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28회차] 직접 해봐!
“신(神)은 사도를 통해서 세상을 관람할 수 있죠. 저는 여기서 라누벨과 함께 당신을 지켜보겠어요.”
“라누벨도?”
“혼자는 외롭잖아요.”
“......”
장모님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순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겹더라도 라누벨을 좀 더 다듬어놓을걸.
살짝 아쉬웠다.
“라누벨은 아쉽지 않아요!”
“닥쳐.”
나는 모래사장 위에 묘목처럼 얼굴만 내밀고 있는 라누벨을 향해 모래를 걷어찼다.
“퉤퉤! 너무해요!”
모래가 입에 들어간 라누벨의 항의했지만, 깔끔히 무시했다.
“장모님. 너무 외로우면 연락하십시오. 그때는 사위가 아닌 남자로서 찾아오겠습니다.”
“어머나! 말씀만으로도 벌써 심장에 무리가 오는걸요?”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딸아이가 섭섭하게 하면 언제든 절 찾아오세요. 당신의 지친 영혼을 치유해드릴게요. 육체는 좀 더 지치겠지만♪”
“어흠!”
1회차 초창기에 인어들에게 포위되어 정조를 위협받았을 때, 딱 이런 기분이었다.
그때도 동정은 아니었지만.
“쏘시아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한눈팔면 남편을 빼앗겠다고. 꼭 전해주셔야 해요? 일단은 장모로서 지켜보고 있겠어요.”
“네, 그러죠.”
이젠 생각을 포기했다.
장모님이 사위를 빼앗으려고 딸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중재해야 할 장인어른은 실종되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황!
나보고 어쩌라고?
정의로운 Z급 마왕님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콩가루 집안이다.
여기랑 비교하면, 정략결혼이 싫다고 무책임하게 가출한 철부지 공주님은 애교였다.
“성급한 마신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하길.”
“라누벨도 기도할게요!”
축복 대신 저주를 받은 찜찜한 기분으로...
“가볼까.”
GGG급 남편의 귀환이다.
*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내가 없는 사이에 판타지아 교육장이 몰랑소프트에 삼켜지는 비극은 없었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창세】
비겁한 마누라의 신격이 판타지아 전역에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잘못되면 바로 짐 싸서 탈주하라고 했는데,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건 최악은 아니란 방증.
일단은 한숨 돌렸다.
뿅!
“남편님!”
내가 돌아오자마자 귀신같이 눈치챈 쏘시엘이 빛과 함께 나타나더니 곧바로 덥석 안겼다.
GGG급 남편님의 넓고 단단한 가슴이 그리웠구나?
...나도 마찬가지다.
비겁한 마누라의 몰랑한 가슴이 그리웠다.
“얼른 벗어.”
“어? 자, 잠깜만! 일단은 이야기부터... 꺅?!”
“세상이 내일 멸망하더라도 이것보다 중요할 순 없어!”
【원죄】
쫘악, 쫙-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보다 훨씬 유용한 신격으로 마누라의 거추장스러운 포장지를 뜯었다.
몰랑~?!
그녀의 비겁한 가슴골에서 곤히 쉬고 계시던 무지갯빛 슬라임, 마스터 몰랑도 몰랑하셨다.
아아, 위대한 존재시여. 정말 죄송하지만, 비상사태입니다.
양해를 구할 틈이 없다.
“진정해. 진정... 우읍!”
“쓰읍!”
쫑알대지 못하게 쏘시엘의 입술을 틀어막고, 드럼세탁기처럼 혀를 부지런히 돌렸다.
“흐응...”
음탕한 비음을 내뱉은 마누라가 양팔을 내 목에 두르며 호응했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척추를 쓰다듬으며, 오른손으로는 골반의 정중앙을 문질렀다.
시위를 당긴 활대처럼 휘는 마누라의 비겁한 척추.
드디어 때가 됐다.
“타올라라, 성창(聖槍)이여!”
“꺅?!”
정의로운 GGG급 마왕님의 성창이 비겁한 마누라를 꿰뚫었다.
이어서 연속 찌르기를...
*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영원할 줄 알았던 성창의 분노가 마침내 식었다.
도중에 마누라가 잠시만 쉬자고 애원했지만, 나는 그녀의 골반을 끝까지 놔주지 않았다.
장모님의 복수다!
“그걸 왜 남편님이 하는데...?”
“어허! 말대꾸하지 마. 내 뒤에는 장모님이 계신다구? 딸보다 사위를 더 사랑하는 분이시지!”
“엄마가...”
