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68화 (368/430)

 368화

[25회차] 90층

“제 고향은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매우 낙후되어 있습니다. 그곳이랑 비교하면 판타지아 대륙은 정말 살기 좋은 곳입니다.”

“이 세계보다 심하다고?”

사랑과 우정의 힘으로 강자, 약자 가리지 않고 죽이는 이 부조리한 세계보다 살기 어렵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판타지아 세계는 글러먹었다.

강자는 강자라서 핍박하고, 약자는 약자라서 핍박한다.

대체 어쩌라는 거야?

그런데 이런 세계보다 살기 어려운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까.

사탄이 염세적인 미소를 지었다.

“하하... 제 고향은 어리석은 신에 의해 망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찬양하는 어린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줬지요. 그들의 자손도, 자손의 자손까지도... 그 결과, 천국이라고 불렸던 고향별은 인구가 끊임없이 증가하면서 발 디딜 땅이 없는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실감이 잘 안 되는데.”

“늙지도 죽지도 않는 혈기왕성한 남녀가 뭘 하겠습니까? 매년 약 20%씩 증가한 인구는 수십 년 만에 행성을 죽여버렸습니다. 인간들이 토해내는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로 하늘이 오염되고, 서식지를 빼앗긴 동식물들이 멸종하면서 자연의 먹이사슬이 붕괴했습니다. 범죄자들에게 사형이 통하지 않는 탓에 법이 유명무실해지면서 국가들이 붕괴하고, 그때부터 산아제한이 풀리면서 출산율이 미친 듯이 치솟고...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세계의 인구가 8000조쯤 했었으니... 200년이 흐른 현재는 고향별이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헤에~”

뭔 인구가 세균만큼 많다냐.

인간이 바글바글한 행성이 어떤 모습일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법치국가가 붕괴했다는 시점에서 좋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저는 고향별로 돌아가서 천국이란 이름의 지옥을 선사한 신(神)을 쓰러트릴 겁니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못 이기기에 동료를 모집하는 중입니다. 보시다시피 뜻대로 안 풀립니다만...”

“그렇군.”

고향을 구하겠다는 마음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는 신.

신격을 가지지 못한 자가 숭고한 신념과 노력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큰 변수가 없다면 필패하겠지.

하지만 그런 잔혹한 진실을 말해줄 순 없었다.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이브 님도 듣고 계셨습니까?”

“어머!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그래도 이왕 말한 김에 살짝만 참견해도 될까요?”

“아시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요.”

“불멸의 영혼을 행성 규모로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신(神)이라면, 6등성(等星) 이상... 음. 판타지아의 창조신이랑 엇비슷하거나 살짝 아래라고 보시면 돼요.”

“...고향별의 신을 처치하기 불가능하다는 뜻입니까.”

“아니요. 방법은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 용사님이 생각하시는 현재 방법은 어렵지요. 신에게 대적하려면 스스로 신의 반열에 오르거나, 그 신보다 고위의 신에게 힘을 빌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참고하겠습니다.”

“후후후...”

아무래도 이 여자는 우등생 사탄이 졸업하면 바로 ‘사도’로 임명해서 몰랑소프트로 끌어들일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영입은 벌써 시작됐다.

벌써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파멸】

“이건...?”

“당신이 찾는 동료들보다 훨씬 도움이 되는 힘입니다.”

“......”

“판타지아 대륙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악마의 유혹처럼 들리겠지요. 천천히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아담 님. 당신도 이브 님처럼 신입니까?”

갑자기 내게 화살이 날아왔다.

나는 원인을 제공한 디스코를 슬쩍 노려본 후에 답했다.

“아니.”

이 몸뚱이는 ‘신’이 아니다.

진짜 나는, 젖먹이 아들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는 마누라를 무릎에 앉힌 채 가만히 대기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나라고 단정하듯 말할 순 없다.

판타지아 차원.

이 전부가 ‘나’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조언은 해줄 수 있지. 이 우주에 신(神)은 많아. 여러 신을 만나보고 결정해.”

“하지만 만날 방법이...”

“아주 가까이에 하나 있잖아?”

나는 손끝으로 능청스럽게 탑의 천장을 가리켰다.

“아!”

“그리고 잊지 마. 너는 이미 신의 힘을 쓰고 있어. 신성, 마기. 애초에 말이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하는 능력치가 어디서 비롯됐다고 생각해?”

