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관심용사-376화 (376/430)

 376화

[27회차] 모험의 끝

“여기가 마계(魔界)...?”

무시무시한 악마들이 바글바글한 세계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상상했던 마계는?

악마들이 인간을 가축처럼 사육하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거대한 목장이다.

남자들은 막노동에 동원되고, 여자들은 가축을 늘리고, 그러다가 늙으면 악마들의 장난감이나 애완동물의 먹이로 고통 속에 죽는다.

이쯤은 돼야 마계 아닐까.

“사위는 마왕으로서 자질이 차고 넘치네요. 어떻게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죠?”

내 생각을 또 멋대로 읽은 장모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세상에 이런 일이?

정의로운 마왕님은 복수심으로 불타는 장모님에게 낚여서 마계란 곳으로 빨려들고 말았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대단한 신이어도 사도를 통해서 나를 납치하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원죄】

【마계】

여전히 충돌하는 두 신격.

기습적으로 나를 납치하는 건 성공했지만, 판타지아 차원이랑 단단히 결속된 나를 빼내지는 못했다.

여기는 그 중간다리.

그래도 마계인 건 틀림없었다.

정면의 출입구 옆에 세워진 표지판에 큼지막하게 ‘마계’라고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무인도군.”

파도치는 바다에 둘러싸인 조그마한 섬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속도로 걸어서 섬을 한 바퀴 도는데 30분도 채 안 걸릴 정도였다.

그리고 정적.

풀벌레는커녕 박테리아와 세균조차 보이질 않았다. 이래선 생태계가 제대로 굴러갈 것 같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너는 왜 여기 있냐?”

【모험】

라누벨까지 딸려왔다.

“라누벨과 판타지아 님의 영혼이 신력으로 이어져 있으니까요. 여기가 말로만 듣던 마계- 꺅?!”

“오! 잘 잡히는군.”

한창 모험할 때는 그녀의 척추는커녕 엉덩이조차 만지질 못했다. 걷어차는 게 최선.

누군가 하지 말라고 내게 강요한 건 아니었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제지당했다고 할까.

그러나 이젠 괜찮다.

우득.

우드득.

라누벨의 요추(腰椎) 4번과 5번의 자리를 바꿔서 재접합했다.

“아으으...!”

무인도의 모래사장에 널브러진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눈물만 글썽거렸다.

귀여운 척해도 소용없어.

이번에는 라누벨의 경추(頸椎) 6번과 7번을 완전히 뽑아서 자라목으로 만들어볼까!

“그, 그만하세요!”

“...장모님. 어디 아프십니까?”

라누벨의 목에 손가락을 박아넣는 내 팔뚝을 양손으로 끌어당기면서 장모님이 말렸다.

복수를 갈망하시던 분이 왜?

장모님이 말했다.

“세월이 정말 무섭네요. 그렇게 바라던 복수였는데, 막상 현실이 되니 실행은커녕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고 불편하네요.”

“그러시면 안 보이는 곳에서 하겠습니다.”

“죽음으로 죗값을... 네?”

“하하! 이대로 라누벨을 평안히 죽이는 건 말도 안 되죠. 안 보이는 곳에서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아! 혹시, 순댓국 좋아하세요?”

잘 끓일 자신 있다.

바닷물에 라누벨의 척추를 넣고 끓여서 사골국물을 우려내고, 창자에 허벅지살과 가슴살을 채워서 순대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장모님이 또 사위의 머릿속을 훔쳐봤다면 3초 이내에 헛구역질할 것이다.

“저를 어린애 취급하- 우욱!”

“장모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요리 스킬이 MAX등급이었습니다. 닭고기랑 전혀 구분 안 되게 잘 다듬겠습니다.”

“부디 참아 주세요...!”

“흐음...”

그러면 요리계획은 취소하고, 춥고 어두컴컴한 굴속에서 조용히 다듬기만 해야겠다.

아! 죽일 마음은 없다.

복리로 쌓인 내 원한이 다 풀릴 때까지 극한의 고통과 절망 속에서 어떻게든 살려둘 것이다.

가장 먼저...

털썩.

“우에에에엑~!”

두 다리에 힘이 풀린 장모님이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으셨다. 그리고는 눈물, 콧물 흘리시며 과장되게 구역질을 하셨다.

비위가 매우 약하시군.

“여기 계세요. 장모님과의 문제는 라누벨부터 손본 후에...”

“잠시만요! 손보기 전에 제 문제부터 이야기해요!”

“흐음...”

