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28회차] 용사 vs 성룡왕
“후후. 용사님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준비했는지 잘 보았습니다. 과장 하나 안 보태고 정말 다 죽이시더군요. 하지만 진지하게 임하는 저를 이길 순 없습니다.”
“그거야 해봐야 알지.”
“맞아요. 아! 오늘 중으로 완성하는 것 외에는 규칙을 따로 정하지 않겠습니다. 이견 있나요?”
“없습니다.”
“그러면 얼른 시작하죠!”
성룡왕 에르단티는 긴 세월 동안 쌓아온 인맥을 총동원해서 수많은 식재료를 모았다.
세상에서 가장 담백한 버섯, 세상에서 가장 고소한 고기, 세상에서 가장 아삭한 당근,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딸기, 세상에서...
그 비겁함에 치가 떨렸다.
“이쯤은 예상했지.”
척!
나는 보름 동안 일일이 만져보면서 엄격하게 고른 신선한 척추를 조리대 위에 꺼냈다.
참고로, 용(龍)의 척추는 아니다.
동족을 먹일 순 없잖아?
척척!
던전에서 구한 암염(巖鹽)과 희귀한 약초, 유니콘의 꽃등심 등을 차례대로 도마 위에 올려놨다.
“별거 없네요.”
이쪽을 힐끔 훔쳐본 에르단티가 벌써 다 이겼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조리대 위에는 온갖 식재료가 갖추어져 있었다. 저기서 나온 자신감이 틀림없었다.
나는 코웃음 쳤다.
“재료가 많다고 맛난 요리가 나오는 건 아니죠.”
“어머! 오해 중이신 듯하군요. 저는 다양한 요리를 준비할 겁니다. 분하게도, 쑥떡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까요.”
탁탁탁탁!
정의로운 G급 용사님을 도발하면서도 에르단티의 손은 쉬지 않고 도마 위에서 칼질하는 중이었다.
기계처럼 규칙적인 크기로 매우 빠르게 재료들을 다듬어갔다.
고향별 지구의 요리 프로그램을 떠올리면 안 된다.
100배속이랄까.
조리도구들은 그녀의 힘과 속도를 견딜 수 있도록 통짜 미스릴로 만들어졌다.
▷종류: 스킬
▷명칭: 요리
▷등급: Z
▶ZZ: 요리의 부패를 막는다.
▶Z: 식자재 손질이 생략된다.
▷SSS: 냉동고를 소환한다.
▷SS: 화롯불을 소환한다.
▷S: 식자재 손질이 빨라진다.
▷A: 요리의 독성을 제거한다.
▷B: 요리의 악취를 제거한다.
▷C: 요리의 쓴맛을 제거한다.
▷D: 요리의 부패를 늦춘다.
▷E: 요리의 맛을 강화한다.
▷F: 괜찮게 요리한다.
하지만 성룡왕 에르단티는 ZZ등급에 달한 ‘요리’ 스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진 않았다.
직접 식자재를 손질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순식간에 끝나서 생략하지 않아도 별 차이 없었지만, 시스템의 도움 없이 최고의 요리를 대접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팟-!
...의지는 개뿔.
에르단티는 완성된 요리를 축복해서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는 완전식품으로 만들었다.
“후후후! 이러면 요리에 풍미가 더해지게 되죠.”
그녀의 비겁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육아, 사랑, 행복, 기도, 소망...
전투계열 스킬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듯이, 보조계열도 연계되면서 효과를 중첩한다.
지금이 딱 그랬다.
요리 스킬을 한계돌파 한다고 잡다한 스킬들을 제물로 갈아버리기도 했지만, 원래부터 보조계열이랑 친하지 않았던 나로선 엄두도 못 낼 비겁한 수법이었다.
“...거참.”
나는 큰 냄비에 준비해온 척추를 넣고 찬물을 가득 담았다.
핏물을 빼는 작업이다.
탁, 탁, 탁.
그리고 판타지아 대륙에서 대파처럼 많이 쓰이는 향신료 중 하나인 파르파르 풀을 손가락 마디 크기로 썰었다.
처음부터 이럴 거였으면 Z등급을 애써 찍을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승급은 단순히 새로운 효과가 추가되는 게 아니다.
기존의 효과들도 강화해준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요리 스킬이 ZZ등급인 에르단티가 훨씬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시스: 예상하긴 했지만, 상대가 안 되네요. 압도적이에요.
