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25회차] Ģŕeeeee!
“어떻게...?”
“변신! 남자의 로망이지. 하지만 처음부터 해버리면 재미없잖아? 그렇다고 오해하진 마. 방심하는 취미가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가짜라서 죽어도 상관없거든. 그래서 대충 즐기면서 싸우는 거야.”
“대충인가... 괴물.”
“선배님께 괴물은 실례잖아. 하지만 사탄 후배. 너에게는 정말 감탄하고 있어. 소모전으로 가다가 끝날 줄 알았는데, 그 짧은 사이에 나를 공략할 방법을 고안해내다니... 다음 회차에선 쓰러질지도 모르겠는걸?”
“모르는 게 없군.”
“나도 용사였으니까. 흠. 기억이 누적된다면 영원히 패배하지 않을 자신 있는데. 그건 좀 아쉽네.”
“아니. 다음은 없다. 위대한 고대의 용사여. 너는 분명 강하지만, 이번에 패배할 것이다.”
용사 사탄이 선언했다.
그 유치한 도발에 강한수는 발끈하지 않았다.
정의로운 MAX급 용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을 뿐!
“손발 다 잘린 나를 상대로 쩔쩔매면서 큰 소리는.”
스르륵.
성검에 잘린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다시금 돋아났다.
하지만 가시는 없었다. 대신에 칠흑색 비늘이 빼곡하게 덮이면서 견고함을 더했다.
“사탄! 꾸물대지 마라!”
용왕의 머리에서 뛰어내린 천마가 낙하하며 외쳤다.
강한수는 피식 웃었다.
“칼질은 질렸어.”
“뭣-?”
“지금부터 판타지 스타일로 상대해주지.”
...중2병 같은 대사는 참아줘.
마누라의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내 심정을 모르는 강한수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몰랑~
암흑물질이 공간을 흔들었다.
멀쩡한 공간을 납작하게 접어버리는 신격 ‘암흑’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흥! 이 정도는...”
여유를 담아서 코웃음 치던 천마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팅-
강한수의 피부를 덮은 칠흑빛 비늘을 성검이 베지 못한 까닭이다.
반면에,
푹! 푹! 푹! 푹!
천마의 지고한 검술과 성검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접근한 강한수의 날개가 안드로이드의 단단한 몸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이게 판타지다. 아무리 뛰어난 검술이 있어도 피해를 줄 수 없다면 의미가 없지.”
“허허... 검에 본좌의 일생을 바쳤거늘. 판타지... 증오스럽구나...”
콰앙-!
허탈한 웃음을 터트린 천마의 몸이 기계답게 폭발했다.
“천마...!”
한 박자 늦게 도달한 사탄이 성검을 수직으로 휘둘렀다.
“느려.”
캉-
천마를 부수고 얻은 성검1과 성검3을 양손에 쥔 강한수가 대수롭지 않게 휘둘렀다.
쌍검술?
극에 달한 초고수의 기술과 경험이 머릿속에 한가득 들어있다.
게다가 ‘천마’의 검술마저도 완벽하게 흡수한 상태.
“큭...!”
“사탄. 너는 잘 싸웠어. 내가 여태까지 만나본 용사 중에서 가장 우수해. 하지만 맨 처음에 기사왕이 쓰러진 시점부터 이 싸움은 나의 승리로 확정되어 있었다구? 하핫! 이해를 못 한 얼굴이네. 내 종족을 잘 살펴봐.”
“영웅의 삶을 계승한다...?”
“맞아.”
“자, 잠깐! 설마...!”
“이건 단순히 기술만 빼앗는 게 아니야. 말 그대로 삶이지. 나는 19년 동안 네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알아, 죽은 네 동료들을 통해서.”
“......”
방금까지 결의를 다졌던 사탄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강한수는 그를 느긋하게 몰아치면서 말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
“어째서 알려주는 거지?”
“그래야 다음 회차에서 더욱 나를 몰아칠 거 아니야? 이곳의 나는 재미를 못 보지만, 다음 나는 척추 빠지도록 싸우겠지. 하핫!”
“그러면 질문.”
“어째서 처음부터 이 수법을 쓰지 않았느냐고, 물어볼 생각이었지?”
“......”
“제약 같은 건 없어. 그저 느긋하게 용사 사탄의 19년 모험을 음미하고 싶었을 뿐. 그런데 바로 죽여버리면 감상할 새도 없이 세계가 붕괴해버리잖아. 그건 곤란하지.”
“괴물...”
용사 사탄은 질렸다는 얼굴로 연신 후퇴하면서 기회를 엿봤다.
강한수가 말했다.