“...아담 님.”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하시는 모습은 19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킁.”

디스코가 아직 졸업하지도 않은 학생을 빼가려고 해서 살짝 견제한 것뿐이다.

비열한 감찰관 같으니!

사탄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담 님이 빈둥빈둥 놀면서 자리만 축낸다는 동료들의 불만으로 곤란했던 적이 많았는데, 이렇게 마지막에 보답받는군요. 시간을 아무리 들여도 못 구할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면 힘내라.”

“물론입니다.”

용사 사탄의 파티는 탑의 중간지점인 50층에서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60층으로 진격했다.

60층 보스는?

네 번째 천사 감자엘.

하지만 사기적인 종족특성은 두 번째까지만 적용되기에 그는 평범한 닭대가리였다.

심지어,

“동생아아~!”

“형니임~!”

용사 사탄에게 투항한 ‘두 번째 천사 바나나엘’이 동생 감자엘을 설득했다.

...어이없게도 효과가 있었다.

바나나엘에게 세례(洗禮)받고 ‘타락한 천사’란 호칭을 걷어낸 60층 보스 감자엘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투항했다.

그리고 사탄의 파티 ‘미드필더’에 정식으로 편입했다.

이것으로 총원 81명.

용사 사탄과 조언자 아담, 그리고 79명의 잡것은 70층으로 진격했다!

*

“마침내 여기까지 왔구나, 선택받은 용사여! 짐이야말로 모든 마(魔)의 정점! 이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일 마왕 페도나르다!”

“내 이름은 사탄. 그대를 쓰러트릴 용사다.”

“하하! 용사여. 승리를 갈망하는 눈빛이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좋다! 인류의 도전을 받아주마! 그런데 용사여. 어째서 혼자지? 등을 맡길 동료들은?”

“나, 혼자서 충분하니까.”

“허! 참으로 오만하구나! 용사 사탄이여! 그 오만함을 끌어안고 짐의 손에 죽어라!”

“간다! 가짜 마왕이여!”

용사 사탄은 무리수를 던졌다.

동료들의 전력을 온전히 보전한 채 80층에 도전하기 위해 1대1을 시도했다.

상대는 나의 장인어른.

당연히 생활기록부로 만들어진 가짜로, 자기가 여전히 마왕인 줄 착각하고 있다.

그래도 그 강함은 진짜다.

초등교육과정과 중등교육과정의 장인어른은 어떨지 모르지만, 고등교육과정의 마왕 페도나르는 숨겨둔 새로운 힘 ‘암흑물질’까지 써댔다.

그러나...

“쿨럭! 용사 사탄이여. 그 강대한 힘은 어디서 나온 거지?”

“신(神)을 향한 분노다!”

“그렇군. 최강이라고 자부해온 나는 복수심에 패배한 것인가? 실로 훌륭한 싸움이었다...”

털썩.

70층 보스 장인어른이 쓰러졌다.

용사 사탄도 아주 무사하진 못했지만, 살았다는 게 중요하다.

마왕의 탑에서는 한 번이라도 죽으면 그걸로 끝이지만, 팔다리가 잘린 정도는 성녀의 힘으로 완전히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여주십시오!”

“용사님! 어서 치유를...!”

“이게 더 중요합니다!”

⤷사탄: 70층 보스 페도나르 돌파 인증사진입니다. 보시다시피 60층 보스 감자엘을 동료로 영입해서 80명으로 전력이 늘었습니다.

⤷지크: ;;;;;;

⤷오딘: 사탄 씨. 정말 진지하게 묻는 건데. 교장의 손자이심?

⤷제우스: 와... 저게 현실적으로 가능함?

⤷알라: 관종아. 커뮤니티 물 흐리지 말고 얼른 졸업해라.

⤷이시스: 사탄 오빠. 여자친구 혹시 있으세요?

⤷루크: 사탄 형님! 공략법 좀 부탁합니다! 저도 졸업하고 싶어요.

나는 사탄을 위해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

몰랑폰 서버를 관리하는 대현자 섹스피어에게 지시해서 ‘몰랑폰의 모든 이미지는 합성 불가.’라고 공지를 올린 것이다.

그 효과는 확실했다.

“휴우...”

사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푸념이 아닌 안도의 한숨이었다.