침대 위에 시체처럼 축 늘어진 쏘시엘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줄 알았던 모친의 부활만으로도 놀라운데, GGG급 남편님을 유혹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내가 나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인간적으로 너무 개판이잖아?
당사자들끼리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 한다.
“그래서 감찰의 상황은?”
“저기, 남편님. 나부터 물어보면 안 될까? 엄마랑 19년 동안 어디서 뭘 하며 지냈어?”
“나중에 직접 물어봐.”
“그러면 하나만.”
“말해.”
“...했어?”
“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재회하자마자 MAX급 현자처럼 총명한 눈빛으로 상황부터 물었겠지.”
“그, 그렇구나! 응, 그렇지!”
“그래서 상황은?”
귀여운 척하는 라누벨을 장모님께 기부한 건 애석하지만, 목의 가시 같았던 악당을 물리쳤다는 점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내 얘기를 듣고부터 표정이 밝아진 쏘시엘이 요약해서 설명했다.
“페스티벌은 혼돈과 파괴 속에서 흐지부지 넘어갔어. 아빠에게 대적하는 악의 무리를 용서할 수 없다면서 쌍둥이가 여신 진영을 통째로 응징해버렸거든. 말릴 틈도 없이.”
“그, 그랬군.”
훌륭한 패왕으로 자라줘서 이 아빠는 매우 기쁘구나...
“마왕 진영에는 쌍둥이 미소녀가 있는데, 여신 진영은 흉측한 살덩이를 보호해야 하는 건 불공평하다는 악평이 쇄도 중이야.”
“그건 좀 억울한데.”
여태까지 외모가 베일에 쌓여있어서 몰랐을 뿐이지, 여신 파르마엘은 원래 그렇게 생겼었다.
그리고 쌍둥이는 판타지아 대륙에서 가장 귀여운 황제였던 나를 닮아서 귀여운 거다.
조작과 악의는 없었다.
“페스티벌 참가자들이 그렇게 느꼈다는 게 문제야. 감찰에는 외부의 평판과 교육생의 만족도 같은 지표도 점수에 포함되거든.”
“파르마엘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움이 안 되네.”
이러면 최악의 결과 아닌가?
“나도 그렇게 끝날 줄 알았는데, 우유엘 덕분에 살았어.”
“우유엘?”
그게 누군데?
“세 번째 천사. 아기님이 수십 년 동안 씹고 핥았던... 비운인지 행운인지 애매한 천사 여성이야.”
“아! 그...”
언제부턴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래서, 캡틴 판타지가 오물거리던 닭대가리가 뭘 어쨌는데?
쏘시엘이 답했다.
“마왕 파르마몬에게 사로잡힌 진짜 여신 우유엘을 구해주세요, 라는 시나리오를 첨가했지.”
“그래서 좀 나아졌어?”
“인기폭발! 쌍둥이가 너무 막강해서 구출에는 실패했지만, 최악으로 치닫던 평가만은 막을 수 있었어. 우유엘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폐교될 뻔했어.”
“헤에~”
그 뒤에는 별거 없었다.
여신 진영을 선택한 참가자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여신 파르마엘을 실권시킨 후, 독자적으로 여신 우유엘을 구출하는 사모임 ‘여신교’를 창설했다고 한다.
모든 참가자가 페스티벌 종료로 귀가하면서 여신교도 흐지부지 해산됐지만, 다음 페스티벌을 기약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고...
비겁한 마누라가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면 안 믿었을 것이다.
“우유엘의 그 공적을 인정해서 과거의 죄는 불문으로 하고, 홍보대사로 임명했어.”
“출세했네.”
“다만... 상태가 좋지 않아. 금단증상이라고 할까...”
“페스티벌 다음은?”
사탄이 너무 잘해줘서 추가로 학생 2명을 더 선별하기로 했었다.
19년이 흘렀다고 했다. 그렇다면 결과가 나왔을 터.
그 질문을 받은 마누라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애매해.”
“네 설명이 더 애매한데.”
정의로운 GGG급 남편님께 친절하게 설명해봐.
“그러니까... 몰랑폰 커뮤니티의 공략법 공유 덕분에 용사들의 평균 성적이 급격히 올라갔어. 사탄 덕분에 학생들이 체감하는 탑의 난이도 또한 많이 내려갔고.”
“그런데?”
잘된 일이지 않나?
“그래도 어려워서 사탄 이후로 단 한 명도 90층을 넘지 못했어.”
“당연하지!”
손발 다 잘린 분신이긴 하지만, 나태한 FFF급 용사들에게 질 정도로 약하진 않다.
사탄도 쑥떡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90층을 절대 못 넘었을 것이다.