“다음 회차에선 말이야. 동료들에게 전부 보여주지 말고 최대한 숨기라구. 지금은 너무 까발려져서 기대가 전혀 안 생기잖아. 아! 90층 앞에서 동료들을 싹 죽이거나 대기시킨 후에 1대1로 도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건 내가 판단한다!”
“워워, 열 내지 말고 기다려. 남은 동료들의 삶도 전부 감상할 때까지는 죽이지 않을 테니까.”
“이 자식...!”
발끈한 사탄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맹공을 펼치지만, 강한수에게 닿지 않았다.
전부 읽혔으니까.
비단 사탄뿐만이 아니라 아직 생존해있는 동료들의 다음 생각과 행동도 전부 예측되고 말았다.
그것은 이미 미래시(未來視).
파티의 전력과 전술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방심해도 된다. 오만해도 된다.
“크리스. 너는 분명히 나를 뛰어넘는 천재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 성장 과정을 싹 훑어봤거든. 아무튼, 미안하다. 내가 네 아버지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진짜 나를 대신해서 사과하마.”
“큭...!”
“사과 끝. 이만 죽어다오. 검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거든. 네 눈을 통해서 보마.”
푹!
심장에 성검이 박힌 아들 카리스가 피를 토하며 맥없이 쓰러졌다.
강한수는 가차 없었다.
죽어도 어차피 부활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아들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아, 악마...”
“검희도 옛날에 비슷한 말을 했었지. 분명히 그런 사이였기에 너의 탄생은 정말 기적...”
“......”
“편히 쉬렴.”
화르륵!
죽은 아들의 시신이 엉망진창으로 훼손되지 않도록, 불의 정령들을 동원해서 말끔히 태워버린 강한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다음 표적은 용왕들.
마룡왕의 등에 탄 현자가 온갖 마법을 동원해가며 방해했지만, 강한수는 깔끔히 무시했다.
그리고 한 마리씩 사냥해갔다.
“Gooool~?!”
“Iceeeee~?!”
“Whiiii~?!”
이전이랑 확연히 달랐다.
용왕들이 최고 속도로 비행하면 따라잡기 힘들었는데, 현재는 별 어려움 없이 정의를 집행했다.
목숨을 단번에 끊지 못해서 성녀가 치유할 틈을 줬었는데, 이 또한 현재는 단번에 끝장낼 수 있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칠흑빛 용의 비늘.
망룡왕 뇌비우스의 비늘이 모든 상태 이상을 막아준 덕분이다.
움직임을 방해하던 약화 효과가 사라지면서 전투가 손쉽게 풀렸다. 단단한 비늘의 방어력은 덤.
“쉽군?”
강한수의 추격을 받은 용왕들이 전부 쓰러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등에 타고 있던 현자와 나서스, 성녀들도 얼마 못 버티고 사망.
이브와 쑥떡만 남았다.
전세(戰勢)는 이미 완전히 기울었다고 볼 수 있다.
“사탄 용사님. 아직 안 늦었답니다?”
“......”
“쓰러진 동료들을 떠올리세요. 복수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파멸】
디스코는 이 와중에도 사탄을 유혹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전이랑 달랐다.
강한수에게 살해당할 뻔한 그녀는 숨겨둔 실력을 조금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바스스스...
칠흑빛 용린으로 강화된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가 바스러진 것을 본 강한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관전하던 디스코를 공격했다가 받은 부상.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브? 너는 뭐지? 19년 동안 실력을 숨기고 있었나.”
“후후후! 저는 무시하고 싸우세요. 죽고 싶지 않다면.”
“...골반도 안 예쁜 년이 말도 건방지게 하네.”
“후후후! 건방이라... 후후후!”
모험 중, 디스코의 비현실적인 외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성희롱하려던 원주민들이 매우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상대해주지 않고 깔끔히 무시해왔다.
그런데 내게는 왜 발끈하는데?
차별이 너무 심하다.
“당신의 상대는 나다!”
“사탄, S급 후배여. 너는 충분히 잘 싸웠어. 그러니 만족하고 이만 회귀해. 다음에 다시 도전하라구?”
“회귀는 장난이 아니다!”
“...실례.”
순수하게 사과한 강한수가 재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푹! 푹!
“큭...?!”
돌진해온 용사 사탄의 공격을 간단히 흘린 후, 천마를 파괴하고 얻은 두 성검을 그의 가슴에 찔렀다.
하지만 결착을 짓지 않았다.
“죽지 말고 기다려.”
팟!
강한수는 뒤편으로 물러나 있는 디스코를 향해 도약했다.
잘한다, 나! 시건방진 감찰관을 죽여버려~!
