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74화 (374/430)

 374화

[26회차] 영혼저장소

‘이, 이 힘은 설마...!’

‘누가 좀- 으악!?’

‘라누벨! 좀 막아봐!’

‘히익?! 오지 마!’

라누벨이 귀여운 척으로 고용한 영웅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그들이 어떤 기상천외한 기술을 쓰더라도 무의미했다. 두 요정 소녀가 앙증맞게 ‘응징!’이라고 외치면 전부 고꾸라졌다.

논리와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푹신푹신한 베개가 흉흉한 둔기를 이기고 있는 판국에, 뭘 더 생각한단 말인가?

이들이 약한 건 절대 아니다. 상대가 안 좋았을 뿐이다.

‘라누벨! 나를 속였구나!’

【예지】

‘이런 얘기는 분명 없었잖아!’

【광속】

‘순진한 어떤 신이라니...!’

【낙뢰】

‘무리! 무리! 이건 자살행위야!’

【무쌍】

영웅 중에는 신력을 보유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신의 사도’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몰랑한 슬라임과 말랑한 슬라임이 같을 리 없잖은가?

예전에 디스코도 말했듯, 고위급 신의 사도는 하위급 신도 쓰러트릴 수 있다.

‘응징이라니...’

느긋하게 관전하던 디스코도 바짝 긴장해있었다.

신력 응징.

굉장히 유명한 신(神)의 힘인 모양이다.

라누벨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그녀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퇴로는 쏘시엘이 이미 막았다.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가는 건 저번처럼 마음대로 안 된다. 우리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구?

“잘생긴 남편.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일했고 남편은 딴 여자랑 시시덕거리기만 했잖아.”

“내가 언제?”

몰랑에 걸고 그런 적 없다.

“그렇게 발뺌할 줄 알고 전부 적어놨어. 봐봐.”

“허! 어디 보자.”

나는 거의 논문 수준으로 비겁한 마누라가 기록해둔 내 범죄기록을 살펴봤다.

1) T50148391: 식당 ‘꿀물이 흐르는 주점 1호점’ 여주인의 엉덩이를 3초 동안 빤히 쳐다봄.

2) T50148402: 꽃가게 ‘에밀리와 에리스의 꽃밭’ 자매에게 꽃보다 예쁘다고 칭찬함.

3) T50148415: 신성제국 도시 ‘알파리오’에서 소매치기범의 골반을 붙잡고 어루만짐.

4) T50148419: 던전 ‘적색 마녀의 생체실험실’ 보스가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키스함.

......

813) T50148623: 신전 ‘몰랑한 안식처 9호점’에 숨어든 이단자의 척추를 밤새 쓰다듬어줌.

814) T50148628: 아내의 골반을 쓰다듬으면서 페스티벌 참가자의 백색 가터벨트를 쳐다봄.

“...억울하다!”

나는 정의로운 Z급 선배 용사님으로서 맡은 임무와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아무튼, 지금은 시시콜콜하게 과거를 따질 때가 아니다.

‘응애-!’

캡틴 판타지가 라누벨의 반란을 종결시키기 위해 참전했다.

몰랑한 엉덩이로 전부 눌러버려!

그랬더니,

‘귀여운 라누벨을 도와줘요! 투명룡(透明龍) 말랑고스!’

‘Maaaaal-!’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용의 울부짖음이 들렸다.

그리고 힘이 발현됐다.

【투명】

용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저 신력의 효과가 틀림없다.

‘응애?’

‘Maaaaal!’

‘응애애~?!’

캡틴 판타지가 보이지 않는 용의 몸통박치기에 휘청했다.

그러나 몰랑한 아기의 피부는 모든 피해를 흡수하고 튕겨냈다.

‘응애!’

‘Maaal...?’

보이지 않는 적에게 맞고 분노하는 캡틴 판타지.

그리고 아무런 피해를 못 줘서 당황하는 투명룡 말랑고스.

벌써부터 장기전이 예상됐다.

‘응애애애...!’

‘Maaaaal...!’

몰랑한 아기와 투명한 도마뱀이 한 치의 양보 없이 격돌했다.

*

제삼자의 참견을 허용하지 않는 체급끼리 싸우는 사이, 라누벨은 4차원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백금색 삼지창.

고풍스러운 포크처럼 생겼다.