쏘시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문제야. 감찰했던 첫 번째 학생은 객기부리다가 일찌감치 죽으며 탈락. 두 번째 학생은 사탄의 공략을 똑같이 따라 했지만, 90층에서 좌절하고 말았어. 그 뒤, 감찰단은 현 5차 교육과정이 잘못됐다고 지적했고, 최후통첩한 상태야.”
“최후통첩?”
굉장히 불길한 단어였다.
“그 부분은 제가 직접 설명하겠습니다. 마왕 씨.”
“남의 침실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건가, 디스코 양?”
“그 점은 실례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은 이후부터 보름 동안 기다렸다는 점을 상기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디스코가 아니라 디스토리아입니다. 똑바로 불러주시길. 애칭은 주인님만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건 됐고. 용건이나 말해.”
“그러죠. 우리는 판타지아 교육장에서 학생들에게 무리한 교육을 강요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몰랑폰에 의존하도록 강요하는 풍조도 찬성할 수 없고요.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의 주관적인 판단. 그래서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기로 했어요.”
“기회라...”
디스코가 무슨 억지를 부릴지 들어보기로 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나요? 학생들에게 이론만 떠들지 말고 선생이 직접 풀어보라고.”
“아하! 나보고 깨봐라?”
“단, 학생들보다 불리한 조건으로 시작하는 게 당연하겠죠? 감찰단에서 제시한 육체로, 마왕의 탑 100층에 도달하면 됩니다. 시간제한은 교육장 내부시간으로 10년입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라.”
“그건 저희가 할 소리입니다. 공정성을 위해 쏘시엘 교장님은 교외(校外)에서 대기해주세요. 매우 중요한 참관이 될 테니까요.”
침대 위에 힘없이 엎드려있던 쏘시엘이 발끈했다.
“저는 교장이에요!”
“괜찮아. 저쪽에서 해달라는 대로 해줘.”
“남편님! 잘난 건 아는데, 이건 함정이 틀림없어! 절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
“쏘시엘. 이 기회에 아들이랑 휴가나 다녀와. 내가 아주 멋진 파라다이스 섬을 알고 있거든♪”
【마계】
아주 좋은 곳이다.
깜빡한 아들과 쌍둥이 얼굴 좀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마누라의 경고처럼 함정일 수도 있지만, 무조건 나쁜 제안인 건 아니다.
마누라와 아들이 교육장 밖에 있으면,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나만 덤터기 쓰면 되니까.
내 일생일대의 모험.
회귀나 재시험 따위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정의로운 용사의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결정된 듯하군요.”
“조건을 말해봐.”
얼마나 개떡 같은 육체로 시작시킬지 벌써 궁금했다.
*
마계에 계신 장모님께 딸과 손자를 보냈다.
딸을 보자마자 머리끄덩이부터 잡으실 것 같지만, 귀여운 손자를 보고 마음이 풀리실 것이다.
...괜찮지 않을까?
콩가루 뿌린 막국수 같은 집안이라서 살짝 걱정된다.
하여간...
“마누라의 탈모를 걱정할 때가 아니네.”
이미 게임은 시작됐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무직(경험치 110%)
▷스킬: 업보A
▷상태: 양호
난이도는 고등교육과정이고, 신력과 시스템은 사용금지!
이것만으로도 절망적인데, 악명 높은 스킬 ‘업보’가 F등급도 아닌 A등급으로 떡하니 박혔다.
...노골적인 함정이군.
하지만 괜찮다.
“용사님? 실례지만, 제 설명을 듣고 계시나요?”
“당연히 안 듣고 있었습니다, 황녀님.”
“그렇다면 다행... 네?”
“간악한 신성제국 이단자의 설명 따위를 내가 경청할 것 같아?”
“이, 이단-?!”
이곳은 신성제국 수도 마탑.
다른 학생들처럼 나도 신성제국 황녀가 마중 나왔다.
업보A 때문에 시작부터 노골적으로 얕잡아보긴 했지만, 나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
“평판과 인성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정말 편하네~”
그뿐만이 아니다.
▷종족: 아크 휴먼
▷레벨: 1
▷직업: 광신도(신앙→광기↑)
▷스킬: 신앙S 업보A
▷상태: 광기
쓰레기 직업 ‘용사’에서 해방됐다.
이 기세로 종교계 SSS급 직업 ‘교주’를 빠르게 찍어보자!
“몰랑계시록 1장 1절. 그분이 한 번 몰랑하니 하늘이 열리고, 두 번 몰랑하니 땅이 솟구치더라. 존경하는 이교도 여러분. 세 번째 몰랑에 뭐가 생겼는지 아십니까?”
꽃길만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