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28회차] 2교시
“용사님. 제국은 소녀에게 맡겨주시고 모험에 전념해주세요. 몰랑한 마음으로 잘 다스리겠습니다.”
신성제국이 개편됐다.
다음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웠던 황태자가 귀족들의 만장일치로 요정왕국이랑 맞닿는 국경으로 파병을 떠났다.
정치계에서 쫓겨난 셈!
그리고 황녀가 절대적인 지지 아래에 황위서열 1위가 됐다.
단 보름만에 벌어진 일이다.
“두고 보면 알겠지.”
“약소하지만 모험자금을 준비해봤습니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마탑을 통해서 연락 주세요.”
짤랑!
황녀의 눈짓을 받은 기사가 묵직한 돈주머니를 내게 건냈다.
이 듣기 좋은 영롱한 소리는 금화가 틀림없다.
“잘 다스릴 것 같네.”
“호호! 말씀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입니다.”
오고 가는 물질 속에서 신뢰가 쌓이는 법이다.
황녀는 용사를 날로 부려먹으려고 하던 여타 양아치 귀족, 왕족이랑 확실히 달랐다.
물론, 내가 만만했다면 1회차 때처럼 돈주머니가 아닌 눈물과 ‘도와주세요. 흑흑!’ 같은 연기로 의뢰비를 대신했을 것이다.
이 원리를 이해 못 하면?
⤷피코: 내 황녀가 이렇게 사악할 리 없어!
⤷제우스: 뭐지? 얼굴만 같은 다른 인물인가? 황녀는 좀 더 순수하고 눈물이 많은 캐릭터였는데...
⤷아몬: 어리석은 놈들. 내가 말은 안 했지만, 알고 있었다. 예쁜 얼굴에 가려진 황녀의 진짜 모습을.
⤷루나: 충격적이긴 하네요. 실망스럽기도 하고.
이 사회부적응자들처럼 ‘내가 아는 황녀는 저렇지 않은데?’라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어릴 적부터 정치판에서 구른 황녀는 쉽게 본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매우 신중하지만, 이건 누가 말해주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음모가 평행세계의 모든 용사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내년을 기대하라구.”
“호호호! 용사님의 모험에 몰랑이 늘 함께하시길.”
“몰랑.”
“몰랑.”
우리는 미리 호흡을 맞춘 배우처럼 자연스럽게 인사하며 헤어졌다.
정의로운 용사로서 수많은 악당을 상대하며 터득한 정치술.
밤에 성문을 두드리듯 황녀의 야망을 살짝살짝 자극하면서 안달하게 하는 건 매우 쉽다.
...쉬운 상대란 뜻은 아니다.
나는 내년까지 질질 끌며 모험할 생각이 없다. 그렇기에 황녀에게 여러 약속을 남발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도의...
“사기인데요.”
디스코가 뒤에서 초를 쳤다.
동영상을 의식해서 주절주절 설명하던 정의로운 용사님은, 밥값도 아까운 동료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나쁘게 해석하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1년 안에 100층까지 올라갈 계획이 아니었다면 나도 좀 더 부드러운 방식을 택했을 거야. 직접 몰랑하게 제국을 삼키는 식으로.”
“1년...?”
“왜? 1년도 길어?”
“아니요! 그 반대인데요! 1년 안에 가능하다고요?”
⤷오딘: 내가 잘못 들은 건가? 1년이라고 한 것 같은데.
⤷제우스: 사탄이 20년 가까이 걸리지 않았나? 그런데 맨몸으로 시작한 교사가 뭐라는 겨?
⤷알라: 하하! 너희들은 왜 이렇게 아둔하냐? 사기꾼 말을 진지하게 듣다니.
⤷이시스: 그 사기꾼이 여태 졸업 못 하는 선배보다 훨씬 낫네요.
⤷레온: 그런데 이러다가 1년 안에 못 깨면 개망신 아닌가?
디스코의 뒤를 이어서 몰랑폰 커뮤니티도 시끄러워졌다.
정치인들이 이런 맛에 ‘저를 뽑아주시면 행복해지실 겁니다!’ 같은 불가능한 공약을 매번 거는 걸까?
내 취미는 아니다.
“이번에는 던전을 탐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몰랑교 교주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90층의 나를 쓰러트리려면 레벨도 좀 올려둘 필요가 있다.
물론,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대로 마왕의 탑에 도전해도 된다.
쑥떡이 있으니까.
내가 옆에서 조언만 해주면 99층까지 혼자 돌파할 능력이 된다.