나를 상대할 때 쓰려고 꼭꼭 감춰둔 비밀무기로 짐작됐다.

왜냐하면,

【우정】

【사랑】

고리타분한 신력이 한가득 깃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에잇-!’

사악한 라누벨이 귀여운 척하면서 그 거대한 포크를 어린 소녀들에게 겨냥했다.

어떻게 저런 끔찍한 짓을!

이에 대항하는 셀레니스와 셀비너스의 무기는 분홍색, 하늘색 별 모양이 총총 박힌 새하얀 베개였다.

...틀림없이 베개였다.

‘응징!’

‘응징!’

두 소녀가 한 손으로 휘두른 베개가 라누벨의 삼지창을 부수고 몸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꺄앗~?!’

위기상황에서도 귀여운 척을 잊지 않으며 라누벨이 훨훨 날아갔다.

데려온 졸개들처럼 한 방에 소멸하지 않은 건 칭찬해줄 만했다.

...그래도 신(神)인데.

전투력 차이가 너무 극심했다.

옷이 갈기갈기 찢긴 라누벨의 알몸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수명이 다한 전구처럼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지직, 지지직-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 당신을 풍기문란죄로 체포합니다.’

교감 베이커리가 잽싸게 달려가서 라누벨의 팔다리를 포박했다.

그녀는 벗어나고자 발버둥 치는 것도 잊은 채 외쳤다.

‘죄가 이상한데요...!’

‘어흠! 잘 들으십시오. 당신은 귀여운 척으로 쏘시엘 교장의 남편을 수차례 유혹한 미수(未遂) 혐의가 있습니다.’

‘말도 안 돼요! 라누벨은 누군가를 유혹한 적이 없어요! 귀여울 뿐이라고요!’

‘귀여울 뿐? 죄를 인정했군요.’

‘아앗...?!’

‘연행하겠습니다.’

푹!

베이커리가 라누벨의 가슴에 끝이 날카로운 단검을 꽂았다.

이럴 거면 번거롭게 왜 포박하느냐고 할 수 있지만, 육체(肉體)를 버리고 영체(靈體)로 숨어버리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다.

판타지아와 페스티벌 차원에서 죽으면 교육장에 귀속된다.

그건 상대가 신(神)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장인어른이 그랬으니까.

마왕 페도나르보다 신격이 떨어지는 라누벨이 저항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아...’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의 습격은 나의 정의로운 딸들이 해결했다.

이제 남은 건...

‘응애애애!’

‘Maaaaal~?!’

투명만 믿고 신나게 공격하던 투명룡 말랑고스가 비명을 질렀다.

몰랑한 캡틴 판타지의 유일한 날카로운 무기인 앞니에 꼬리를 물린 것이다.

저기도 끝났군.

투명룡 말랑고스가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덤벼줘서 다행이다.

저놈이 게릴라전을 펼쳤다면 정말 골치 아팠을 테니까.

아무튼,

“남편님은 팝콘만 먹다가 끝났네.”

“그러게 말이다.”

목의 가시처럼 계속 신경 쓰였던 라누벨이란 혹이 너무나 간단히 떨어져 나갔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무언가를 노리고 라누벨이 고의로 패배한 게 아닐까, 라는 근거 없는 의심이 들 정도다.

“그건 아닐걸? 라누벨이 고의로 붙잡혔다고 하기에는 피해가 적지 않아. 조기에 제압하지 못했으면 정말 위험할 뻔했어.”

“그래?”

“쌍둥이가 지나치게 강해서 티가 안 났을 뿐이야. 특히, 투명룡 말랑고스의 악명은 우주의 경찰로 불리는 몰랑함대에 버금갈 정도야. 그 악행을 모아놓은 소설책도 나왔어.”

“실감이 안 되네.”

귀여운 아기의 앞니에 물린 도마뱀이 그렇게 유명할 줄이야!

당장 라누벨의 척추를 어루만져주고 싶지만, 몰랑소프트의 감찰단 때문에 진행 중인 페스티벌을 내팽개칠 수 없었다.

“페스티벌이라면 괜찮아.”

“...음?”

“라누벨이 여신 진영에서 난동부리는 바람에 졸업생들이 무더기로 탈락했거든.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승리할 수 있을 거야.”

“즉, 내가 직접 나설 상황은 없을 거라는 뜻이지?”

“맞아.”

“그러면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군.”