굉장히 못마땅했지만, 마누라랑 똑같은 얼굴로 장모님이 저렇게까지 부탁하시니 마음에 약해진다.

라누벨, 운 좋은 줄 알아라.

...아니지.

기다리면서 벌벌 떠는 공포도 나름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좋아. 채택이다.

“사위님은 그 방면으로 머리가 완전히 특화되어 있군요.”

“교육의 힘이죠.”

“......”

“그래서, 사위를 납치해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뭡니까?”

“딸에게 복수죠.”

시작부터 굉장히 어려운 주제를 끄집어내시는군.

꼬여버린 이 집안의 관계를 내가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건 당사자들끼리 만나서 담판을 짓는 수밖에 없다.

만나게 하는 단계부터 쉽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제 이야기를 잠깐 해도 될까요?”

“그러시죠.”

“무덤으로 끌려간 저는 정말 끔찍한 시간을 보냈어요. 불행 중 다행이라면, 마왕의 분노를 걱정한 모험가들이 저를 일찌감치 묻어버리기로 한 거였죠.”

“헛짓했군요.”

장모님은 집을 나오면서 ‘모험가를 말리고 오겠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잘못된다면 원인은 모험가밖에 없다.

“그래도 절반은 성공했지요. 정확히 누가 저질렀는지 알 수 없게 됐으니까요. 그들은 제 영혼을 쪼개서 절대 부활할 수 없도록 주도면밀하게 뒤처리한 후, 도굴한 그 무덤 속 깊은 곳에 봉인했어요.”

“그런데 용케 깨어나셨군요.”

“사위님 덕분에요.”

“또 접니까?”

장모님을 구한 기억이 없는데?

“혼돈의 힘. 스킬 용자. 그 이름은 개발자인 최초의 용사가 지었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는 개발이 아닌 발견한 겁니다. 모험가들이 갈기갈기 찢어서 뿌려놓은 제 영혼의 파편들을요.”

“...혼돈의 힘이 장모님의 영혼이었다는 겁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판타지아 시스템으로 힘을 얻은 용사가, 판타지아 시스템을 파괴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어요?”

“파괴라... 그렇군.”

혼돈의 힘을 발견한 나는 시스템에 혼돈을 주는 버그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파괴.

굳건히 자리 잡은 판타지아 시스템에 치명적인 오류를 줄 수 있는 존재나 방법이 흔할 리 없다.

판타지아 행성의 관리자였던 ‘판타지아’쯤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퍼즐이 탁탁 맞아가는군.

그 유감스러운 가출선배가 이 유용한 힘을 개발해냈다는 것부터 의심했어야 했거늘...

선배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만행의 당사자인 라누벨 외에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죠. 그건 사위님도 마찬가지지만, 운이 정말 좋았어요.”

“운?”

“기억하시나요? 당신이 과거의 시간대로 이동한 날을. 그때도 제가 죽고 긴 세월이 흐른 후였지만, 매장된 무덤은 남아있었어요.”

“...아! 동대륙...!”

기억났다.

가출선배가 생활기록부 말소를 요구했고, 나는 역사를 날조하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녔었다.

그때, 용의 아지트 하나를 습격했었다.

거기도 무덤이었지...

“맞아요. 그곳이 제가 봉인된 무덤이었죠. 모험가들이 싹 도굴하고 텅텅 빈 무덤을 용들이 발견하고 아지트로 개조했지요.”

“그걸 제가 발견했고요?”

“네. 저의 영혼 파편을 다수 확보한 당신이요.”

소름 돋는 우연이다.

아니, 이것은 우주 회장님이 딸의 부활을 바란 결과가 아닐까?

장모님이 은근슬쩍 내 탄탄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당신은 제 생명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딸에게 넘기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남자죠.”

“제가 의도해서 구해드린 건 아니지만, 은혜라고 느끼셨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Z급 용사. 모험 도중에 구해낸 여자들이랑 일일이 사랑과 미래를 약속하는 짓은 F급이나 하는 겁니다.”

조금 전에도 보지 않았던가?

판타지아 영혼저장소에 버려진 수많은 ‘용사 2세’들을.

F급 용사들의 만행이다.

“맞아요. 당신에게 저는 지나가다가 구한 수많은 여자 중 하나겠죠. 그러나 이걸 받아들이는 제게는 아닙니다. 당신은 저의 기적... 구세주입니다. 생명을 구해주고 복수도 해준 완벽한 남자.”

“거참...”

장모님만 아니면 팬서비스 차원에서 하룻밤 정도는 할애할 텐데.