⤷루나: 선생님도 열심히 준비하셨는데... 힘내세요. 선생님.
⤷가이아: 당신의 응원 따위는 선생님께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저라면 모를까.
⤷제우스: 이럴 줄 알았지.
⤷오딘: 풋! 꼴에 선생이라고 자만하더니 저렇게 되네.
⤷알라: 뜻을 함께하는 형제들이여! 축배를 들자!
몰랑폰 커뮤니티에서는 벌써 나의 패배를 확신하는 분위기였다.
우리의 시합을 지켜보는 도시의 주민들도 비슷한 마음인 듯했다.
이 대결은 끝났다고.
척. 척, 척, 척...
성룡왕 에르단티는 과시하려고 식재료들을 쌓아둔 게 아니었다.
그 전부를 활용해서 다양한 요리를 선보였다.
심지어 먼저 끝냈다.
시간개념이 매우 관대한 용답지 않은 속도였다.
“마, 많네요.”
“쑥떡이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전부 준비해봤어요! 사양하지 말고 드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읍!”
자기 머리카락이랑 색이 비슷한 채소와 과일 위에 소스를 얹은 셀러드를 포크로 푹 찍어서 입에 넣은 쑥떡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떤가요?”
“...맛있습니다. 소스는 상큼하면서도 그렇게 달지 않아서 좋았고, 입안에서 아삭아삭 씹히는 파르파르 새잎도 매우 신선하네요.”
“이거랑 함께 먹어보세요.”
“헛! 저는 육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헤헤...”
쑥떡의 칭찬을 들은 에르단티의 표정이 유감스럽게 풀려버렸다. 본인은 전혀 자각하는 못하는 듯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면서 쑥떡이 먹는 모습을 빤히 구경했다.
원래는 용이기 때문일까.
쑥떡은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벌써 배탈이 났을 양을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그리고 줄어드는 요리 만큼 시합의 열기도 함께 식어갔다.
“이미 승패가 갈린 것 같은데.”
“저 조그마한 몸에 그 많던 요리가 다 들어가다니...”
“나도 갑자기 배고프다.”
“용사는 아까부터 가만히 기다리면서 뭘 만드는 거지?”
“라누벨 사골곰탕? 분명히 이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귀여운 고고학자 라누벨이 가르쳐준 요리법인가?”
한심하긴! 가르쳐준 게 아니라 주재료가 라누벨이었다!
소머리국밥, 순대국밥, 꼬리곰탕, 영계백숙, 닭볶음탕...
요것들처럼.
마계에서 통달한 요리로, 두리안과 코코넛에 질린 라누벨도 인정한 마왕(魔王)의 맛이다.
“슬슬 다 돼가는군.”
척추에서 육수를 충분히 우려내기 위해 스킬을 사용했음에도 시간이 꽤 많이 소요됐다.
풍덩!
여기에 유니콘 꽃등심을 넣었다.
처녀만 등에 태우는 순수한 신수(神獸)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잡은 유니콘은 미소년들을 납치하는 산적을 따르던 놈이다.
신수는 무슨.
정의로운 성검도 주인을 잘못 만나면 마검으로 불릴 수 있다.
...다 익었으려나?
⤷지크: 방송 보다가 못 참고 야식 먹는 사람. 손!
⤷레온: 손!
⤷제우스: 유치하긴. 손.
⤷피코: 몰랑!
⤷M.사탄: 쑥떡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지 않습니까?
나는 동대륙에서 수입된 쌀로 밥을 지으며 마무리했다.
좋은 쌀을 구하려고 딱히 애쓰진 않았다. 시장을 두리번거리던 중에 보이자마자 냉큼 샀으니까.
도정은 되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스킬 요리의 Z등급이 유용하게 쓰인다.
▶Z: 식자재 손질이 생략된다.
쌀알을 덮은 껍질이 마법처럼 자동으로 벗겨진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현장에서 바로 도정해서 짓는 밥이 묵은쌀보다 나쁠 리 없었다.
“이쪽도 잘 됐고.”
마찬가지로 동대륙에서 수입된 밥솥의 뚜껑을 열자마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동대륙의 음식이었나요?”
고기와 채소가 주를 이루는 중앙대륙의 식단을 짠 에르단티가 살짝 흥미를 보였다.