하지만 쓰지 않는다. 이 정보가 새면 쑥떡을 더는 용사의 모험에 가담시킬 수 없으니까.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흑각룡 뇌비우스
대현자 섹스피어
거인왕 페닉스
그리고 정의로운 고대의 용사란 설정으로 판타지아 전역을 떠도는 나의 분신, 강한수까지.
위에 넷 중 하나만 설득하면 90층까지 눈 감고 갈 수 있다.
그래서 봉인.
모험이 너무 쉬워서 스스로 제약과 규칙을 정하는 실정이다.
“뭐지? 화살이 안 박혀!”
“마, 마법인가?”
“도망쳐! 칼도 안 통해!”
“히익?! 괴물이다!”
던전이라고 말하면 몬스터가 바글바글한 동굴을 떠올리기 쉽지만, 산적소굴도 여기에 속한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순수한 기교만으로 어느 던전이든 무난하게 깰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몰랑폰 커뮤니티에서 ‘사기다! 조작이다!’라고 주장할 연놈들이 바글바글하니까.
그래서 능력치를 쓰기로 했다.
이게 종교계 A급 직업 ‘수도사’의 힘이다.
▷종류: 스킬
▷명칭: 신성
▷등급: SS
▷SSS: 경배받는다.
▷SS: 신성한 반사를 행사한다.
▷S: 일반속성 공격을 무시한다.
▷A: 찬양한다.
▷B: 마기를 정화한다.
▷C: 신성한 방어를 행사한다.
▷D: 축복한다.
▷E: 마기를 견뎌낸다.
▷F: 신성한 공격을 행사한다.
수도사는 신앙만큼 신성이 증가하는 직업효과가 있다.
수많은 모험가, 용병 파티에서 수도사가 맨손으로 몬스터와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이것 덕분이다.
신성의 효과들을 보라.
공격, 방어, 반사, 버프, 선동...
만능이다.
그중에서도 S등급과 SS등급은 대비책이 없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신성을 품은 닭대가리들이 괜히 싸움 못 하는 게 아니다.
“...당신이 더 산적 같군요.”
“어딜 봐서?”
“어디를 보더라도.”
“150레벨 용사가 평균 300레벨대 산적소굴에 홀로 돌격했는데? 이게 산적 같다고?”
“그, 그건...”
조금이라도 똑똑한 학생이라면, 이 선생님이 수많은 몬스터 서식지를 놔두고 산적들의 아지트를 공격한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답은 여기에 있다.
“이단자들에게 정의의 철퇴를!”
▷종류: 스킬
▷명칭: 신앙
▷등급: SS
▷SSS: 이단자를 봉인한다.
▷SS: 이단자를 응징한다.
▷S: 이단자를 세뇌한다.
▷A: 이단자를 추적한다.
▷B: 이단자를 구분한다.
......
스킬 신성은 방어에 관해선 정말 나무랄 부분이 없지만, 공격은 상대적으로 매우 형편없다.
그걸 ‘신앙’이 해결해준다.
이단자란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 대신, 매우 높은 효율을 자랑한다.
여기는 고등교육과정.
산적이라도 무시할 수 없다.
▷종족: 휴먼
▷레벨: 287
▷직업: 산적(지형→기습↑)
▷스킬: 체력B 기습C 잠복C
등산C 내성D…
▷상태: 혼란, 공황
초등교육과정에선 아무리 높아도 150레벨을 넘지 못했던 산적들.
그러나 고등교육과정에서는 300레벨에 육박했다.
산적 주제에 움직임이 무술인처럼 날렵하고 전문성이 있다.
그런 놈들이 수백.
하지만 신앙심으로 충만한 용사님의 상대는 못 됐다.
“몰랑교의 사자인가...!”
“살려주세요! 오늘부터 몰랑교를 믿겠습니다!”
“혀, 형제님! 제 부모님은 몰랑교의 신도이십니다!”
“저는 몰랑교와 그분을 욕한 적이 없습니다!”
산적들이 살려고 발악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공평하게 경험치로 바꿨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신성에 없는 스킬 효과가 신앙에는 잔뜩 달렸으니까.
색적, 추적, 세뇌, 공격.
산적들이 아무리 열심히 도망쳐도 세상 끝까지 추적할 수 있고, 도시의 혼잡한 군중 틈에 섞여도 바로 구분이 된다.
신성의 F등급 효과인 ‘신성한 공격’은 위력이 변변찮지만, 신앙의 ‘응징’은 SS등급답게 막강하다.
단, 조건이 까다롭다.
“몰랑과 말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네놈들에게 구원 따위는 없다!”
상대가 무조건 이단자여야 한다.