외계의 침략자들을 무찌른 두 딸을 칭찬해주고 싶지만, 일단은 라누벨의 척추가 먼저다.

쏘시엘이 말했다.

“판타지아 차원에 귀속된 라누벨은 영혼저장소에 있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기억을 추출하고 영혼을 분할시키고 싶지만, 영혼이 너무 약해져 있어서 대기 중이야.”

“응징 때문인가?”

“응. 응징은 어쩔 도리가 없지.”

“아는 모양이네?”

“모르면 촌년이랄까? 순진한 어떤 여신, 성급한 어떤 마신, 몰랑한 어떤 군신. 전 우주를 통틀어 단 셋뿐인 1등성 신(神)이야. 그리고 응징은 순진한 어떤 여신의 힘이지. 우리를 압박하고 있는 몰랑소프트는 몰랑한 어떤 군신의 계열사고.”

“헤에~”

본의 아니게 아주 대단한 신들에게 관심받고 있는 모양이다.

성급한 어떤 마신은?

“왜 묻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둘도 많다고 생각해. 순진한 어떤 여신과 몰랑한 어떤 군신이 충돌하면 판타지아는 끝장이야.”

“흐음...”

단정하듯 말하는 비겁한 마누라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딸들의 신력 ‘응징’을 보고 있으면 절로 겸손해졌다.

갈 길이 멀구먼.

일단은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잘생긴 남편님. 마왕의 자리를 비우는 건 좋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돌아와. 순진한 어떤 여신에게 관심받는 딸들도 돌봐야 해.”

“내가?”

갑자기 왜?

“아니면 셀레니스와 셀비너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떠나. 잘했다고 칭찬해줘야지.”

“흠. 금방 다녀올게.”

찜찜했으니까.

딸들이 강하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라누벨이 너무 쉽게 쓰러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내 직감을 신뢰한다. 그렇기에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다.

번쩍-!

*

판타지아 영혼저장소.

영혼이 분할된 원주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영혼이 약해서 세상이 붕괴하면 사라진다.

하지만 간혹, 아니, 빈번하게 학생과 원주민 사이에서 생명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들은 온전한 영혼.

그렇기에 붕괴한 세계 주위를 유령처럼 배회하지 않도록 이곳에 보관해둔다.

부모가 데려갈 때까지.

“정말... 기분 나쁜 곳이네.”

예전에 아들 카리스도 보관되어 있었던 곳이기에 그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

“......”

“......”

눈과 입을 닫은 알몸의 남녀가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춰서 서 있다.

그들의 나이대는 저장소로 옮겨지기 직전의 외모를 따르기에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15살 전후다.

이유?

결혼해서 가족을 꾸린 용사가 질질 끌다가 5대 재앙이나 마왕의 군세에 밀리는 시기가 용사력 15년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이뿐이라면 이렇게까지 불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우스&실비아」

「제우스&실비아」

「제우스&실비아」

「제우스&에이리스」

「제우스&아쿠아」

......

그들의 목에 걸린 인식표.

부모가 누구인지 적혀있다. 그리고 부모 중 용사를 기준으로 예쁘게 정렬해놨다.

...검희의 이름도 있을 터.

상상할수록 속이 뒤집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벅저벅.

나는 목적지를 향해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판타지아 차원에서 태어난 2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2세가 아닌 자들의 영혼을 보관해두는 장소.

“...뭐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인식표를 발견했다.

「용사 케이트」

「모험가 알프레드」

「용사 율리아」

「모험가 갈리온」

팟.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나는 맹렬한 속도로 달렸다.

【모험】

굉장히 미약하긴 하지만, 라누벨의 신력이 느껴졌다.

아직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의미.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라누벨...!”

나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감정을 실어서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라누벨이 들으라고 소리 지른 건 아니었다.

“......”

그녀의 목을 움켜쥔 존재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너는 대체 누구지? 교사? 버그? 더미? 유령?”

목에 인식표만 걸린 알몸들로 가득한 영혼저장소.

이곳에 나 말고 옷을 걸친 자가 침입해있었다.

두건을 깊숙이 눌러쓴 채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몸의 윤곽으로 봐서는 여성이 틀림없었다.

무미건조한 대답이 들려왔다.

“판타지아의 분노.”

“거참, 신기한 우연이네.”

나도 막 분노한 참이거든.

【원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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