진짜 곤란하게 됐다.

이럴 때 보통은, 엄마 대신 딸이 나서서 ‘제 어머니를 구해주시고 복수도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제가 평생...’라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추파를 던진다.

그런데 여긴 모녀(母女)가 전쟁 중이니...

【원죄】

【마계】

빠져나가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탈출을 시도해봤지만, 보이지 않는 제삼자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했다.

성급한 어떤 마신.

그의 소행이 틀림없다.

내 가정을 혼돈에 빠트린 후에 ‘오늘도 마신(魔神)답게 일했다!’라면서 보람찬 미소를 짓고 싶은 모양이다.

그거, 완전히 민폐잖아.

“무인도에 남녀가 단둘. 낭만적이지 않나요?”

“라누벨도 있습니다만.”

“...그렇네요. 긴 세월 동안 어둠 속에서 간절히 바란 복수의 마무리가 필요한 시점이군요.”

우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라누벨이 말했다.

“라누벨은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저 불량한 용사는 두렵지만요! 라누벨은 말이죠. 판타지아 님을 괴롭히고 죽인 걸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살아왔어요. 모험은 절대 나쁘지 않다고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성공했나요?”

“......”

“라누벨?”

“솔직하게 말할게요. 라누벨은 그날 일을 후회하면서 모험의 방침을 바꿨어요. 배경이 어떻고 과거가 어떻든 예쁜 여자는 무조건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요.”

라누벨의 멍청한 행동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있었다.

저게 완벽한 존재, 신(神)이라고?

너무나 불안정해 보였다.

“라누벨은 당신을 잊고 하루하루 보람차게 생활했어요. 후학들을 위해 스스로 판타지아 세계에 귀속되는 방법도 택했죠. 그때, 저 불량한 용사가 나타나서 끊임없이 과거를 떠올리게 했어요. 그는 예쁜 여자라도 방해하면 잔인하게 죽였고, 원주민들에게 친절하지 않았어요.”

“어이. 말은 똑바로 해야지.”

주로 1회차인가?

나는 외면의 아름다움을 따지지 않고 공평하게 대했다.

예쁜 여자라도 죽인 게 아니다. 나쁜 여자라서 죽인 거다.

그리고 공짜로 도와달라는 염치없는 원주민들을 무시했을 뿐.

친절과 호구를 혼동하면 곤란하다.

“...라누벨은 숨기고 싶었어요. 마왕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원인을 모험가가 제공했다는 걸. 당시에는 성공적이었어요. 최초의 용사가 폭주하는 마왕을 무찌르면서 모든 걱정거리가 싹 해결됐죠.”

“너, 진짜 나쁜 년이다.”

“라누벨에게는 모험이 전부니까요. 부모 같은 거죠. 그때, 이 불량한 용사가 나타나서 제 모험을 부정하고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급기야 제게 강요하기에 이르렀어요.”

“뭘?”

나는 강요한 적이 없는데?

“몰랑폰.”

“그게 왜?”

“정보를 공유하면서 위험하거나 비효율적인 모험이 사라진 시대. 부정하고 싶었지만,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몰랑폰에 열광했어요.”

“순리지.”

“...진리라고 믿어온 모험이 부정당한 저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어요. 속죄.”

“야, 라누벨. 감동코인에 지금 투자해봐야 소용없어. 너무 늦었다구? 용서해주지 않아.”

“라누벨도 신이에요!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진 않아요!”

“그래도 아픈 건 싫고?”

“네! 살살 해주세요!”

“어이없구먼.”

“이걸로 저는 끝낼 생각이에요. 그때의 동료들을 설득해서 전부 데려왔고, 의도대로 전부 죽음을 맞이했어요. 이제 라누벨만 죽으면 돼요.”

“안 죽일 건데?”

척추가 닳아서 없어질 때까지 괴롭혀줄 계획이다.

“그건 무리예요. 삶을 부정당한 라누벨은요, 신격을 판타지아 님께 몽땅 넘길 생각이거든요.”

【모험】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라누벨은 정말로 자신의 신격을 장모님께 이양했다.

그리고 죽었다.

“...야. 죽었으니 얼른 일어나.”

“어? 어라?”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한 라누벨이 당황했다.

“잊었어? 여기는 마계야. 집주인의 허락 없이는 못 죽어.”

“아...”

자살에 실패하고 신격도 잃은 라누벨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드는 표정이군!

“이제 알겠지? 너 같은 애를 호구라고 하는 거야.”

자! 그러면...

신(神)이 된 장모님이랑 다시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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