종교란 개념 자체가 희박한 몬스터를 상대로는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산적소굴을 노린 것이다.
변변찮은 골반과 척추를 자랑스럽게 노출한 복장을 한 여성 산적두목도 예외는 아니다.
“호호호! 당신, 정말 강하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 밑으로 들어오면 부두목 시켜줄게. 아! 종교활동도 보장- 꺄윽?!”
“나를 높이 평가해줘서 고마워. 앞으로 영원히 함께야.”
우득.
본인은 500레벨대라서 다를 줄 알았던 모양인데, 이단자가 갈 곳은 경험치로 정해져 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산적두목은 내 팔을 자를 의도로 새파란 검기를 품은 단검을 휘둘렀지만, 정의로운 용사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끝까지 팔을 뻗었다.
그리고 척추를 잡았다.
“알렉스처럼 심검(心劍)이라도 쓴다면 모를까.”
SS등급 신성을 뚫으려면 ZZZ등급 검술이 필요하다는 게 부조리하긴 하지만, 레벨로 상대를 평가하는 판타지 시스템보다는 인간적이다.
믿었던 두목의 목이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인 광경을 본 산적들의 마음도 꺾였다.
“미녀 두목마저...!”
“항복한다고 했잖아!”
“너는 피도 눈물도 없냐!”
“살인귀 새끼!”
나는 그들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깔끔히 몰살시켰다.
약자를 괴롭힐 때는, 언젠가 자신도 더한 강자에게 똑같이 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도 그렇다.
조금 강해졌다고 날뛰던 나는 마스터 몰랑의 몰랑함을 겪은 뒤부터 몰랑한 용사가 되었다.
몰살F→몰살E
원했던 스킬이 생겼다.
여기에 덤으로 ‘학살’도 얹어주길 은근히 바랐지만, 산적의 머릿수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전쟁이라도 나가볼까?
커뮤니티 상황은...
⤷아몬: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제우스: 오딘은 어디 갔냐? 정말로 생각을 그만뒀나.
⤷알라: 어린 친구들. 동영상에 현혹되지 마라. 신성은 저렇게 레벨 무시하는 만능이 아니야. 내가 직접 써봐서 잘 알아.
⤷루나: 알라 씨랑 나의 선생님이 같을 리 없잖아요? ^^;;
⤷이시스: 나의 선생님? 듣기 불편하네요.
썩 나쁘지 않았다.
이 동영상을 본 많은 용사가 마스터 몰랑의 위대함과 가르침을 깨닫길 빈다.
“자, 그러면...”
산적소굴에 붙잡혀 있던 미소년들을 포함해서 자질구레한 뒷수습은 쑥떡에게 맡기고, 나는 육포와 마유주로 가볍게 허기를 채운 후,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곧바로 어딜 가는 거죠?”
“던전.”
“당신은 이 짓을 쉬지 않고 또 할 셈인가요?”
“당연하지. 소문이 퍼져서 숨거나 개종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처리해둬야 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구해낸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며 자위하는 무의미한 시간이라도 가질 줄 알았어?”
“......”
“남의 시선과 평가를 신경 쓰는 선행은 어른의 소꿉놀이지. 자! 잡담은 이쯤하고, 계속 가보실까. 쑥떡. 늦지 않게 처리하고 따라와. 뒷수습이 밀리면 골치 아파진다.”
“네! 아버지... 같이 정의로운 용사님!”
나는 신성제국을 시작으로 큰 산맥을 따라서 산적들을 몰살시키며 중앙대륙 중부까지 내려왔다.
이곳을 찾은 이유?
저 앞에 산맥은 2000년째 수면 중인 뇌비우스고, 그 옆의 호수에는 인어공주 아쿠아와 토마토 성기사가 산다. 그리고 이 일대를 지배하는 성왕국에는 성녀A가 버티고 있다,
“동료는 필요 없다면서요?”
“내가 언제 동료라고 했어? 그냥 이런 동네라고 설명했지.”
여전히 ‘신성’과 ‘신앙’의 환상적인 콜라보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우매한 시청자들에게 설명해주던 나는 디스코의 착각을 바로잡아줬다.
물론, 그들이랑 전혀 연관성이 없는 건 아니다.
동료가 아닐 뿐이지.
나는 허공을 향해 말했다.
“잘 봐둬라. 이렇게 쉬운 모험은 돈 주고도 못 배우니까.”
방송 끝난 후에 졸업생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서 판타지아 교육장이 텅텅 빌지도 모른다.
비겁한 마누라가 보면 깜짝 놀라겠지?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