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75화 (375/430)

 375화

[26회차] 복수는 나의 것

자연과 우주 사이에서 태어난 페도나르와 파르마엘.

그 둘의 고유특성을 뺀 순수한 힘의 결정체가 신력 ‘원죄’다.

판타지아와 페스티벌 차원의 시스템을 유지하느라 대부분의 힘을 소진했지만, 여기는 내 영역이다.

두 차원 안에서라면 전력(全力)의 1%는 발휘할 수 있다.

그 고유효과는?

퍽-!

“읏...!”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을 무시한 직접타격이다.

세상은 ‘자연’으로 가득하고, 우리는 그 안에 살고 있다.

내가 공간A에서 자연을 밀면, 멀리 떨어져 있는 공간B의 자연이 밀린다는 식이다.

이건, 마찰계수 0인 매질 안에서 파동이 순식간에 전달되는 원리랑 흡사하다.

쉽게 표현하면, 사정거리가 무제한, 무한계로 바뀐다.

그 위력은?

“...신기하네. 묵사발을 낼 의도로 공격했는데, 자연이 거부하다니. 너는 뭐지?”

“판타지아의 분노.”

라누벨의 목을 놓치고 바닥에 쓰러진 여자가 같은 대답을 했다.

“그걸 묻는 게... 음?”

“모험가 라누벨을 처리하면 다음은 당신 차례입니다. 판타지아를 더럽히고 망가트린 존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쏘시아...?”

헛소리하는 여자의 요추(腰椎) 4번과 5번 사이를 어루만져주고자 손을 뻗은 나는 멈칫했다.

벗겨진 두건 안쪽으로 친숙한 얼굴이 보였다.

두 번째 악마 쏘시아.

관리가 전혀 안 된 헝클어진 갈색 머리카락과 순한 눈매가 분위기를 확 바꿨지만, 숨겨둔 쌍둥이라고 소개해도 믿어질 정도였다.

쏘시아의 클론? 버그?

가짜 쏘시아가 나를 째려보며 냉랭한 어조로 답했다.

“아닙니다.”

“나도 아니라고 생각했어.”

【원죄】

판타지아의 자연이 그녀를 공격하길 원치 않는 바람에 약간의 마찰이 있었지만,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큭...?!”

직접 잡을 필요는 없다.

염동력처럼 원거리에서 손아귀에 힘을 주면 그대로 재현되니까.

이것이 나의 신격.

또한, 방심하지 않는다.

“불쾌하네. 척추가 내 마누라랑 너무 닮았어.”

꾸욱.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 여자의 목을 잡은 채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는 이 속박을 벗어나고자 격렬하게 팔다리를 허우적거렸지만, 판타지아의 자연 그 자체인 내게서 벗어날 순 없었다.

“네가 판타지아의 자연이라고? 웃기지 마! 너는 그냥 야만적인 침략자일 뿐이야!”

“...생각도 읽을 수 있나.”

영혼이 이어진 마누라는 단편적으로 볼 수 있지만, 교사를 포함한 다른 자들은 불가능하다.

버그가 이런 일도 할 수 있나?

그럴 리 없다.

“나는 판타지아의 분노. 판타지아의 의지다. 침략자들이 무슨 생각 중인지는 손금 보듯 알 수 있어.”

“...흥미롭네.”

죽이지 않고 생포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로 했다.

그때,

【모험】

라누벨이 움직였다.

잘 가누지도 못하는 몸을 비틀거리며 일으킨 그녀는 신력 ‘모험’으로 가짜 쏘시아랑 자신을 이었다.

저항이 배로 늘어났다.

무척 가소로웠지만, 내 행동에 제동을 걸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무슨 의도지?”

가짜 쏘시아는 라누벨의 목을 졸라서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을 죽이려고 한 여자를 라누벨은 돕고 있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라누벨은 그녀가 또 죽게 놔두지 않을 거예요...!”

“...도통 모르겠군.”

하지만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둘 다 잡은 후, 하나하나 물어보면 될 문제다.

“윽!”

“크윽!”

판타지아 차원 밖이었다면 내 힘이 미치지 않았겠지만, 여기선 내가 정의(正意)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라누벨과 가짜 쏘시아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2중, 3중으로 올가미를 치고 옥죄었다.

얌전히 포박돼라.

“...얍!”

“귀여운 척하지 마라. 그런다고 결과가 바뀌지 않아.”

