에게 순순히 넘겼다.
성검 몰랑로드.
용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선대 용사의 영혼이 깃들어있다.
내게는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안 그랬던 모양이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셀레브래스. 그래, 나는 너를 알아. 숭고한 정신의 친구여. 이번에도 내게 지혜를 빌려줘. 하하! 정말 고마워! 하지만 반복된 설명은 사절이야. 그 부분부터 함께 맞춰가자고.”
성검3를 쥔 사탄은 눈에 안 보이는 유령이랑 대화하듯 끊임없이 혼잣말했다.
제삼자가 보면 정신병자처럼 보였지만, 본인은 그 시선들이 익숙한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음은 공작Q의 영지였다.
목적은 검희.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사탄의 권유로 토너먼트에 참가한 강한수는 무난하게 우승하고 검희랑 약혼했다. 하지만 신혼여행을 떠나진 않았다.
그 대신,
“안녕하세요. 파티를 떠난 강한수 대신에 합류하게 된 크리스 포스 큐라레입니다. 모험의 마지막까지 잘 부탁합니다.”
부부생활에 방해되는 아들을 자연스럽게 내보냈다.
이 또한 사탄의 작품.
강한수와 검희 커플이 큰 도움이 되리란 건 틀림없지만, 이들은 마왕의 탑을 오르지 않고 매정하게 이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은 만만한 카리스를 걸고넘어진 것이다.
모친을 빼앗기기 싫어서 강한수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한 녀석은 ‘나를 따라오면 강해질 수 있다.’는 사탄의 사탕발림에 홀딱 넘어갔다.
틀린 말도 아니고.
“이게 발상의 전환이란 건가...”
“훌륭하군요.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도 저만큼 적응할 수 있을지 궁금하지만, 현재까지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충분한 인재입니다.”
지크와 얄라딘 때는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디스코가 사탄에게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검은 총 3자루.
하지만 성검 뉴클리온의 소유자인 용사 강한수가 빠짐으로써 다시 2자루로 줄어들었다.
사탄은 그 뒤에 몰랑교 총본산에 들려서 성검3를 빌미로 성녀C를 간단히 영입했다.
바로 문제가 터졌다.
“용사님. 성녀는 한 명만 선택해주세요.”
“맞아요, 사탄 님. 함께할 수 있는 성녀는 단 한 명뿐.”
성녀A와 성녀C가 용사 사탄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말하는 모양새는 ‘나와 이 여자 중에서 누가 더 좋아?’라고 남자친구에게 따지는 것 같았다.
그러자 사탄은,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다음 날에도,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며칠 뒤에도,
“선택하기가 쉽지 않군요.”
또, 또, 또...
질질 끌면서 두 성녀를 전부 끌고 다녔다.
그러면서 ‘성녀가 둘인 것도 나쁘지 않네?’라는 분위기가 파티 내에 자연스럽게 퍼질 때쯤 말했다.
“결정했습니다. 저는 성검 몰랑로드의 주인. 몰랑로드에 깃든 용사 셀레브래스는 오토마니아의 주인. 성검의 용사가 둘입니다. 네, 그 짐작이 맞습니다. 두 성녀님 모두 동행해주십시오. 이의 있습니까?”
“...아니요.”
“으음. 없어요.”
두 성녀는 석연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동료들까지 가세하자 마지못해 승낙했다.
성녀가 하나인 거랑 둘인 거랑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한 명일 경우, 성녀가 당해버리면 그 뒤부터는 사망자가 속출한다. 남은 부활시킬 수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부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녀가 둘이면?
정말 예기치 않은 사고나 실수로 성녀가 당해버리더라도 부활시켜서 파티를 재정비할 수 있다.
...훌륭하군.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생활기록부에도 잘 적혀있다.
▷종류: 생활기록부
▷이름: 사탄
▷성향: 중(中)
▷속성: 중용
▷경력: 2019년
▷기록: 43
▷총평: 꿈과 희망을 품지 않는 염세적인 현실주의자 학생.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동료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하고 매번 마찰을 일으켜서 파티가 해산, 마왕을 쓰러트리지 못하고 모험에 실패했다. 그러나 어떤 학생으로 인해, 사탄 학생의 이러한 성향이 재평가되면서 교육방침을 재검토하는 중이다.
교직원들의 편파판정과 박해를 꿋꿋이 견딘 용사 사탄은 마침내 빛을 보게 되었다.
현자, 얼음공주, 성녀C, 카리스, 군신, 용자C, 용자D...
사탄은 북대륙에서 수많은 영웅호걸을 영입했다. 남녀를 차별하지 않고 뽑으면서 인원도 2배.
이런 사탄이 동료들이랑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웃기지도 않는다.
“사탄 학생의 능력에는 할 말이 없네요. 이렇게 우수한 학생이 여태 졸업하지 못하다니... 그 같은 학생이 교육장에 많았으면 좋겠네요.”
“뭐...”
꼼꼼하게 잘 찾아보면 한둘쯤 더 있지 않을까?
용사 사탄은 이 기세로 나머지 대륙들도 돌아다니면서 동료들을 박박 긁어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 때가 됐습니다! 위선적인 천사들이 사는 공중요새 엘몰랑도를 점령할 때가...!”
“사탄! 사탄! 사탄!”
“와아아아!”
“사탄! 사탄 만세!”
용사 사탄 일행은 마왕의 탑이 아닌, 두 번째 천사 바나나엘의 영토를 침공했다.
쾅!
파앙!
치열한 대접전이 벌어졌다.
바나나엘은 강했지만, 혼자 힘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셋째 감자엘은 타락하여 마왕의 탑에 있고, 둘째인 우유엘은... 어디에 있지?
아무튼, 우수한 용사 사탄은 우정의 힘으로 바나나엘을 무찌르고 동료들의 장비를 대폭 강화했다.
호화찬란하구먼!
엘몰랑도 중심부에 우뚝 선 용사 사탄이 성검3를 높이 치켜들며 호기롭게 외쳤다.
“마왕의 탑으로!”
길었던 19년 여정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웰컴 투 마왕골(魔王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