“...사람 말을 참 안 듣는 천둥벌거숭이로군요.”
【파멸】
뿅!
디스코의 손에 투명한 유리로 세공된 부채가 출현했다.
“저건...? 흡!”
오한을 느낀 강한수는 돌격을 멈추고 서둘러 몸을 틀었다.
파스스스...
디스코가 부채를 휘두른 방향으로 공간이 파괴됐다.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지만, 신력은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말끔히 소멸한 왼팔을 본 강한수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저게 뭔지 분석하는 거겠지.
“포기하세요. 나는 파멸을 주관하는 신(神). 제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한순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루로 안 만드는 거지?”
“......”
“자칭 신. 그냥 못 한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때?”
스르르...
신력에 당해서 사라진 왼팔이 죽순처럼 다시 돋아났다.
“정말 짜증 나는 자로군요.”
“피차일반이야.”
그렇게 강한수와 디스코가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무력화됐던 사탄은 쑥떡에게 치료받고 있었다.
“큭!”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암흑물질의 간섭으로 일그러진 상처가 다시 벌어질 수가 있어요.”
“하지만...”
“...사탄 용사님. 제 비밀을 하나 알려드릴게요.”
“비밀?”
“저는 아버지께 용사님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좋아서 하는 일은 절대 아니었어요.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자들을 돕고 싶을 리 없잖아요?”
“아버지? 살해? 설마...!”
“하지만 사탄 용사님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향별로 돌아가려고 항상 노력하시던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100층으로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게 무슨...?”
“꼭 꿈을 이루시길.”
솨아아아-
변신을 푼 쑥떡의 몸집이 급속도로 거대해졌다.
▷종족: 그린 드래곤 로드
▷레벨: 9999+
▷직업: 초월자(한계→돌파↑)
▷스킬: 신앙GG 생명G 대형G
영재G 포용G…
▷상태: 사도, 초월
탑의 내부가 4차원 공간으로 확장되어 있지 않았다면 변신을 풀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거대했다.
주위에 널브러진 모든 용왕의 몸무게를 다 합쳐도 쑥떡의 절반에도 못 미치리라.
“Greeeee-!”
휘익~
밖에서 본 마왕의 탑처럼 큰 녹색 꼬리가 휘둘러지고, 강한수는 반응조차 못 하고 얻어맞았다.
콰아앙-!
“콜록콜록! 이거, 제대로 안 하면 장남에게 맞아 죽겠는데?”
어이어이. 중2병처럼 강한 척할 때가 아니야. 제대로 해도 죽을 것 같다구?
체급에서 너무 밀린다.
그가 캡틴 판타지를 소환할 수 있었다면 ‘응애!’ 한 방에 간단히 역전했겠지만.
“Greeee!”
“...망할 진짜 놈. 손발 다 자르고 어떻게 싸우라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내가 나중에 비겁한 마누라에게 대신 따져줄게!
*
“쑥떡! 쑥떡! 정신 차려!”
“Greeee...”
탑 90층 보스 강한수는 패했다.
비열한 우정의 힘이 아닌, 아들의 힘에 쓰러졌다.
그러나 전력을 다한 쑥떡도 무사할 수 없었다.
정의로운 용사의 날개에 깃든 치명적인 정의감 탓이다.
“어서 치료를...!”
“Greee.”
부상이 너무 심해서 쑥떡의 치료는 어렵다. 성녀 셋이 전부 살아있었어도 살리지 못한다.
친우 뇌비우스가 괜히 ‘용인’의 형태로 싸우는 게 아니다.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체급이랑 비례하게 강해지는 건 틀림없지만, 세균처럼 작은 적의 공격에 취약해진다.
하지만 쑥떡은 선택지가 없었다.
뇌비우스처럼 비슷한 체급으로 강한수를 쥐어팰 능력이 안 됐기 때문이다.
“쑥떡. 정말 고마워.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을게. 앞으로 내가 어딜 가더라도...”
“G, Gree, ee...”
“편히 쉬어, 사탄의 친구여.”
“......”
“...기다려. 우리는 금방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쑥떡.”
동료들의 죽음을 애도한 사탄과 디스코가 91층으로 향했다.
저 둘이 100층에 도달하기 전에 비명횡사하진 않을 터.
이제 나도 슬슬 준비를... 음?
“훌쩍!”
“마누라. 왜 울어?”
“너무 감동적이잖아. 훌쩍! 씨드도 그렇게 생각하지?”
“얼씨구?”
아버지와 아들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모습이 멋지다고?
내 마누라는 진짜 악취미다.
아무튼, 멋진 대사와 포즈를 준비하고 기다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