부조리한 편파판정에 좌절하던 과거의 내가 아니다.

“라누벨은 그녀에게 속죄해야 해요! 꿈과 희망이 넘치는 모험을 위해 그녀의 세상과 목숨을 빼앗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요!”

“재미난 얘기를 하네.”

【원죄】

【모험】

충돌이라고 말하기 미안할 정도로 나의 신격이 압도적이었다.

그때, 가짜 쏘시아가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뭐가?”

*

정의로운 나의 자연에 다른 자연이 침투해서 오염시켰다!

...라고 판단해서 정화하려고 했는데, 1등급 육각수처럼 맑고 깨끗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현상일까?

‘여보. 잠시 나갔다가 올게요.’

‘또 모험가들 때문이오?’

‘네. 그들이 방문하는 빈도가 점점 늘어나서 걱정이에요.’

‘내가 그 바퀴벌레들을 전부 쓸어버리면...’

‘여보...’

‘당신과 나의 시간을 자꾸 빼앗는 그들이 괘씸하잖소. 흠흠.’

‘모험가들이 찾아오는 건 괜찮아요. 나쁘긴커녕 별에 생기가 넘쳐서 좋은걸요? 단지, 그들 중 일부가 아름다운 자연을 훼손하고 유적과 무덤 등을 파헤쳐서 문제지요.’

‘본보기로 몇 놈 죽여서 던전 입구에 효수해두면...’

‘여보... 슬슬 왕바보 페도나르는 졸업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당신 때문에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소.’

‘또 왕바보 같은 소리를... 다녀올게요.’

‘조심하시오, 판타지아.’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렴풋이 눈치챘는데, 대화의 막바지에 친절하게 확인까지 해줬다.

페도나르.

판타지아.

비겁한 마누라 쏘시아의 부모 이름이다. 나에게는 장인어른, 장모님이 되시겠다.

시점은 장모 판타지아.

내가 ‘가짜 쏘시아’라고 여겼던 존재의 정체가 바로 그녀였다.

“...오우야.”

지금까지 장모님의 척추와 골반을 잡고 흔들었다는 소리잖아?

마누라에게는 비밀로 하자.

나는 유령처럼 부유한 채 장모님의 뒤를 따라갔다.

‘안녕!’

‘안녀어엉!’

‘안뇽!’

‘안녕해!’

스쳐 지나가는 그녀를 발견한 정령과 풀벌레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아니,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그녀를 좋아했다.

바람을 타고, 땅을 밟고, 강을 건너고, 햇빛을 받고...

장모님은 환한 미소로 일일이 회답해주면서 목적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모험가들이 있었다.

‘여기가 틀림없어?’

‘그렇다니까.’

‘흐흐. 왕의 무덤이면 보물과 유물도 많겠지.’

‘이 수북한 거미줄을 봐. 우리가 첫 방문인 게 틀림없어.’

‘히야~ 대박이로군!’

삽을 든 사내들이 반쯤 파묻힌 무덤 입구를 부지런히 파고, 골반이 변변찮은 아가씨들이 대범한 복장으로 주변 경계를 섰다.

전형적인 도굴 현장.

나도 1회차 때는 지겹게 했었기에 낯설지 않았다.

특히, 저기서 귀여운 척하는 소녀는 절대 잊을 수 없다.

‘라누벨이 말했죠? 여기에 있을 것 같다고.’

고고학자 라누벨.

복장과 헤어스타일이 현재보다 촌스러운 걸 제외하면 똑같았다.

‘그러게. 어떻게 찾았다냐.’

‘하하! 나는 라누벨을 믿었다구!’

‘보물이 나오면 파티다!’

‘저도 찬성! 해가 지기 전에 얼른 끝내야겠네요.’

시끌벅적했다.

고인(故人)의 안식을 방해하는 만행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신비와 역사를 찾아다니는 모험.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라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괴물이든 정령이든 유령이든 슬라임이든...

전부 죽인다.

‘당장 멈추세요!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장모님이 무덤 입구 앞에 양팔을 벌리고 서서 모험가들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무모하다.

너무 무모하다.

저런 얄팍한 말이 통하는 모험가 무리는 ‘용사’밖에 없다.

‘와아! 진짜 예쁜데?’

‘아름다운 아가씨. 다치기 싫으면 거기서 비켜.’

‘혹시, 중간보스인가?’

‘그런 것치고는 지나치게 약해 보이는데...’

‘살짝 난감하게 됐네요.’

