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27회차] 인내MAX
“아이러니하네요. 모험가를 혐오하는 제가 모험의 신이 될 줄은...”
“대화 좀 하시죠.”
“아아, 어떤 원리의 신격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자격이 없는 존재가 억지로 떠안아서 그런 걸까요? 진정이 안 되네요.”
“...사위의 듬직한 손을 잡으니 진정되십니까?”
“도움이 많이 되네요. 앞으로 제가 추구해야 할 모험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그려져요.”
“아, 네. 그러면 이제 대화를... 장모님?”
“......”
내 손을 잡고 뺨에 비비시던 장모님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허! 돌겠네.”
흐느적거리며 모래사장 위로 쓰러지려는 장모님의 척추를 붙잡았다.
억지로 신격을 받아들인 반동에서 오는 부작용이었다.
그릇이 확장되고 적응할 때까지 눈을 뜨지 못하리라.
어쩌면 영원히.
“라누벨이 의도한 건 아니에요!”
“그러시겠지.”
“우우...”
“귀여운 척하지 마라. 대갈통을 쪼개서 모래를 잔뜩 넣은 후에 봉합해줄까?”
“히익-?!”
라누벨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도망치고 싶다는 얼굴이었지만, 척추가 어긋난 그녀는 여전히 꼼짝달싹 못 했다.
“...야. 업어.”
“업히라고요?”
“미쳤냐? 업으라고.”
나는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 장모님을 라누벨에게 넘겼다.
“라누벨은 허리가...”
“그래서?”
“아뇨. 업을게요.”
일반인이라면 가만히 서는 것만으로도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누벨은 신력을 잃었음에도 움직일 수 있었다.
전직 신(神)이란 걸까.
허리디스크를 달고 사람을 업은 채 걸을 수 있었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긴 했지만, 신음 한번 없이 견뎠다.
우리는 그 상태로 섬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아무것도 없네...”
온종일 벌거벗고 다녀도 될 정도로 온후한 기후.
...옷을 입지 말라고 누군가 고의로 그렇게 설정해둔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밤은 없는 것 같았다.
그 대신, 섬 곳곳에 자라난 야자수 그늘 속은 암막 커튼을 친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하늘에 태양, 별, 달 등은 보이지 않았고, 방위도 애매했다.
“아무것도 없긴요. 두리안이 잔뜩 자라고 있는걸요.”
“닥쳐.”
“우우...”
장인어른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점점 미식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여긴 먹을 게 없었다.
코코넛, 두리안, 라누벨.
이 셋만 영원히 먹으며 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아! 바다도 확인해볼까.”
풍덩!
곧바로 바다에 잠수해본 나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아무것도 없었다.
장어처럼 생긴 물고기가 잔뜩 헤엄치고 있었지만, 아무리 내려가도 바닥이 보이질 않았다.
급기야...
풍덩!
하늘이 다시 보였다.
분명히 나는 해저로 계속 내려갔는데, 해수면으로 다시 나왔다.
“이거, 설마...?”
나는 다시 잠수해서 여기저기 돌아본 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여기는 물로 이루어진 작은 행성이었다. 그리고 무인도는 항공모함처럼 두둥실 떠다니는 중.
중력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따지고 싶은 물리법칙이 많았지만, 여긴 평범한 세계가 아니기에 그러려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마계】
성급한 어떤 마신의 힘.
나와 장모님을 위해 차원을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변태였다.
이 마신이 바라는 햄버거를 만들기 전에는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라누벨.”
“네.”
“성급한 어떤 마신에 대해 아는 정보를 전부 읊어봐.”
“라누벨은 촌에서 쭉 생활한 신이라서 아는 게 없어요.”
“도움이 안 되네.”
섬을 샅샅이 뒤졌지만, 탈출의 실마리가 될만한 수상한 점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중앙에는 경사가 완만한 언덕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정상에는 만년설이 덮여 있었다.
대체 어떻게 돼먹은 날씨냐.
만년설이 녹아서 흐르는 깨끗한 개울과 연못, 붉은색 야광주로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동굴, 침대처럼 푹신한 모래사장...
무인도의 기획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서 모를 수가 없었다.