하지만 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인명피해 없이 70층까지 격파했다는 업적을 세우긴 했지만, 층수만 따지면 이전 회차에서 이미 세운 기록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힘은 볼 때마다 놀랍군.”

“구-마왕 페도나르를 단신으로...”

“용사님! 대단하십니다!”

“끝이 정말 얼마 안 남았군요.”

몰랑폰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곁에서 함께하는 80명의 동료도 용사 사탄의 업적을 찬양했다.

그는 겸손하게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다.

자신이랑 싸워야 하는 80층.

그뿐이라면 어떻게든 했겠지만, 복제된 용사 클론의 곁에는 우수한 6인 파티가 있다.

그렇기에 사탄은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았다. 80층에 동료를 전부 때려박을 마음도 없는 듯했다.

목표는 100층!

졸업을 꿈꾼다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최고기록인 80층만을 넘어서서 90층까지 현재 전력을 온전히 보전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아담은 어떻게 보시죠?”

“뭘?”

“용사 사탄이 최초로 100층에 도달할 것 같나요?”

디스코는 사탄이 정말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모르지.”

하지만 슬슬 퇴장할 준비를 했다.

동료인 줄 알았던 자가 사실은 최종보스였다!

...라는 전개도 나쁘지 않지만, 몰랑폰에 소문이라도 나버리면 수습하기 번거롭다.

길잡이 아담은 전투 중에 죽고 마왕 파르마몬으로, 100층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다.

그리고 마침내,

“80층에서는 저를 복사한 가짜 용사를 포함한 6인 파티를 상대하게 됩니다. 그들은 성녀, 마법사, 전사, 암살자, 궁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 클론은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의 실력이 매우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그 10배가 넘는 대인원. 분명히 이길 겁니다. 하지만 피해가 크면 90층에서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철저하게 준비한 후, 80층을 도전할 겁니다.”

“그러지.”

“이해했습니다.”

“말씀을 따를게요.”

“네, 용사님.”

용사 사탄의 진정한 강점은 전투력이 아니다.

그는 지난 19년 동안, 평균 100명의 대인원을 관리해냈다.

개성과 주관이 강한 문제아들을 집결시키고, 질투와 견제 등을 제어해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것만은 나도 그에게 존경심을 느낄 정도다.

아! 전투가 시작됐군.

“너무 많잖아!?”

이전 회차에선 기세등등했던 가짜 사탄이 절규했다.

나도 이해해.

5 vs 80

만만한 오합지졸들을 상대하는 게 아니니까.

사탄이 19년 동안 모은 80인이 군대처럼 진형을 짜고, 체계적으로 5인을 압박했다.

“꺄앗~?!”

“컥!”

“아아악!”

정말 순식간에 끝났다.

이전 회차에서 사탄이 고전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싸움이 되질 않았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가짜 사탄은 80인의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다. 반면에 진짜 사탄은 5인의 전투능력을 이전 회차에서 파악해둔 상태다.

전력, 정보의 우위!

그리고 사탄이 가짜를 데리고 구석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5인은 전술을 세울 틈이 없었다.

곧 결론이 났다.

사탄 vs 사탄+80인

80층 보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웠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너의 승리다.”

“좋은 공부가 되었다.”

댕강-

가짜 사탄의 목이 떨어졌다.

그걸로 80층도 돌파!

부상자는 조금 나왔지만, 사망자는 여전히 없었다.

“거참...”

내가 봐도 기가 막힌다.

정말로 인명피해 하나 없이 80층마저 돌파할 줄이야!

그리고 90층.

여기서부터 미지의 영역이었다.

지금까지 층마다 멈춰서 꼼꼼하게 브리핑하던 사탄은 ‘우정의 힘’만 강조했다.

아는 게 없으니까.

눈앞의 90층 출입문을 열기 전까지는 보스의 정체조차 모른다.

“갑니다.”

끼익-

용사 사탄을 선두로 81명이 완전무장한 채 진입했다.

텅텅 빈 넓은 공터.

90층에는, 위층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 앞에 보스로 짐작되는 한 남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누구...?”

“실화냐...”

“설마...”

새하얀 수세식 변기 위에 앉아있던 90층 보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말했다.

“이 위로 올라가고 싶으면 척추만 놓고 가. 참 쉽지?”

마왕이 되기 직전의 ‘나’가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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