모험가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눴다.

짜증, 욕망, 질투, 경계, 혼란...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장모님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초현실적인 미모.

그 자체만으로도 여신처럼 범상치 않은 존재로 착각하게 해서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아마, 장모님은 이런 식으로 수많은 모험가를 돌려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패했다.

‘라누벨이 알아요! 이 여자는 세계정복을 꿈꾸는 사악한 마왕의 아내예요! 외모에 현혹되지 마세요!’

‘그래?’

‘호오라?’

그 직후에 전투가 벌어졌다.

장모님이 약한 건 아니었지만, 상대는 야만적인 모험가. 심지어 비열한 우정의 힘을 사용했다.

결과는 금방 나왔다.

‘아윽...!’

포위된 장모님은 탈출도 못 하고 쓰러졌다.

그녀를 좋아하는 정령들이 돕긴 했지만, 그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월척이로군!’

‘흐흐흐.’

‘진짜 횡재네.’

모험가들은 잽싸게 그녀를 포박한 후, 무덤 안으로 끌고 갔다.

그 뒤에는...

*

“별에서 태어난 이래에 처음 겪어본 순수한 악의(惡意). 나는 그들에게 죽여달라고 애원했지요.”

“......”

“제 복수를 준비하던 왕바보는 딸에게 배신당했습니다. 그 딸은 증오스러운 모험가들에게 협력하고 별을 그들의 교육장으로 개조했어요.”

“뭐...”

그 부분은 나도 할 말이 없다.

쏘시아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엄마는 복수를 원치 않는다고.

그래서 분노에 삼켜진 아빠를 막으려고 했다.

“천만에요! 제 기억을 보셨다면 알 겁니다. 제가 그 모험가들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를! 이 몸과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새겨졌어요. 저는 복수를 간절히 염원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쏘시아의 추억 속에 있는 엄마는 완벽하고 위대했다.

그래서 원수들에게도 한없이 자비로운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남들보다 조금 더 성실하고 순수한 유부녀였을 뿐.

평범한 여자였다.

“이런 저를 비난할 건가요? 복수를 막을 건가요?”

“거참...”

복수는 찬성이다.

복수가 허무하다고 지껄이는 새끼들은 원한이 많거나 안 겪어봐서 그렇다.

복수는 마음의 평화를 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게 피해가 온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민이다.

도의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장모님의 골반을 당장 놔야 하는데, 놓을 수가 없었다.

흠. 정말 비겁한 골반이로군.

“다 들려요.”

“멋대로 엿들은 장모님 잘못입니다. 아! 증오스러운 딸의 남편이라서 굉장히 탐탁지 않으시겠군요?”

“아니요.”

“음?”

아니라고?

쏘시아랑 똑같은 얼굴로 장모님이 내게 야릇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러면서 부드러운 손길로 사위의 뺨을 쓰다듬으셨다.

갑자기 왜 이래?

“남편도 하지 못한 제 복수를 당신이 해줬어요. 추악한 모험가들을 뒤에서 조종하던 파르마엘과 라누벨을 쓰러트렸죠. 그 둘에게 제가 겪은 고통과 굴욕을 똑같이 느끼게 해주지 않은 건 애석하지만요.”

“그거야 뭐...”

나도 원한이 많았다.

“어머나! 복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데 공감대마저 있었네요? 그런 사위를... 완벽한 남자를 제가 싫어할 리 없잖아요?”

“저기, 장모님? 이러시면 좀 곤란한데요.”

마누라가 오해할 것이다.

“오해가 아닙니다. 딸에게 복수할 최고의 방법이 떠올랐거든요.”

“...잠깐.”

“당신을 빼앗는 것.”

장모님의 두 눈동자와 억양에서 광기가 진하게 느껴졌다.

이건 안 되겠군.

【원죄】

“장모님. 사위가 만든 독방에서 머리 좀 식히고 계세요.”

나중에 따님의 머리끄덩이 잡고 싸울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때,

“성급한 어떤 마신이시여. 당신의 성급한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뭣...?”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순진한 어떤 여신, 몰랑한 어떤 군신에 이어 성급한 어떤 마신까지...

【마계】

팍-

독방을 부수고 나온 장모님이 양팔로 내 목을 끌어안았다.

“사랑해도 될까요?”

“안 돼!”

이 집안은 진짜 개판...!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마계’가 우리를 집어삼켰다.

외박이 좀 길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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