우주로 탈주를 시도해봤지만,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무지막지한 인력(引力) 탓에 실패했다.
...큰일이군.
할 일도 없는 조그마한 섬에 혈기왕성한 남녀가 갇혀있다.
미래가 뻔히 보였다.
심지어,
“두리안은 냄새가 고약하긴 해도 매우 달콤하고 원기회복, 변비, 빈혈에 도움이 돼요. 아! 기능을 강화하는 강정제로도 쓰인답니다.”
“안 물어봤다.”
“궁금하실 것 같아서요.”
“한 번만 더 조잘거리면 두리안으로 맞을 줄 알아.”
“......”
어릴 적에 두리안을 먹어봤다.
아버지는 두리안의 양파 썩은 냄새를 견디지 못하셨고, 나는 물컹물컹한 식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좋아하셔서 먹을 기회가 은근히 많았다.
판타지아 차원에서는...
“먹질 못했네.”
두리안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깔끔한 척하는 귀족들이 영지로 반입하는 걸 엄격히 금지해서 볼 기회조차 없었다.
앞으로는 실컷 먹겠군.
입에 물릴 때까지!
코는 이미 마비돼서 아무것을 맡을 수 없었다.
“마왕님. 한마디만 더 하면 안 될까요?”
“쓸모없는 소리면 하지 마.”
“마신에 관한 거예요.”
아까는 아무것도 모르는 촌뜨기 신이라더니?
“그러면 한마디만 해봐.”
“네! 두리안은 성급한 어떤 마신이 사용하는 무기래요. 두리안을 휘둘러서 순진한 어떤 여신을 울렸다는 소문이...”
“나랑 장난하냐?”
과일이 신(神)의 무기라고?
두리안의 껍질에 단단한 가시가 촘촘하게 달리긴 했지만, 신을 다치게 할 정도는 아니다.
“정말이에요! 라누벨이 똑똑히 들었어요! 당근으로 행성을 가르는 신도 있는걸요!”
“허! 이번에는 당근이냐?”
“이건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가 당근을 휘두르자 행성이 반으로 쪼개지는...”
“두리안으로 맞아볼래?”
“아뇨.”
“그러면 다시 닥쳐.”
“......”
라누벨의 별 시답잖은 헛소리로 시간만 낭비했다.
...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남아돌아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물론, 놀고 있진 않았다.
【원죄】
【마계】
끊임없이 마계의 벽을 두드렸다.
언젠가 뚫긴 할 것이다.
학생들에게 교육용으로 하나씩 주어진 교실, 판타지아의 평행세계가 줄어들수록 나의 힘이 강성해지기 때문이다.
벌써 체감이 됐다.
언제나 1% 미만이었던 나의 신격이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이변을 눈치챈 쏘시엘이 교실을 정리하고 있다는 방증. 감찰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면 더욱 빨랐을 것이다.
문제는...
【원죄】
【마계】
내 힘이 강해질 때마다 장모님의 힘도 덩달아 강해졌다.
내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마신이 힘을 조절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내 신세가 참...”
이젠, 성급한 어떤 마신에게 힘을 공급받고 있는 장모님을 설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얼른 깨어나시길, 라누벨의 척추를 잡고 기다려보는 수밖에.
*
마계는 낮과 밤의 구분이 없었기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루? 보름? 수년?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했다.
라누벨의 척추에 질려서 젓갈을 담가보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지루하다.
최근에는 금욕의 부작용으로 라누벨의 척추만 만져도 불끈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괴감이 들어서 라누벨의 머리만 남기고 모래사장에 묻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장모님도 묻어버리고 싶은데...
“마왕님. 라누벨은 심심해요.”
“보채지 마라.”
전에는 칭얼대는 라누벨의 갈비뼈를 뽑아서 눈구멍을 찔러줬지만, 이젠 그것도 귀찮아졌다.
들끓던 원한도 함께 식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그녀에게 조금은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뭔 짓을 해도 굴하지 않는 라누벨이 옆에서 끊임없이 조잘거리지 않았다면, 장모님의 몸에 진즉 손을 댔을 테니까.
이건 성욕의 문제가 아니다.
심심해서 미칠 것 같다!