완성돼가는 사골곰탕을 본 그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승리에 대한 확신.
나는 국그릇에 담은 사골곰탕 위에 판타지 향신료를 뿌리며 요리를 마무리했다.
“쑥떡. 먹어봐.”
“네.”
먹는 방법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예전에 나를 따라다니면서 배웠으니까.
하지만 완벽히 똑같진 않았다.
풍덩!
쑥떡은 밥을 전부 국에 말았다.
밥이 불지 않도록 조금씩 덜어가면서 먹는 나하고는 확실히 달랐다.
...취향을 존중해주자.
“냄새가 좋네요.”
“좋은 척추를 썼으니까.”
“얌.”
“......”
“......”
“흑, 흑흑!”
그렇게 한 입 먹은 쑥떡이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이래?
“쑥떡. 너무 맛있어서 감동했냐?”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에르단티가 서둘러 국물을 맛봤다.
“...괜찮긴 하지만, 먹다가 울 만큼 대단한 맛은 아닌데요. 용사님. 쑥떡의 요리에다가 이상한 약을 탄 건 아니죠?”
“아니야! 나를 뭐로 보고!”
“당신이 한 달 동안 해온 짓을 보고서 하는 말입니다. 제발 살려달라고 찾아오는 산적이 많습니다.”
“아! 죄송하게 됐습니다. 산적들을 완벽하게 처리했어야 했는데, 요리에 집중하느라 조금 흘렸네요.”
“그런 얘기가... 하아. 됐어요.”
내가 친구의 마누라랑 티격태격하는 사이, 쑥떡은 사골곰탕을 전부 먹어치웠다.
마무리는 유니콘 꽃등심 수육.
이건 사골곰탕처럼 극적인 반응은 없었다.
그리고 평가시간이 왔다.
“에르단티 아줌마의 요리는 나무랄 곳이 없었어요. 정말 오랜만에 혀가 호강하는 기분이었어요. 먹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헤헤...”
“하지만 저는 용사님의 요리에 손을 들어드리겠어요.”
“어째서...!”
“한 숟가락 떠먹자마자 떠올라버렸어요. 함께 모험하며 구한 식자재를 이용해서 즉흥적으로 요리해주시던 아버지의 투박한 손맛이.”
“아...”
“순수하게 맛으로만 따진다면 에르단티 아줌마가 더 훌륭했습니다. 제 입맛을 몰라서 다양하게 준비한 성의와 배려가 느껴져서 마음도 따뜻해졌고요. 만약, 저를 심사위원으로 뽑지 않으셨다면 가볍게 용사님을 이기셨을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살짝 낙담하던 에르단티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솔직하게 대답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저는 쑥떡의 그런 올곧은 마음씨를 좋아한답니다.”
“당연한 거죠.”
“세상에는 그 당연한 말을 못 하는 사람이 많답니다. 이대로 용사의 요리가 더 맛있었다고 우기며 끝냈다면 당신에게 실망했을 거예요.”
“다시 한번 죄송-”
“아니요. 저는 쑥떡을 심사위원으로 뽑은 걸 후회하지 않아요. 요리하는 내내 행복했는걸요? 자식에게 요리해주는 엄마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답니다. 그래서 패배도 인정할 수 있어요. 이건, 쑥떡의 삶을 고려하지 않고 맛에만 충실한 결과니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든 말하세요. 쑥떡을 위해 또 요리해주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또...”
삼류악당처럼 발끈할 줄 알았던 성룡왕 에르단티가 순순히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정의의 승리로군!
하지만 이후에 내 레시피를 참고한 학생들은 쑥떡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게 아버지의 손맛이란 거다.
*
[비밀글] 추억의 사골곰탕
[작성자] 쑥떡
[첨부파일] 요리대회.mp4
[중요도] S
용사들의 신상정보를 공유해서 관찰시간을 단축하는 용도지만, 오늘은 조금 사적으로 쓴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요리해주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그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행복한 기분이다.
형편상 오늘은 혼자 먹었지만, 다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이랑 함께 식사하고 싶다. 그러면 분명히 즐겁겠지.
그리고 결심했다.
진짜 에르단티 아줌마를 데려간 최초의 용사를 내 송곳니로 물어뜯어 죽이겠다고.
첨부한 동영상을 본 모든 나에게 이 마음이 전해지길. 몰랑.