“으응...”
“드디어 깼다...!”
한가로운 파도 소리에 섞인 장모님의 야릇한 비음.
...야릇하다고?
내가 드디어 미친 게 틀림없다.
“하암!”
“일어나셨습니까.”
“네. 그런데 몸이 멀쩡하네요.”
“라누벨의 신격을 온전히 흡수하신 모양입니다.”
“아뇨. 제 말은, 눈을 뜨면 당신의 아기가 제 뱃속에 들어있을 줄 알았거든요.”
“하, 하, 하... 그럴 리가요.”
정말 힘들었다.
라누벨의 주장처럼 무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두리안은 ‘마신의 과일’이 틀림없다.
먹을 때마다 불끈불끈!
안 먹으면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입마저 심심해서 절로 손이 갔다.
그렇게 먹으면 불끈불끈해서 견디기 힘들어지고...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정의로운 Z급 마왕님마저 피폐하게 만드는 이곳은 마계(魔界)가 틀림없다.
“옷도 바뀌었네요.”
“네. 여기서는 외부의 물건들이 부식돼서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나도 야자수 잎으로 만든 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있다.
오직 이 순간을 위해.
“흐응~♪”
“......”
“많이 화난 모양이네요.”
“그만 놀리십시오.”
장모님은 내가 만들어준 옷을 꼼꼼하게 살폈다.
내 옷은 정말 대충 만들었지만, 장모님은 속살이 안 보이도록 꼼꼼하게 맞춤형으로 제작했다.
장어의 가시로 바늘을 만들고, 두리안의 줄기로 만든 섬유로 실을 뽑아서 뜨개질했다.
...시간이 매우 잘 갔다.
“손재주가 정말 좋으시네요.”
“용사였으니까요.”
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용사를 자처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머! 제가 생각하는 용사랑 너무 다른데요?”
“그들은 짝퉁입니다.”
“그런 건가요?”
“그런 겁니다.”
“호호호!”
“하하하!”
“......”
“......”
우리는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장모님이 먼저 침묵을 깼다.
“끔찍한 꼴을 당하고 살해된 저는 마신님의 은혜로 소멸만 간신히 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어째서 도와주셨는지는 모르죠.”
“진짜 개판이군요.”
가출선배는 ‘용자의 힘’으로 마왕 페도나르를 쓰러트렸다.
그런데 이 힘은 성급한 어떤 마신이 ‘마왕의 아내’를 살리기 위해 빌려준 거였다.
즉, 아내의 복수를 하려는 남편을 아내가 무찌른 셈!
꼬여도 이리 꼬일 수 있나?
너무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다.
“우주에서 가장 성급한 분이 관여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장모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이미 말했을 텐데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마신님이 뒤에서 살짝 부추긴 건 사실이지만, 이 마음은 진짜입니다. 딸의 남자? 당신은 제 모든 걸 드리고 싶은 은인입니다. 몸도, 마음도, 아이도.”
“......”
“그래서 아쉬워요. 제가 조금만 일찍 부활했다면 딸의 자리를 차지했을 텐데.”
“흠흠. 장인어른이...”
“그 왕바보는 무시하세요. 영원히 저만 사랑한다더니, 5000년 만에 새살림을 잔뜩 차렸는걸요!”
“아, 네.”
생각해보니 그렇긴 했다.
내가 모험 도중에 썰어버린 마왕의 아들, 마왕의 딸, 마왕의 아내가 무척 많았으니까.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늦었습니다.”
“알아요. 잠든 사이에 아기가 생기지 않았으니까요.”
“......”
“하지만 이대로 얌전히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딸에게 복수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건 좀...”
“후후후. 이러면 당신이 난감하겠죠? 그래서 결정했어요. 쏘시아가 영원히 불안감에 떨며 살도록 계속 지켜보기로.”
“음?”
이게 무슨 말이지?
장모님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면서 제안했다.
【모험】
【마계】
“제가 가진 모든 신력을 빌려드릴 테니, 사도가 되어주세요. 그리고 쏘시아가 섭섭하게 할 때마다 저를 거론하세요.”
“좋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인가?
나는 기둥서방의 꿈에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